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 대한 상상
그 구체적 결과물이 「상기(象記)」다. ‘코끼리의 철학’이라 부를 만한 이 텍스트는 초월적 주체에 대한 의혹으로부터 시작된다.
아, 사람들은 세상의 사물 중에 터럭만 한 작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하나하나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로 말한다면 천(天)이요, 성정(性情)으로 말한다면 건(乾)이며,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제(上帝)요, 오묘한 작용으로 말하자면 신(神)이니, 그 이름도 다양하고 일컫는 것도 제각각이다. 이(理)와 기(氣)를 화로와 풀무로 삼고, 뿌리는 것과 품부하는 것을 조물(造物)로 삼아, 하늘을 마치 정교한 공장이로 보아 망치 도끼 끌 칼 등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噫!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嘗一一命之哉. 以形軆謂之天, 以性情謂之乾,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號名多方, 稱謂太褻. 乃以理氣爲爐鞴, 播賦爲造物, 是視天爲巧工, 而椎鑿斧斤, 不少間歇也.
그런 까닭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초매란 그 빛이 검고 그 모양은 흙비가 내리는 듯하여, 비유를 하자면 새벽이 되었지만 아직 동이 트지는 않은 때에 사람이나 사물이 분별되지 않는 상태와 같다. 나는 알지 못하겠다.
故『易』曰: “天造草昧”, 草昧者其色皂而其形也霾, 譬如將曉未曉之時, 人物莫辨, 吾未知.
하늘이 만물을 낸다고 하는데, 그때 하늘이란 과연 실체가 고정된 것인가. 천(天), 건(乾), 상제(上帝), 신(神) 등 보는 각도에 따라서 무수히 다른 모습일 뿐 아닌가. 게다가 하늘이 ‘초매’를 만들어냈다는데, 초매란 카오스(chaos)가 아닌가. 하늘이 어찌 카오스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요컨대 고정된 실체로 환원되는 실체로서의 하늘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초월론적 전제를 뒤흔든 다음, 코끼리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논의가 펼쳐진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범을 죽이고마니 그 코는 천하무적이다. 그러면 코끼리는 대적할 자가 없는가. 만약 쥐를 만나면? 코끼리는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러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더 세다’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궤변의 함정에 말려 든 꼴이다. 그럼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말똥구리와 여룡의 비유가 그러하듯이 코끼리와 범, 쥐 사이에는 위계를 설정할 수 없다. 각자 다른 종류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들은 서로 순환하면서 때로 상(相)하고 때론 극(克)한다. 그뿐이다.
대저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도 만 배나 더한 것임에랴. 그러므로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코끼리 상[象]’자를 취하여 지은 것도 만물의 변화를 궁구하려는 까닭이었으리라.
夫象猶目見, 而其理之不可知者如此, 則又況天下之物, 萬倍於象者乎? 故聖人作『易』, 取象而著之者, 所以窮萬物之變也歟.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통해 「주역」의 오묘한 원리를 엿보는 것, 이것이 『열하일기』가 자랑하는 명문(名文) 「상기(象記)」의 결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점은 간단하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이거야말로 번뇌를 자초하는 꼴인 셈이다.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 한 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비유하자면, 그건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는 꼴에 다름아니다.
▲ 동물원의 코끼리들
동물원 내 상방(象房)에 있는 아기 코끼리들 우애의 동물답게 서로 보듬고 쓰다듬고 갖은 재롱을 다 부렸다. 연암은 코끼리를 통해 우주를 사유했지만, 나는 그저 저 넉넉한 등에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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