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 이래로 서양에서는 인간을 보통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생각하는 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관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공룡능선을 타고 대청봉에 오를까, 아니면 서북주릉을 타고 대청봉에 오를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일까?’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왜 그 사람은 오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등등.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인간이 분명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과연 인간은 항상 생각하는 존재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항상’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혹시 여러분 중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화장실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제 일어나야 한다. 밤사이에 내 방광은 소변으로 가득 찼다. 지금 소변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일어나서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고 방을 나가자. 그리고 아홉 걸음 정도 가서 화장실의 불을 켜자. 그리고 변기 뚜껑을 열고 앉는 거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단지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소변을 보아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될 뿐입니다. 또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방문 손잡이를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에 가서 전등불을 켭니다. 그리고 역시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변기 뚜껑을 열고 그곳에 앉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침에 화장실에 갈 때 발생하는 모든 일입니다. 도대체 이 어느 부분에 우리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습니까?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이란 것을 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방문 손잡이를 아무 생각없이 돌렸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어! 왜 문이 안 열리지? 고장이 났나?’ 또 화장실에 가서 전등불을 켜려고 하는데, 스위치를 아무리 올려도 불이 켜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경우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어! 불이 안 켜지네. 전기가 나갔나, 아니면 형광등이 고장 났나?’ 또 화장실 변기 뚜껑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변기 뚜껑이 망가져 떨어져 나오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당혹감에 젖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뭐야? 물건을 뭐 이따위로 만들었어!!’
여기서 우리는 얼핏 생각이란 것의 비밀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하이데거는 의식의 지향성을 탐구했던 후설의 제자이자 동시에 후설을 넘어서려고 했던 현대 독일의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친숙한 관계가 와해될 때에만 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일차적이기보다는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저서로 존재와 시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이 있다】라는 현대철학자의 이름을 들어보았습니까? 이 사람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란 유명한 철학 책을 썼던 독일의 철학자입니다. 이 책을 보면 하이데거도 인간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은 과연 언제 사유하게 되는 가를 숙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손 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 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 안에 있기는 하다. [……]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제가 보기에 하이데거에게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어휘가 아마 ‘배려함(Besorgen)’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어려운 용어가 아닙니다. ‘배려함’이란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용어는 ‘눈에 띔(Auffallen)’이라는 말과 대조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배려함’ 그리고 ‘눈에 띔’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첫째, 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나아가 문을 연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문을 열게 되는 일상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배려함’의 사례입니다. 반면 둘째로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아 문에 대해서 그리고 문을 열려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에 띔’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배려함’의 경우를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로, 반면 ‘눈에 띔’의 경우를 ‘손 안에 있지 않음(Unzuhandeness)’
으로 설명합니다. ‘손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이 나와 너무 친숙해서 그 문을 열려고 할 때 어떤 생각도 필요하지 않은 사태를 의미합니다. 반대로 ‘손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친숙하게 열리던 문이 열리지 않아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사태를 의미합니다. 하이데거는 오직 ‘손 안에 있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 즉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만 우리의 생각,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에 띔’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어! 어제까지 열렸던 문이 왜 지금은 열리지 않는 거지?" 이제 우리에게 친숙함이 사라지고 낯섦이 찾아옵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항상 예상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혼한 지 20년이 된 너무나 친숙한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부부는 ‘손 안에 있는’ 관계, 즉 너무나 친숙해서 전혀 생각이 발생하지 않는 습관적인 관계에 빠져 있습니다. 서로의 안색만 보아도 두 사람은 상대방의 욕구, 불만족 등을 생각하지 않고도 알게 됩니다. 남편이 아침 밥상에서 반찬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면, 아내는 금방 오늘 야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또 역으로 아내가 저녁상에 와인을 올려놓고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면, 남편은 아내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긴장감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진정 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만약 어느 날 남편이 귀가했을 때 아내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보다 아내의 귀가가 늦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때 남편은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어! 이 사람이 어디 간 거지? 조금 있다가 들어오겠지.’
그러나 이제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남편은 점점 초조해지고, 그의 생각도 더 강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고라도 난 건가? 혹시 처갓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늦으면 전화라도 해주지.’
마침내 자정을 한참 지나서야 아내가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내는 아주 고급스럽고 우아한, 그리고 조금은 섹시하기까지 한 옷을 입고 유유히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얼굴의 홍조로 보아 어디서 술까지 마시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그리고 도대체 누구를 만났는지 한마디도 내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화장실로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합니다. 그리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며, 당황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 싱긋 웃고는 혼자 침실로 들어가 눕습니다.
이제 남편의 생각은 질투에 사로잡혀 매우 강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들어온 거야. 저렇게 행복한 표정은 처음 보는군. 혹시 다른 놈하고 눈 맞은 거 아냐? 아까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은 도대체 뭐지? 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건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은 아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전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녀의 눈빛, 그녀의 옷, 그녀의 머리카락, 그녀의 홍조 띤 얼굴, 그녀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들뢰즈(G. Deleuze(1925 ~1995)【들뢰즈는 강단 철학에서 박제가 된 철학적 사유를 소생시킨 현대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목적은 주어진 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시대를 극복하는데 있다. 주요 저서로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천개의 고원』 등이 있다】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알고 있나요? 이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변화에 당혹감과 질투를 느끼는 남편을 철학적으로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철학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죠.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우리에게 진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기도 하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다. 진실은 친화성이나 선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 (……)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들뢰즈도 우리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 즉 ‘마주침(encounter)’으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비자발적이다’라는 말은 낯선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0년 만에 남편보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너무 친숙해서 있는 듯 없는 듯 느껴졌던 어제까지의 아내와는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들뢰즈는 그것을 ‘기호(sign)’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내의 홍조 띤 얼굴, 콧노래, 눈빛 등 이 모든 것이 바로 기호에 해당하겠죠. 남편의 생각은 바로 이 기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기호의 의미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남편은 아마 밤새도록 아니면 영원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것입니다.
들뢰즈의 분석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주침’이란 요소가 아닐까요? 만약 아내가 늦게 들어온 날, 남편이 야근을 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남편은 술까지 마시고 늦게 들어온 아내와 마주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녀가 ‘누설하는’, 즉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기호’도 결국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이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사건의 발생, 그 사건과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그 사건의 기호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규정이 이제 더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그 생각이 진정한 생각이라면 항상 위와 같은 과정을 겪기 마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제 그 생각의 발생을 음미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건과 마주쳤습니까? 그리고 어떤 기호를 포착했나요? 그리고 이제 그 기호를 어떻게 해석하나요?
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사건’, ‘마주침’ 그리고 ‘기호’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낯선 것입니다. 이런 낯섦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이런 낯섦의 의미를 찾는 것을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가 ‘기호의 해석’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기호를 해석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홍조 띤 얼굴, 화장실에서의 콧노래, 남편에게 보내는 미소 등의 기호는 남편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이 이런 기호를 해석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어쩔 수 없는 의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각’이란 것은 낯섦과 불편함을 친숙함과 편안함으로 바꾸려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 즉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아마도 ‘죽음’이란 사건일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란 테마를 놓고, 낯섦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심화시켜보도록 하죠.
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어떤 생명체의 생물학적인 기능이 정지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지평에서 죽음은 그렇게 중성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죠. 이 경우 우리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도 이제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게 되었어”라고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내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나서 이제 나의 생물학적 기능은 정지될 거야”라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스쳐 지나가는 무덤덤한 죽음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 해상에서 유람선이 좌초하여 수백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그런 것입니다. 안됐다고 연민을 갖지만, 우리는 돌아서는 그 순간 그들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아니고,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갖는 느낌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가 되는 죽음이 우리에게 진정 낯선 것인가 아니면 친숙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죽음은 크게 세 종류로 우리에게 경험됩니다. 첫째는 ‘1인칭적 죽음’으로서,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2인칭적 죽음’으로서, 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3인칭적 죽음’으로서, 익명적인 그들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집니까? 즉 어느 죽음이 가장 여러분에게 고통을 줍니까?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뉴스에서 접하는 죽음은 우리에게 별로 큰 고통을 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뉴스를 보고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대부분 “아! 많이 죽었구나. 안됐구나”라고 반응할 뿐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3인칭적 죽음’, 즉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죽음이죠.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개만 남은 셈이군요.
1인칭적 죽음 | 나의 죽음 |
2인칭적 죽음 | 너의 죽음 |
3인칭적 죽음 | 익명적인 그들의 죽음 |
‘1인칭적 죽음’과 ‘2인칭적 죽음’ 중 어느 죽음이 우리를 더 고통에 빠뜨릴까요? 서양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에피쿠로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그리스가 멸망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현실의 무질서와 허무를 경험하면서 그는 진리, 자연,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그는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BC 306년에 그가 아테네 북서쪽에 정원을 구입하여 자신의 학파이자 생활공동체였던 에피쿠로스학파를 창설하였던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다】는 ‘나의 죽음’, 즉 ‘1인칭적 죽음’은 우리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놀라운 주장을 폅니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 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헛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enoeceus)」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는 백번 옳은 말입니다. 내가 죽어서 생물학적 기능이 정지된다면, 나는 내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를 때리고 불에 태워도 시체는 아파하거나 뜨거워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아파하거나 뜨거워한다면, 그 시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해야겠죠. 그래서 예전 야만적인 시대에는 사형수를 죽일 때도 바로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죽이면 고통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도 이 때문에 화형이라는 처형 제도를 고안하게 된 것입니다. 화형 제도는 사형수에게 아주 느리게 살이 타는 고통을 안겨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는 처형 제도를 들어보았지요? 이것은 사형수의 사지, 즉 두 팔과 두 다리를 소나 말에 묶어서 서서히 찢고 난 후 나중에 목을 치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여기서 능지(陵遲)라는 말은 ‘언덕이 천천히 깎여서 평탄해진다’는 뜻이니까, 결국 쉽게 죽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척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는 매우 훌륭했지만, 그가 아직 몰랐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1인칭적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2인칭적 죽음’이 남아 있으니까요. ‘2인칭적 죽음’이란 우리가 ‘당신’이나 ‘너’ 혹은 ‘자기’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3인칭적 죽음’과는 달리 ‘2인칭적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한 고통과 슬픔을 안겨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친숙함이 사라지고 낯섦이 도래하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고 때로 기절을 하기도 합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심지어 기절을 하기도 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생각해보아도, 이 고통스런 사건의 의미를 정당하게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남들은 모두 무사한데 너만 죽어야 해?’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거라면,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사랑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죽음의 의미를 찾다가 과열되어 지쳐버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기절이라는 무감각한 상태,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태, 넋이 빠진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게 되는 가장 낯선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과 마주치면 우리는 고인의 삶 전체가 하나의 불가사의한 ‘기호’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강가에 같이 앉아 나의 머리를 어루만졌던 것’, ‘내게 보르헤스(J. L. Borges, 1899~1986)의 소설을 건네주었던 것’, ‘나의 키스를 거부했던 것’, ‘아무 말 없이 내 앞에서 울었던 것’, ‘보라색 옷을 자주 입었던 것’, 이런 모든 기호가 이제 고인의 삶과 더불어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제 고인이 된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가에 앉으면, 그냥 무심결에 지나쳤던 모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려는 듯 새록새록 뇌리를 스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이런 생각은 너무나 때늦게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이라는 완전히 낯선 사건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말입니다.
교환 가능한 것과 교환 불가능한 것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왜 ‘2인칭적 죽음’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는데 ‘3인칭적 죽음’은 그냥 스쳐가는 것, 우리에게 별다른 생각을 강요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것일까요? 왜 아내의 밤늦은 귀가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나의 뇌리를 지배하는데, 옆집 아주머니의 행실은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요? 다시 질문해본다면, 왜 어떤 경우에 나는 사건의 의미를 찾는 사람, 즉 기호의 해석자가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단순히 무관심한 방관자가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타자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차이를 음미해보기 위해 잠시 키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키르케고르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개신교 교육을 받았다. 청년 시절 사랑하던 레니나 올센과의 파혼 경험은 개신교와 더불어 그의 사상의 방향을 결정짓는 큰 사건이 된다. 그는 헤겔의 보편적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인간 실존의 단독성을 강조했다. 주요 저서로 『두려움과 떨림』, 『반복』,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이 있다】의 『두려움과 떨림(Furcht und Zittern)」을 넘겨보도록 하죠.
아브라함이 행한 일에 대한 윤리적 표현은 그가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 되고, 또한 그 행위에 대한 종교적 표현은 그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런 모순 가운데 바로 어떤 사람의 잠을 빼앗아버릴 수 있는 불안이 놓여 있다. 만약 이런 불안이 없다면 아브라함은 현재 있는 그 자신은 아닐 것이다.
『두려움과 떨림』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대부분 들어보았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자신을 믿고 따르던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갈등과 고뇌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의 아들 이삭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으로 볼 때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선행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의 모순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불안, 즉 그의 고뇌와 결단을 읽어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고뇌 없이 아들을 제물로 바쳤다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죄악이라고 생각해서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이 경우에도 역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일 수 없을 겁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 딜레마 속에 자신을 내던졌으며 자신의 불안을 기꺼이 껴안았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명령대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할 때가 바로 내일로 다가오자, 아브라함의 불안과 고뇌는 극도로 증폭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늦은 밤 이삭이 곤히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삭의 손을 쓰다듬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아브라함의 고뇌를 위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해봅시다. “뭐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도 젊으니까 아들 하나를 더 낳으면 되지요.” 그러나 이런 위로가 아브라함의 고뇌에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이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아들이 바로 지금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이삭일 수는 없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삭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을 위로한 사람은 이삭을 다른 아들로 교환 가능한 존재로 보고 있다면, 아브라함 본인은 이삭을 다른 어떤 아들로도 교환 불가능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두 가지 태도가 발생하고 구별되는 것일까요? 철학적으로 명료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특수성(particularity)【특수성이란 개념과 짝이 되는 것은 일반성이란 개념이다. 예를 들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상품들, 즉 바나나, 사과, 옷, 모자 등은 특수성에 비유될 수 있고, 이런 특수한 것들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는 일반성에 비유될 수 있다】’과 ‘단독성(singularity)’이란 것입니다. 어떤 책 한 권이 눈앞에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인쇄소에서 찍은 많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이 책을 보다가 인쇄가 정확히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당장 책을 구입한 서점에 가서 ‘동일하지만 다른’ 책과 바꿀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특수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특수한(particular)’이라는 표현은 바로 ‘동일하지만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첫 선물로 받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책의 첫 번째 면에는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절대적으로 다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책을 보다가 앞서와 마찬가지로 책이 파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할까요? 아마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바로 이 책을 ‘단독적(singular)’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이런 단독적인 존재였습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고뇌와 불안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아브라함을 위로하던 그 남자에게 이삭이란 존재는 하나의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 하나를 더 낳으면 되지요.” 그는 이삭을 아브라함이 낳을 수 있는 여러 아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따라서 그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고뇌와 불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데도 바로 이 두 가지 태도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타인을 단독적인 존재로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특수한 대상으로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와 단독적인 사랑을 맺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과 헤어져서는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다른 어떤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군가와 특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 사람과 헤어지더라도 곧 다른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제하는 ‘사건’이나 ‘기호’가 어디서부터 유래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독적인 사람,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분출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생각이 마치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와도 같은 상태에서 출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통해 그가 드러내려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것을 단독적인 것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호’를 감지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3인칭적 죽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유를 발생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2인칭적 죽음’, 즉 ‘사랑하던 너의 죽음’은 우리를 매우 극심한 고통에 빠뜨리고 긴 생각에 잠기도록 만듭니다. 여기서 ‘너’라는 존재는 단순히 여러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바로 절대적인 단 한 사람, 즉 ‘특수한 너’가 아닌 ‘단독적인 너’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건과 무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생각이 발생하는 조건을 음미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의 비밀에 어느 정도 접근하게 된 것 같습니다. 생각의 비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은 우리가 낯선 사건‘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비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발생하는 조건을 음미하고자 할 때 우리는 최종적으로 ‘사건’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장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사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리를 갖도록 할 것입니다.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 예를 다시 하나 들어봅시다. 그에게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첫 월급을 타서 사랑하는 그녀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조금 늦게 오는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그에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한두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그가 있는 카페에 들어옵니다. 그는 늦게 온 것에 대해 별다른 투정을 부리지 않고, 그녀가 평소에 갖고 싶어하던 예쁜 시계를 선물로 내놓습니다. 시계를 잠시 차보는 듯하더니,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갑자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바쁜 일이 있다고 일어섭니다. ‘그녀가 언뜻 내비쳤던 눈물’, ‘서둘러 나가는 그녀의 뒷 모습’,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중대한 ‘사건’이자 ‘기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던진 이 모든 기호는 그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것들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낯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눈물은 무슨 의미를 감추고 있을까? 선물을 받고 내 사랑에 너무 감격해서 흘린 눈물일까? 아니면 이제 와서 이런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회한의 눈물일까?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야! 분명 그녀는 내가 준 시계를 차보지 않았던가? 맞아! 그녀는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경황이 없었던 것이 분명해. 그런데 오늘 그녀는 내 눈을 한번도 보지 않은 것 같아………’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녀의 눈물의 의미가 곧 떠오르나요? 아마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녀의 눈물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그녀의 눈물이 헤어짐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눈물이 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흘린 것으로, 감격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확실치 않은 의미 때문에 이 상황은 하나의 ‘사건’ 이자 ‘기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기는 하되, 아직 확정된 의미를 갖지 않았다는 점 말입니다.
사건이 분출하는 기호는 분명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기호가 어느 한 방향의 의미만을 강제하지 않고, 오히려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순율(law of contradiction)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모순율은 보통 논리학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모순적인 두 진술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 사과는 붉다’와 ‘이 사과는 붉지 않다’라는 것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말이죠. 이 점에서 모순율은 모순이 곧 법칙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순을 피하자는, 혹은 피해야 한다는 규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으며, 훗날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경험의 다양성을 강조했던 그는 형상이란 경험되는 대상의 구성 원리이기 때문에, 경험상이 소멸하면 같이 소멸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그의 사유를, 경험 대상이 소멸해도 형상은 영원하다고 주장했던 플라톤과 구별시켜주는 점이다. 주요 저서로 『형이상학』, 『정치학』, 『분석론 전서』 등이 있다】의 생각을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모순율을 최초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모순율을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모든 논증의 출발점은 우리와 논쟁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것은 존재한다’거나 혹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들 가운데 하나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논증의 출발점은 그가 그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horismenon)’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형이상학(Metaphysica)』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는 모순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던 것과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모순율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규칙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논점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모순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정보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과가 붉으면서도 동시에 붉지 않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무의미한 이야기라고 짜증을 내기 쉽습니다. ‘사과가 붉다는 거야 아니면 붉지 않다는 거야, 도대체 뭐야?’ 사과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의 생각이 옳다면 애인의 눈물이란 기호는 분명 모순적인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고, 그래서 결국 그 남자에게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파블로 피카소, [우는 여자]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 아닐까요? 애인의 눈물은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해서, ‘사랑한다’는 의미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를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기호를 해독하려고 하는 것은, 그 기호가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내용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모순’이란 말처럼 ‘사건’과 ‘기호’의 논리를 잘 표현해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다’라는 모순된 사태와 우리가 마주쳤다면, 그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은 A일까, 아니면 A가 아닐까? 도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이것이 바로 모순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모순’이란 말은 ‘무의미(non-sense)’와도 연결되어 이해되곤 합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모순된 주장은 어떤 정보도 없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실 ‘사건’과 그것을 표현하는 ‘모순’은 어떤 의미나 정보가 부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의미나 정보가 너무 많이 존재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무의미’라는 것 역시 ‘의미’가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가 과잉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들뢰즈가 알아차린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부조리의 철학에서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와 대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부조리는 의미의 결핍, 부족함에 의해 정의된다. (……) 그러나 무의미란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의미의 부재에 대립하는 것이다.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u)』
들뢰즈의 말처럼 무의미는 단순히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확정된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무의미는 오히려 의미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무의미에는 다양한 의미, 모순되기까지 한 많은 의미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무의미는 ‘무한한 의미’라고도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기호에 하나의 의미만이 있다면 그것은 습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생각을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하나의 의미로 확정된 것은 더 이상 ‘기호’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요. 예를 들어 애인의 눈물이 분명하게 ’이별’만을 의미한다면, 이 눈물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슬프게 할 뿐,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미란 마치 일종의 블랙홀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는 바로 우리의 생각을 끌어당기는, 사건이 분출하는 기호가 가진 힘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채우도록 강제하는 힘, 즉 생각하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몰래 사랑하던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우리에게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경우 그 사람의 미소는 어떤 의미도 결여하고 있다는 뜻에서 ‘무의미’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복잡한 의미, 심지어는 모순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에서 그 사람의 미소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가소롭다는 것인가?’ 의미를 확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미소 속에 어쩔 수 없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제 우리는 생각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생각이 직접 세계를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계와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낯설게 다가올 경우, 오직 이때에만 우리는 생각이란 말에 걸맞게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마주치며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건이 내뿜는 기호와 무의미 속에서 우리는 낯섦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이 점에서 우리의 ‘생각’은 바로 이 낯섦을 친숙한 것으로 바꾸려는 삶의 무의식적인 의지로부터 기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읽을 책들
발라스 듀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남도현 옮김, 서울: 개마고원,2002)
현대철학에 대한 알기 쉬운 개론서인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적인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철학의 임무가 바로 개념의 창조라고 이야기했던 들뢰즈의 입장에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 (김재희 옮김, 서울: 한나래, 1998)
서양철학의 전통이 ‘건축’이란 은유로 지탱되었음을 폭로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맑스,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등을 통해서 타자 그리고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사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박동환, 『안티호모에렉투스』 (강릉: 길, 2001)
서양철학의 논리와 중국철학의 논리를 명확히 설명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사유 논리를 해명하려고 시도한 중요한 책입니다. 특히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는 그의 안목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클레어 콜브룩, 『질 들뢰즈』 (백민정 옮김, 서울: 태학사, 2004)
들뢰즈는 이해하기 매우 힘든 철학자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분과 학문들을 섭렵하는 그의 발걸음과 범위를 우리가 쫓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 책은 들뢰즈의 복잡하고 난해한 사유 체계를 매우 명료하게 해명해주고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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