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간의 백일몽②
남의 나라에서 웬 유세냐 싶겠지만 실상 당시 청 나라는 조선을 ‘남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피를 나눈 혈맹으로 여긴다는 뜻일까? 물론 그건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고 청나라는 조선에게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통상조약을 강요했는데, 그 조약문에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정식으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의도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욕심이 점점 노골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수구로 돌아선 민씨 정권이 청의 그런 태도를 적극 환영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개화당은 당연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대당은 오로지 자파의 집권과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나라 전체를 중국에 넘기려 하고 있다. 나라와 당파가 모두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윽고 그동안 숨어 있던 개화당의 실질적인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개화의 이념과 이론에서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 소장파 개화론자들의 지도자이며 나이로도 그들의 형님뻘인 김옥균(金玉均, 1851 ~ 94)이다.
쇄국의 서슬이 시퍼렇던 1870년경부터 오경석과 박규수(朴珪壽)에게서 개화 사상을 배운 김옥균은 조선이 추구해야 할 개화의 모델은 청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적 성격이 강한 발전 전략을 택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장차 동양의 프랑스처럼 일면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균형을 갖춘 강국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분이나 문벌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해야 하며, 각종 제도와 산업을 근대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는 안동 김씨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중인 신분인 오경석을 스승으로 삼을정도였으니 신분제 철폐의 주장은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니다). 이렇듯 권력만 주어지면 언제든 정책화할 수 있는 탄탄한 이론을 갖추었기에 김옥균(金玉均)은 일찍부터 개화파의 보스로 인정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세 차례나 다녀오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성과를 시찰한 것은 물론 일본의 정객들과 두루 교류를 맺어둔 그였으니, 말하자면 공부는 다 마쳤고 시험만 기다리고 있는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시험'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시에만 일로매진해 왔는데 갑자기 고시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정책을 펴는 정권을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다. 물론 김옥균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쿠데타를 구상한 건 아니지만, 청나라가 간섭하지 않고 민씨 정권이 개화 노선을 정상적으로 유지했다면 그런 극단적인 수단까지 강구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 19세기의 방송국 지금 종로에 있는 우정국 건물이다. 1884년 10월 1일부터 업무가 개시되었으나 2개월 뒤 갑신정변의 무대가 되었다. 정보ㆍ통신의 허브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방송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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