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
「섬」이란 시를 지은 노창선 시인은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발견했습니다. 이 심연은 검은 바다와 같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의 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도 섬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섬이 된 것 역시 타자에 대한 그리움, 그리로 건너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지요. 타자를 만나서 섬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에게로 비약하려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검은 밤바다를 건너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라도 보내어 ‘가슴속 까만 가뭄’을 전하려고 하니까요.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어떨 때 행복한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편안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비둘기와 같은 것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지요.
비둘기는 장미꽃일 수도 있고, 책 한 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애써 적어본 사랑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타자가 그것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척 행복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생겼다는, 그래서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만약 상대가 나의 정성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뭐,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내가 준 것을 받을지, 혹은 받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상대방이 나의 정성을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를 전혀 모른 채, 무엇인가를 주었던 셈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선물(gift)이라고 부르지요. 우리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선물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라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선물의 논리를 가장 깊게, 그리고 그 한계에 이르기까지 사유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반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상당히 긴 유예 조건들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타인이 내게 동일한 것을 직접 되돌려주는 경우에 이 점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주어진 시간 1(Donner le temps 1)』
데리다【데리다는 전통 서양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그는 서양 형이상학이 ‘아버지’, ‘국가’, ‘진리’, ‘아름다움’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울타리를 쳐놓고 세계를 위계적으로 배열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보통 해체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통 형이상학을 해체한 후, 말년의 데리다는 새로운 윤리의 구성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했다. 주요 저서로 『글쓰기와 차이』, 『주어진 시간 1』 등이 있다】는 선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선물이 결코 교환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맞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보통 어떤 대가를 바라고 주는 물건이라면 그것을 선물이라고 부르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것은 뇌물이라고 말해야 되겠지요.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그것 역시 선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군요. 과연 여러분은 데리다가 말한 의미의 선물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사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선물을 건네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생일날이 되었을 때, 서로 만난 기념일이 찾아왔을 때, 입학할 때, 졸업할 때, 취업할 때, 승진할 때 등 너무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선물을 주곤 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가 발생한다면 어떨까요?
친한 친구의 생일날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30만 원을 전부 들여서, 아주 근사하고 고급스러운 정장을 한 벌 샀습니다. 친구가 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물을 할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생일날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선물을 건넵니다. “절대로 부담 갖지 마.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이제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내 생일날이 가까워졌습니다. 물론 그 친구도 내 생일날이 언제인지를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생일날 나를 찾아온 그 반가운 친구는 달랑 장미꽃 한 송이를 나에게 건넵니다. 그러고는 이 장미꽃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 순간 여러분이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던 30만 원 상당의 정장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만약 이전에 여러분이 주었던 선물을 전혀 떠올리지 않은 채 아주 행복하게 친구가 준 장미꽃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선물을 건네준 경험을 한 겁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전에 친구에게 주었던 선물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때의 정장과 지금 받은 장미꽃을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된다면, 슬프게도 여러분은 결코 선물이란 것을 건넨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0만 원을 들인 정장으로 여러분은 어떤 대가를 무의식적으로 바랐던 셈이고, 지금에 와서 비로소 그것이 의식화된 것이니까요. 선물에 대한 데리다의 논의가 결정적인 이유는, 선물과 관련된 우리의 허위의식을 그가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선물로 주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 뇌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비꼬고 있으니까요. 친구가 영화를 보여주면, 나중에 우리도 그에게 영화를 보여줍니다. 친구가 밥을 사면, 나중에 우리도 그에게 밥을 삽니다. “지난번에는 네가 돈을 냈으니, 오늘은 내가 낼게.” 그런데 만약 친구가 여러분에게 생일 선물로 10억 원쯤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경우 반지를 받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던 여러분이 지금은 왜 이런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그 친구의 생일날 그 정도로 비싼 선물을 건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의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은 뇌물, 즉 교환관계에 빠져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고독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타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랑해야만 비로소 참된 고독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해서 우리가 교환관계에 빠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타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그는 나와 삶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와 타자와의 관계란 마치 피조물과 절대적 신과의 관계와도 유사한 것입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고독 속에서 나는 두려움과 기대로 점철된 마음으로 나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보냅니다. 물론 그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상대의 선택이니까요. 만약 그가 나의 선물을 받아준다면, 그것은 내게 하나의 기적이자 축복으로 다가오는 사건이 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나의 선물을 받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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