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생각하기 힘든 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테마
종교, 국가, 심지어 주체마저도 철학이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힘이 있습니다. 철학은 자명하다고 전제되어온 모든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고별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소롭다는 듯이 피하고 있는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테마입니다. 물론 철학이 사랑 자체를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이 사랑을 우리로부터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낯설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철학은 사랑이란 테마를 더욱 자명한 것으로,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공리(axiom)처럼 전제하고 출발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점은 플라톤 이래로 지속되는 철학에 대한 통념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말 자체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지혜’를 뜻하는 ‘소포스(sophos)’로 구성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일종의 은유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글자 그대로 철학은 지혜에 대한 동경과 연모, 그리고 그것과 합일하려는 의지를 가리킨다는 것일까요? 이상한 것은 ‘지혜’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던 철학자들도 막상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엄밀함을 추구하는 철학조차도 ‘사랑’ 이라는 일상적 의미에 의존해 있고, 또한 이런 일상적 의미를 매우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 자체를 문제 삼게 되면 철학 역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지금도 철학자들은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면, 철학자들이 도리어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도 사랑을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도 아직 낯설게 보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가족’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맑스의 혹독한 비판 이후 ‘국가’라는 것은 이미 그 찬란한 광휘(光輝)를 일정 부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너무나 눈이 부셔 그 실체를 볼 수 없는 태양처럼 여전히 자신의 불가사의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G. Freud, 1856~1939)【프로이트는 처음에는 빈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그후 히스테리를 연구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했다. 그는 정신병의 원인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던 기존의 의학자들과는 달리 정신병이 정신 자체의 고유한 메커니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그는 인간의 의식 이면에 무의식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주요 저서로 『히스테리 연구』, 『쾌락 원리를 넘어서』, 『꿈의 해석』 등이 있다】가 그 빛을 거두어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공로는 인간을 지배하는 무의식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정신분석학은 자유의지나 이성이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초라는 통념을 붕괴시키게 된다. 인간은 원초적인 욕망과 사회화 과정이 결합되면서 구성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이런 원초적 욕망이 우리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사회화 과정은 인간의 내면에 초자아‘를 구성한다고 보고 있다】은 주체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아버지 - 어머니 – 아이’라는 오이디푸스(Oedipus) 삼각 구조, 즉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비록 욕망 놀이와 주체 구성의 논리로 가족의 신화를 공격했지만, 여전히 가족은 신성불가침한 그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가가 없는 국가를 꿈꾸는 사람들, 즉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가족이 없는 가족을 꿈꾸는 사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여행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처럼, 국가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도 모두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들의 안식처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안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족의 품속에서는 국가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 간의 첨예한 구분이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요? 가족은 모든 모순과 대립을 화해시키는 장소.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자명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대부분이 여전히 ‘가족’을 낯선 그 무엇으로 숙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헤겔 같은 철학자처럼 ‘가족’을 ‘사랑’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친숙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가족도 당연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족을 문제 삼았을 때 사랑을 문제 삼는 경우와 동일한 불편함이 발생하는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나 ‘가족’을 그 자체로 사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나 가족을 그 자체로 사유한다는 것은 애초에 ‘사랑’이나 ‘가족’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랑’이나 ‘가족’을 하나의 결과물 혹은 하나의 도착점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사랑’이나 ‘가족’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묻고 숙고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과 가족을 우리에게서 낯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가족’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L. Witgenstein, 1889~1951)도 철학의 핵심에는 결국 의지의 문제가 개입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사랑과 가족을 문제 삼았지만 실패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의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미 구성된 가족, 즉 ‘아버지 - 어머니 – 자식’이라는 부르주아 가족 모형에 입각해서 사랑과 가족을 사유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사랑과 가족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문제 삼았던 셈입니다. 한마디로 프로이트는 사랑과 가족을 사유하는 데 있어 철저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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