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아수라장
그의 패러독스는 모든 차이들을 무화시켜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도그마에 대한 통렬한 웃음이 깔려 있다. “중요한 것은 이데아를 파면시키는 것이고, 이념적인 것은 높은 곳이 아니라 표면에 있다”(들뢰즈), 그의 언어가 가장 높은 잠재력에 도달하는 것도 이 ‘역설의 열정’에서이다.
물론 자신도 그 프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머와 개그의 주인공이 언제나 연암 자신이었듯이, 타자의 시선, 혹은 역설의 프리즘은 연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투사된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에겐 모름지기 부르는 호칭이 있다. 역관은 종사(從事)라 부르고, 군관은 비장(裨將)이라고 부르며, 나처럼 한가롭게 유람하는 사람은 반당(伴當)이라고 부른다. 소어(蘇魚)라는 물고기를 우리나라 말로는 ‘밴댕이[盤當]’라고 하는데, 반(盤)과 반(伴)의 음이 서로 같아서이다.
從使者入中國 須有稱號譯官 稱從事軍官 稱裨將閒遊 如余者 稱伴當 國言蘇魚稱盤當 盤與伴音同
압록강을 건너면 소위 반당은 은빛 모자의 정수리에 푸른 깃을 달고, 짧은 소매에 가벼운 복장으로 차림새를 갖춘다. 그러면 길가의 구경꾼들은 이를 가리키며 문득 ‘새우‘라고 부르는데, 무엇 때문에 새우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무장한 남자를 부르는 별칭인 것으로 보인다. 지나가는 곳의 마을 꼬맹이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일제히 ‘가오리 온다. 가오리 온다’고 외치며, 더러는 말꼬리를 따라다니며 다투어 외치는 바람에 귀가 따가울 정도이다. ‘가오리 온다’라는 말은 ‘고려인이 온다’라는 뜻이다. 「피서록(避暑錄)」
旣渡鴨綠江則所謂伴當 銀頂翠羽 短袂輕裝 道傍觀者 指點輒稱蝦 不識爲何稱蝦 而蓋似是武夫之別號也 所過村坊 小兒群聚 齊呼哥吾里來哥吾里來 或隨馬尾 爭唱聒噪 哥吾里來者 高麗來也
경계를 넘자마자, 서로 다른 언어가 부딪히면서 일으키는 말의 아수라장이 시작된 것이다. 그걸 낱낱이 포착한 연암이 일행들에게 말한다.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고 마는구먼[乃變三魚].” 그러자 사람들은 “세 가지 물고기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何謂三魚]?” 한다. 연암은 “조선의 길에서는 ‘밴댕이’라고 부르니 이는 소어라는 물고기요, 압록강을 건넌 이래로는 ‘새우’라고 부르니 새우도 역시 어족이고, 오랑캐 아이들이 떼를 지어서 ‘가오리’라고 외치니 이는 홍어가 아니던가[在道稱伴當 是蘇魚也 渡江以來 稱蝦 蝦亦魚族也 胡兒群呼哥吾里 是洪魚也]?” 이어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러고 나서 곧 말 위에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翠翎銀頂武夫如 | 은빛 모자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은 무부의 차림새로 |
千里遼陽逐使車 | 천리 먼 길 요양에서 사신의 수레를 뒤쫓노라 |
一入中州三變號 | 한번 중국 땅에 들자 세 번이나 호칭이 바뀌었으니 |
鯫生從古學蟲魚 | 속좁은 사람 예부터 자잘한 학문이나 배웠노라 |
무부, 고기 세 가지 ―― 이것이 이국인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저 오래전부터 자잘한 공부벌레, 곧 하릴 없는 식자층의 일원일 뿐이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연암의 진면목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그렇지 않다고 우길 것도 없다. 어차피 ‘내가 누구인가는 타자의 호명 속에서 규정되는 법’. 쏘가리도 되었다 새우도 되었다 가오리도 되었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타인들의 고루한 편향을 보는 건 쉽다. 그러나 그 시선을 자신에게 비추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자신을 기꺼이 타자의 프리즘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의 자유에 다름아니다. 연암의 패러독스가 한층 빛나는 건 바로 이런 ‘자유의 공간’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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