한 가지 해법(문 닫기)②
하지만 프랑스 함대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은 미국의 상선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그 해 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한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朴珪壽)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으나 대포까지 장착한 상선답지 않은 상선은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대동강을 거슬러오더니 급기야는 선원들이 평양에 무단으로 상륙해서 관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마침내 조선 군인이 대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분노한 박규수는 셔먼 호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증기선에 대포까지 있다 해도 스물네 명의 선원이 수천 명의 관민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결국 군함 같은 상선과 깡패 같은 선원들은 이역만리까지 와서 제 무덤을 팠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조선이 일으켰고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은 조선이 당한 케이스지만, 둘 다 제국주의 열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선은 곧이어 두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운명이다.
셔먼 호가 화염에 휩싸인 지 한 달 뒤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 물론 목적은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이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함대답게 그들은 결코 서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침략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조선 관헌들로부터 음식까지 제공받으면서 한 달 동안 인근 섬들의 방어 태세와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0월 초 프랑스의 군함 일곱 척과 병력 1천 명이 본격적인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인데, 침략자들은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죽인 대가로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선언했으니 서학교도의 피로 한강물을 씻겠다는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정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까?
미리 원정지를 답사해둔 덕분에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 상륙해서 순식간에 섬 전체를 점령하고는 강화 해협을 건너 김포의 문수산성을 공략해 육지 진출의 교두보까지 확보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프랑스군의 기습 공격에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한다. 그러나 뒤이은 조선 정부의 조치는 이번에는 프랑스군을 당황하게 만든다. 정부의 특명을 받은 양헌수(梁憲洙, 1816 ~ 88)가 특공대를 이끌고 한밤중에 강화도로 건너가 정족산성을 점령한 것이다. 느닷없는 후방 공격에 크게 놀란 프랑스는 급히 군대를 돌려 정족산성을 공략했으나 조선 특공대가 워낙 결사적으로 방어한 탓에 성을 재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예상치 못한 조선의 변칙 전술과 악착같은 방어에 질린 프랑스군은 11월 초 함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정족산성을 공략한 전술은 과연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의도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오히려 조선군은 산성을 점령하지도, 방어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선이 정족산성의 탈환에 그토록 집착을 보인 이유는 바로 그곳에 역대 왕조실록들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마니산에 있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의 공격으로 불타 무너지자 정족산으로 옮겼다). 중화세계에서 역사서라면 국가 최고의 보물이자 비밀인데, 그걸 오랑캐에게 빼앗겼으니 조선 정부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짐작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진짜 의도가 사고를 탈환하기 위해서였다면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하기야, 애당초 강화도에 국가 보물을 보관한 이유도 역사적으로 적의 침략을 당할 때마다 정부가 강화도로 도망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 역사보다 중요한 역사서 강화도에 있던 정족산 사고(史庫)의 옛 모습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예상치 못한 조선의 후방 기습 전술에 프랑스군은깜짝 놀라 후퇴했지만, 아마도 그것은 이 사고를 적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동기가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정부는 역사서를 되찾았으나 결국 역사는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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