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저항③
그러나 식민지화 일정이 가시화되자 의병 이외에 또다른 형태의 저항 방식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테러다. 어쩌면 일본과 친일파들은 의병보다 그것을 더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이념으로 삼고 유림에서 출발한 보수적 의병운동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위축되었으나,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저항 세력은 점차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런 항일운동가들 중에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이 있었다.
안중근은 열여섯 살 때 그리스도교에 입문해서 세례까지 받은 데다 유학의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황해도 출신이다. 그런 만큼 그는 전통적 이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진보와 보수를 논하기 전에 민족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고 개화와 척사를 따지기 전에 먼저 자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연해주로 넘어가서 그곳에 부대를 가지고 있던 이범윤(李範允, 1863 ~ ?)의 휘하로 들어가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1909년 봄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한 안중근은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앞으로 3년 이내에 암살하지 못하면 조선 국민에게 자결로 속죄하겠다고 맹세한다.
그 기회는 3년이 아니라 반 년 만에 왔다.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 세력을 처리하는 문제로 그 해 10월 26일 하얼빈에 온 이토는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한 뒤 군중 속에서 뛰쳐나온 안중근의 총탄을 세 발 맞고 죽는다. 젊은 시절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이었고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시킨 일본의 영웅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다가 조선 청년의 저격을 받고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과연 죽는 것도 다섯 가지 복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장면이다【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이 사건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는 점은 사건 직후 안중근이 직접 밝힌 거사 동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그는 개인적인 동기로 거사한 게 아니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라는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적을 쏘아죽인 것이므로 자신을 전쟁포로로서 취급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고 밝힌 것은 그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의 본질적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의병운동은 조선의 왕실과 옛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항일운동은 ‘왕국으로서의 조선’에 집착하지 않고 ‘주권국가로서의 조선’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 대 국가’의 관점을 취해야만 겉으로 테러처럼 보이는 사건도 ‘전쟁’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안중근은 죽을 때까지 당당한 태도와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논리는 그가 죽은 뒤 몇 개월 만에 근거를 잃게 된다. 전쟁이 가 능하려면 무엇보다 국가가 행위의 주체여야만 하는데, 1910년 8월에는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후에 일어난 독립투사들의 의거는 안중근의 경우처럼 ‘전쟁’이 되지 못하고 적어도 실정법상으로는 ‘테러’에 그치고 만다. 안중근으로서는 그런 꼴을 보지 않고 죽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 할까?
▲ 근정전에 나부끼는 일장기 근정전이라면 국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고 왕명을 반포하는 곳이다. 일본이 일장기를 근정전에 내걸었다는 것은 명백히 근정전의 상징성을 이용하려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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