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
여러분은 철학이란 학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학문, 무엇인가 심오하기는 한 것 같지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학문, 삶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현학적인 학문, 배우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배울 필요는 없는 고급 교양……. 철학에 대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마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은 과거에 철학을 공부해보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혹은 앞으로 어떤 계기로 인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철학을 좀 제대로 배워보려고 시도하자마자, 여러분은 논리학(logic)이라는 학문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흔히들 철학이 모든 학문의 정수라면 논리학은 바로 철학의 정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논리학과 접하면서 여러분들은 철학이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논리학 시간에 여러분이 제일 처음 접하는 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삼단논법(syllogism)일 겁니다.
대전제: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전제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삼단논법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만약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문장이 참이고, 또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문장도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일부 성격이 특이한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논리학이란 정말로 대단한 학문이구나. 선생님, 삼단논법 이외에 다른 논리 규칙도 가르쳐주세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단논법을 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도대체 이런 논리 규칙이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철학을 공부하려면 꼭 이런 논리 규칙을 배워야 하는 거야?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는 걸 도대체 누가 몰라? 아니 심지어 개나 소 같은 짐승도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저 역시 여러분의 이런 의구심에 십분 동의합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단논법이 단순히 논리 규칙인 것만은 아닙니다. 삼단논법은 ‘철학이 무엇인지?’ 혹은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세 문장, 즉 대전제, 소전제 그리고 결론에 해당하는 각각의 문장은 어떤 순서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나요? 삼단논법의 순서대로 대전제가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소전제가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결론이 머릿속에 떠오르나요?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생각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이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머릿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어떤 구체적인 생각 하나를 떠올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익숙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봅시다. “내 생각에 소크라테스는 분명 죽을 거야.” 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내 주장에 동의해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생각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이 우리의 주장을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우리의 생각은 증명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나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이로부터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끝에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생각과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생각 등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상대방이 이 두 가지 전제를 참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상대방은 결국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나의 생각과 주장을 거부할 수 없게 되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에른스트 캅(Ernst Kapp, 1808~1896)【에른스트 캅은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유명한 철학자이다. 그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자본주의 발전으로 야기된 기술 문명의 폐해에 대해 최초로 진지하게 성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술 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가 농부나 목수로 일하면서 얻었던 통찰인 까닭에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데가 있다. 주요 저서로 『기술과학 철학의 기초』, 『전통적 논리학의 그리스적 기초』 등이 있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논증의 순서와 사유의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니까요.
질문자(questioner)의 마음속에서 삼단논법을 발견하려는 사유의 방향은, 전제와 결론이라는 순서와는 사실 대립되는 것이다. (……) 다시 말해 질문자는 자신의 사유를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결론으로부터 전제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전통적 논리학의 그리스적 기초(Greek Foundations of Traditional Logicy)』
캅의 주장에 따르면 삼단논법의 순서는 우리의 사유 순서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살인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만약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면,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사는 먼저 어디에서부터 수사를 시작할까요? 그는 아마 용의자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살인범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먼저 지목해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용의자 A가 발견됩니다. 이제 이 담당 형사의 수사 방향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A가 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그렇다면 그가 범인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이처럼 살인 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도 삼단논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주장을 먼저 내세우고 이어서 그 주장의 근거를 찾는다고 말할 수 있지요. 만약 특정한 사람을 용의자로 먼저 지목하지 않는다면, 그 형사는 어떻게 살인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용의자가 없어도 수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사람을 용의자로 가정한다면 아마 수사는 매우 오랫동안 더디게 진행될 것이고, 십중팔구는 영구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 삼단논법이란 것이 허구적이거나 완전히 관념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을 겁니다. 특히 삼단논법에서 중요한 것은 논증이 구성되는 순서, 즉 ‘대전제 → 소전제 → 결론’이라는 순서가 우리가 생각하는 순서와는 반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어떤 무엇인가를 주장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오직 그 경우에만 우리의 사유는 대전제와 소전제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사유는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완전히 멈추게 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전제를 내놓았습니다. 이때 상대방이 이새로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사유는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대방이 이 전제마저 계속 의심한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요? 다시 말해 상대방은 우리가 하나의 근거로 제시한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주장마저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그를 설득하기 위한 또 다른 전제를 생각해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주장을 의심하는 상대방을 설득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이성의 의미와 한계
어떻습니까? 삼단논법에도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철학적 사유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어떤 것에 대해 의미 있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만약 이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는 것이니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삼단논법을 최초로 체계화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바로 이런 문제점에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이제 주어진 문제에 응답하기 위한 삼단논법이 적합하게 제공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찾을 것인지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적합한 출발점(전제)을 파악할 것인지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는 삼단논법의 구조에 대해 고찰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구축하는 능력까지 반드시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석론 전서(Analytica Priora)』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 체계화한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합한 전제를 파악할 수 있느냐’가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적합한 전제를 파악해서 삼단논법을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요구하는 ‘이성’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합한 전제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성’이란 말은 영어 ‘reason’을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한사전을 넘겨보면 이 단어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방금 살펴본 것처럼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유’나 ‘근거’라는 뜻입니다. 이점에서 ‘이성’이란 말은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주장에 대해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와 같은 근거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성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 즉 근거를 찾고 제시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 여러분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화 상대방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의 주장을 듣자마자 그것을 즉각 수용한다면, 나는 근거를 찾아서 제시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요. 결국 나로부터 이성의 능력을 강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대화 상대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장을 듣는 상대방이 최종적으로 내가 제시한 주장이나 전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나의 이성 능력이 제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과 관련해 우리는 레셔(N. Rescher, 1928~)【레셔는 독일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철학자이다. 철학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있어서나 현대 과학철학의 쟁점들에 대한 식견에 있어서 그를 따라갈 수는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특히 철학사와 인식론에 대한 그의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주요 저서로 『변증법』, 『이성을 만족시키기』 등이 있다】의 논의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성 능력이란 것이 결국 특정한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승복시키기에 충분한 논증이라든가 충분한 이유라는 개념은, 논쟁 과정에서 타인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든 합리적인 탐구에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든, 어느 경우에나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나 근거라는 개념은 비개인적이며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적 언어는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에게 특유한 교리로서의 추리 기준, 즉 사적 논리는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구 자체는 형용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근본적 물음은 "X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자신에게 어떻게 납득시킬까”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납득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주장을 수용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를 부여하는 혹은 그런 이유를 탐색하는 작업은, 공적인 논쟁 과정이나 개인적인 탐구 과정에서 모두 똑같아야만 한다.
『변증법(Dialectics)』
레셔는 우선 타인을 설득하는 메커니즘이나 자신을 설득하는 메커니즘이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이유’나 ‘근거’를 찾는 이성의 동일한 작업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내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나는 이것을 상대방에게 주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 자신에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이 주장을 내세웠는데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다른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만 합니다. 한편 나 자신에게 그것을 주장했는데 스스로도 전혀 납득할 수 없다면,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찾아야만 합니다. 이 점에서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 타인을 설득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라는 레셔의 생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사실 어찌 보면 이것은 당연한 지적일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내가 찾고 있는 합리적인 근거는, 우선적으로는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전제를 상대방에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근거를 우리가 어떻게 상대방에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레셔의 지적은 일단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는 사실 심각한 문제점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레셔가 타인과의 논쟁이나 자신만의 합리적 탐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납득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바로 ‘우리’라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능력은 이제 ‘우리’라는 공동체의 동의를 구하는 능력을 뜻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에서는 나의 주장을 듣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분명 타인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 우리가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전제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논쟁 상대방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레셔의 지적처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납득할 수 있을까’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합리적 탐구는 예외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것마저도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면, 이제 논리적 이성 능력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논리가 되지 않을까요?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
특정 공동체에 속한 어떤 사람과 논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규칙에 따라 주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방을 전혀 설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나 근거를 제시한다면, 일체의 대화나 논쟁이란 것이 모두 무의미해질 겁니다. 따라서 모든 논쟁에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은 ‘우리’라는 맥락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레셔의 주장을 음미해볼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홀로 사유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라는 것, 즉 특정한 공동체를 매번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진정 그렇다면, 공동체가 수용하기 힘든 새로운 주장, 즉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란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겁니다. 만약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새로운 생각을 전혀 수용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그 새로운 발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로운 사유는 특정한 공동체의 통념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더 보편적인 판단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레셔의 생각,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편협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생각에는 새로운 사유의 출현을 근본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정당화의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논쟁할 때 그들을 이기고, 설득하는 기술이라고 봅니까? 아니면 주어진 현실을 매번 긍정하도록 만드는 정당화의 기술이라고 봅니까? 아마 여러분은 이런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한 통념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니체(F. W. Nietzsche, 1844~1900)【니체는 20세기 사상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던 중요한 철학자이다. 그는 초기 그리스철학, 쇼펜하우어, 바그너 등의 영향 속에서 칸트 이후 가장 강력한 비판철학자로 탄생한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철저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니체는 이성과 도덕이라는 서양 학문의 양대 축을 계보학적 방법론으로 해체하려고 하였다. 주요 저시로 『반시대적 고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지편』, 『도덕의 계보학』에 대해』 등이 있다】가 말했던 것처럼 ‘반시대적인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도록 합시다.
참된 철학자는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사유와 생활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며, 따라서 이 말의 가장 깊은 의미로서 이해된 ‘반시대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가르쳐줄 수 있는 자이다.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
철학은 ‘보편성(universality)’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때 철학의 보편성이란, 자신이 속한 특정 공동체에서 현재 통용된다는 의미의 ‘일반성(generality)’이라는 개념과는 구별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예전 조선 시대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삼종지도는 글자 그대로 ‘세 가지를 따르는 법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선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야만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을 따라야만 하며, 마지막으로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말을 따라야만 했습니다[婦人有三從之義, 無專用之道. 故未嫁從父, 旣嫁從夫, 夫死從子. 『의례(儀禮)』 「상복전(喪服傳)」]. 한마디로 여성은 남성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조선 시대의 삼종지도를 과연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특수한 시대의 공동체가 믿었던 통념, 즉 그 시대의 구성원들에게 익숙했던 ‘일반적’인 통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까? 아직도 일부 극소수 사람들이 여성의 삼종지도를 마치 보편적인 진리인 양 믿고 있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삼종지도가 조선 시대라는 특정한 공간에서만 통용될 수 있었던 ‘일반적’ 규칙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이미 우리는 조선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가령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에 갔다고 해봅시다. 이때 여러분은 지금처럼 삼종지도는 전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주장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목숨을 내놓는 결단이 필요할 겁니다. 만약 그런데도 여러분이 삼종지도를 거부하는 이런 위험한 주장을 내놓는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조선 시대라는 일반성을 벗어난 경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건너간 여러분이 삼종지도를 비판했을 때, 그 주장에 동조하는 어떤 조선 시대 사람을 만났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이야 이미 조선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삼종지도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간파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그는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도 삼종지도를 거부하면서 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일 겁니다. 니체의 표현대로 그는 ‘사유와 생활에서 단순하고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유와 생활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것이겠습니까? 그의 모든 것이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규칙과는 전혀 부합될 수 없는 것일 테니까요.
흥미로운 것은 철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철학이 아니고, 철학자라고 해서 다 같은 철학자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반성만을 추구하는 철학도 있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도 있습니다. 앞서 들었던 예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거짓된 철학자는 공동체의 일반성을 받아들여서 삼종지도를 정당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 참된 철학자는 삼종지도가 여성의 삶을 왜곡시킨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이라는 점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제공하겠지요. 그런데 사실 현 시점에서 어떤 철학이 일반성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보편성을 추구하는지 명확히 구별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일반성을 추구하는 철학도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여러분이 철학 책을 살펴볼 때 항상 경계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이 책을 지은 철학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넘어서서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시대에 안주하면서 사람들이 추종하는 일반성만을 지향하는가?”
철학은 ‘우리’라는 특정한 공동체에서는 수용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철학은 진정한 철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참된 철학자’를 ‘반시대적’ 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반시대적인 철학은 새롭습니다. 반시대적인 철학이 새로운 이유는, 그것이 기존 공동체의 일반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올 법한 오해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유라고 말하면 보통 기발한 사유 혹은 엉뚱한 사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유는 보통 성숙하지 못한 사유, 즉 젊은이들이 한때의 열정으로 생각해낸 것에 불과한 사유라고 폄하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철학이 지향하는 새로움은 한때의 일회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이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시대적인 철학은 현실과 무관한 공상과 같은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무엇보다도 현실에 더 밀접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이란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의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자신의 주장이나 근거를 제시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레셔라면 그 ‘누구’를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 즉 ‘우리’라는 이름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보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 철학이란, 공동체의 삶의 규칙, 즉 일반성의 원리를 수용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 될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어진 삶의 규칙에 입각해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고 설득하는 논쟁의 기술 정도를 철학이라고 부르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성을 ‘공동체가 인정할 만한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는 능력’이라고 너무 좁게 정의 내린 것은 아닐까요? 바로 이런 문제점을 숙고하다보면, 우리는 니체라는 천재적인 인물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협소한 이성 개념을 근본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참된 철학자의 주장과 근거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협소한 세계의 거주민들을 넘어서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더 넓은 세계의 시민들을 향해 제시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들뢰즈 역시 이 점에서 니체의 충실한 후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참된 철학자’가 되어 참된 철학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들뢰즈를 통해서 우리는 철학에 대한 니체의 통찰력을 보다 더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니체를 따라 우리는 반시대성을 시간과 영원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으로 발견하게 된다. 즉 철학은 역사의 철학도 영원성의 철학도 아니다. 철학은 반시대적이며,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다. 새뮤엘 버틀러를 따라 우리는 에레혼(Erewhon)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원초적인 ‘부재의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치를 바꾸고 위장하며 양상을 달리하고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지금-여기(now-here)’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지성인이라서 그런지 들뢰즈는 풍부한 교양, 그리고 강렬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를 공부하려는 전문 철학자들이 지적인 자괴감을 겪거나 아니면 치명적인 오독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방금 읽은 구절을 꼼꼼하게 분석하기에 앞서, 여러분에게 하나의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명료화해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정도로 비만한 여성이 있다고 해봅시다. 지금 그녀는 건강하고 날씬한 몸매를 꿈꾸며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비만함이 현재라면, 날씬함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날씬해지려는 그녀의 노력을 비웃습니다. 그녀의 엄청난 비만함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자, 그럼 이제 문제의 상황에 좀 더 접근해봅시다. 들뢰즈는 ‘반시대성’이 ‘시간’과 ‘영원’보다 더 심오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시대성’이 ‘시간’보다 심오한 이유를 먼저 설명하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앞에서 살펴보았던 비만한 여성의 삶과 비교해봅시다. ‘시간’이란 특정한 시기, 즉 이 경우는 ‘그녀가 비만했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니체의 반시대성이란, 그녀의 비만함이 단지 특정한 시간에만 가능했던 제한적인 것임을 폭로하고, 그녀가 날씬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녀는 ‘날씬함’을 지향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자신이 비만했던 ‘시간’을 이제 과거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비만함을 당당하게 거부함으로써 비만했던 때를 지나간 ‘과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들뢰즈는 ‘반시대성’이 ‘시간’보다 더 심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시대성으로 인해 오히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들뢰즈가 왜 ‘반시대성’이 ‘영원’보다 심오하다고 말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반시대성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시간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만한 여성이 결국 날씬해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사례에 비유해본다면, ‘영원’이란 것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녀의 비만함이 변화 없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날씬함이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보는 믿음입니다. 후자는 비록 그녀가 지금은 비만하지만, 그녀의 본성은 사실 날씬함이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현재 그녀의 비만함은 일시적인 것이거나 우연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만함을 영원으로 보는 것, 혹은 날씬함을 영원으로 보는 것 등은 모두 반시대성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비만해진 몸을 날씬하게 만들려는 그녀의 노력이 아닐까요? 이런 노력은 그녀가 반시대적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녀는 비만함을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반시대적인 철학은 끝없는 운동과 생성을 긍정하는 철학입니다. 생성이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나 생성된 뒤의 상태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와 생성된 뒤의 상태를 영원한 것이라고 본다면, 철학은 운동을 멈추고 하나의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이 대두되는 순간 반시대성은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겠지요. 들뢰즈는 반시대성이라는 니체의 심오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공을 들입니다. ‘반시대성’ 이란 개념은 철학의 힘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참된 철학과 거짓된 철학을 구별하는 진정한 잣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에레혼(Erewhon)』이라는 풍자소설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새뮤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레혼Erewhon 이란 단어는 버틀러가 만든 조어입니다. 이 단어를 거꾸로 표기하면 ‘노웨어(nowhere)’, 즉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들뢰즈가 버틀러의 에레혼이란 개념을 좋아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철학은 ‘nowhere’라는 글자가 함축하는 복잡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도 어디선가 들어보았겠지만, ‘nowhere’라는 표현은 ‘no-where’이지만 동시에 ‘now-here’이기도 합니다. ‘no-where’라는 것은 반시대적 철학이 아직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now-here’라는 것은 반시대적 철학이 ‘지금 바로 이곳’을 문제 삼고 넘어서려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버틀러의 에레혼 개념 때문에 우리는 들뢰즈의 난해한 지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철학은 항상 반시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철학이 ‘now-here’와 ‘no-where’라는 두 측면을 항상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철학의 비판적 힘을, 후자는 철학의 상상력의 힘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판은 우리 현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그리고 그 정당화의 방식이 옳은지의 여부를 숙고하는 작용입니다. 반면 상상력은 그것을 통해 다른 현실, 다른 ‘now-here’를 꿈꾸는 것입니다. 앞서 들었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볼까요? 비판이란 비만한 사람이 왜 비만해졌는지를 진단하는 것을 가리키고, 상상력이란 그 사람이 비만한 상태를 넘어섰을 때의 모습을 꿈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상상력과 비판의 두 측면은 반시대적 철학의 두 얼굴입니다. 그래서 이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철학은 ‘지금-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은 없는 세계를 꿈꾸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여기’를 문제 삼기보다 여러모로 정당화하기에만 급급한 제도권의 철학, 혹은 ‘지금-여기’를 전혀 숙고하지 않고 ‘아직은 없는’ 세계만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철학, 이 모두가 거짓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같은 매우 날카로운 능선을 걸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오른쪽에는 ‘시간’이라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고, 왼쪽에는 ‘영원’이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능선을 걷다보면, 여러분은 자신만의 철학, 그 정상부에 오를 수 있게 될 겁니다. 마치 우리가 험준한 길을 걸어 설악산의 정상, 대청봉에 오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각자 홀로 오를 수밖에 없는 철학적 정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어떤 처녀봉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철학자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의 능선을 지혜롭게 올라타서 자신만의 정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철학사란 일종의 처녀봉 등정 기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이제 여러분은 철학이란 학문을 접하면서 어떤 특이한 측면 하나를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철학이란 학문이 다른 학문과는 달리 바로 고유명(proper name)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Platon, BC 428~348)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철학, 스피노자(Spinoza, 1633~1677)의 철학, 헤겔(Hegel, 1770~1831)의 철학, 니체의 철학, 알튀세르(L, Althusser, 1918~1990)의 철학 등등. 이 때문에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로 설명하거나, 데카르트를 스피노자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작업입니다. 이런 시도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반복하거나 스피노자 철학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자를 고유명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철학 책을 읽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점에서 철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문학자의 걸작을 읽을 때와 같은 인문학적 경험,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철학 책은 매우 어렵습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철학 책을 읽는 경험은 우리에게 이런 고달픔만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올랐던 봉우리에 여러분이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확 트인 전망! 시원한 바람!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내려다보기에 충분한 높이! 오직 고되게 정상에 오른 자만이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가 지은 책 중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ctiqu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제일 앞부분에는 말라무드(B. Malamud, 1914~1986)라는 작가가 지은 소설, 『수리공(The Fixe)』에서 빌려온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보입니다.
나는 그의 책을 인근 도시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구입했습니다. 값으로 1코펙을 지불했는데, 벌기 힘든 돈을 그렇게 책 사는 데 낭비했다고 금방 후회했습니다.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을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의 빗자루를 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수리공』
스피노자【스피노자는 유대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채, 죽을 때까지 안경알을 갈고 닦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치밀하고 파괴적인 자연주의 철학을 구성한다. 그의 철학은 의식의 독립성, 선의 절대성, 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베르그손이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철학과 동시에 스피노자의 철학을 가진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주요 저서로 『윤리학』, 『신학 - 정치학 논고』 등이 있다】를 읽은 소설 속의 이 인물은 강렬한 쾌감과 전율을 느낍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이전과는 결코 동일한 인간일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강렬한 돌풍의 이미지, 요술쟁이의 빗자루를 탄 것과 같은 고도감은, 산 정상에 오른 순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희열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피노자라는 거대한 봉우리, 압도적인 전망과 싸늘한 돌풍을 제공하는 높은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 잠시 머물며 봉우리 아래 펼쳐진 전경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요술쟁이의 빗자루에서 내려야 하듯이, 그도 스피노자라는 봉우리에서 곧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봉우리는 스피노자의 것이지, 그 자신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도, 산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아주 보잘것없을 정도로 작게 조망할 수 있는 고도감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사는 곳과 우리가 살 수 없는 곳 사이의 차이를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철학은 ‘now-here’와 ‘no-where’의 사이에 있으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no-where’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now-here’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 혹은 낯섦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주는 조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올랐던 봉우리에 직접 올라가보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준 조망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삶과 사유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한 철학자도 분명 있습니다. 이 철학자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그를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보았던 것을 직접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만약 그의 조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서둘러 내려오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 여러분 앞의 선배 철학자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자주 올라가고 싶은 봉우리 같은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전망을 가진 철학자들도 있겠지요.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와 여러분이 좋아하는 철학자가 서로 일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저의 삶과 여러분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자들이 올랐던 정상을, 그들의 안내에 따라 직접 올라가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다리는 튼튼해지고, 우리의 균형 감각도 단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훈련도 결국 여러분만의 산봉우리를 찾기 위한 연습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입니다.
더 읽을 책들
버트런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지금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철학 개론서입니다. 러셀 특유의 간명하고 분명한 문체가 장점인 이 책은 좁게는 현대 영미 철학 개론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넓게는 철학하기가 무엇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투겐트하트·우슬라 볼프, 『논리-의미론적 예비학』(하병학 옮김, 서울: 철학과현실사, 1999)
논리학은 단순히 형식적인 추론 규칙을 탐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 지평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나아가 이 책은 ‘논리 의미론’이란 지평에서 서양철학의 논리학적 전통을 요령 있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 서울: 민음사, 1998)
많은 사람이 니체를 읽지 않고서는 들뢰즈를 이해할 수 없다고들 말합니다. 들뢰즈 본인이 니체를 통해 철학하기가 무엇인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니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연구서이면서, 동시에 들뢰즈의 사유 방법에 대한 가장 훌륭한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동일성과 차이』 (신상희 옮김, 서울: 민음사, 2002)
하이데거 말년의 사유를 대표하는 네 편의 논문을 모아서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논문 모두가 중요한 것이지만, 「철학-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논문은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반드시 읽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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