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시작하며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농담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전혀 웃지 않더군요. 웃기는커녕 오히려 제 농담을 노트에 적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또 어느 때는 전혀 반대되는 일도 있었지요. 저는 진지하게 어떤 철학적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에 저는 심각하게 논의를 진행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당혹스런 경험들로부터 저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만남에는 작고 아름다운 것과의 행복한 만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헤어질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차오르는 듯한 그런 만남이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추하고 불쾌한 것과의 만남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별을 고대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만남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는 마십시오. 만남은 우리 자신의 힘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이 만남이란 사건에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나의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소중한 축복이 아닐까요?
철학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자 기록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철학은 지금 곰팡이 냄새가 메케한 어두침침한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습니다. 아니면 만남을 회피하며 영원을 꿈꾸는 몽상가의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지요.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왜 철학은 이렇게 초라해진 것일까요? 누가 철학과 삶을 갈라놓은 것일까요? 만남! 저는 이 책이 무엇보다도 만남에 대한, 그리고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철학과 삶이 만나는 오작교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삶과 철학 사이의 이별은 너무 길었고, 아쉬움 역시 너무 길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삶이 철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진부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철학과 삶이 견우와 직녀처럼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고, 그래서 철학은 삶과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철학과 삶은 이게 너무 멀어져서 사랑했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듯합니다. 이별의 시간이 너무 길면 그 둘 모두 외롭게 시들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과 삶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만 합니다. 아마 처음에 그들은 초례청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신랑과 각시처럼 서먹서먹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만남이 지속될 수록 그들은 이전의 사랑과 열정을 기억해낼 것입니다. 결국 말라붙은 마음을 적시며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게 될 겁니다. 물론 아쉽게도 철학과 삶의 만남은 저의 소망에만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만남의 책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이니까요. 이 책이 여러분과 만나지 않는다면, 제가 꿈꾼 철학과 삶의 만남은 저만의 몽상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 책은 또 다른 만남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의 만남입니다. 지금 이 책을 보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인가요? 시간이 나서 잠시 서점을 방문한 분인가요? 이전에 나온 저의 책을 읽어본 분인가요? 아니면 저의 소망처럼 철학과 삶의 만남을 기대하는 분인가요? 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낚시를 하는 어부처럼 저는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것이 바로 만남의 설렘이자 삶의 진실이기도 하구요. 저의 바람은 이 책과의 만남이 여러분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삶은 수많은 사건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책도 예외가 아니지요. 뜬눈으로 밤새우게 만들었던 많은 철학자들, 제 이야기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들어주었던 젊은 학생들, 제게 소중한 경험을 들려주었던 지혜로운 어른들, 그리고 명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했던 많은 사람과 사건들. 이 책은 바로 이런 수많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들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저뿐만 아니라 이 책도 이미 상당히 달라졌겠지요. 잊기 어려울 것 같은 만남 하나가 또 생각나는군요. 제가 이 책의 씨앗을 뿌렸다면, 그 씨앗을 예쁘게 길러낸 것은 이 책의 펴낸이로 기록되는 분입니다. 이 책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이학사 편집부의 애정과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무쪼록 이 책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행복한 만남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2006년 8월
강신주 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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