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은유②
그러므로 ‘사이’의 은유들은 연암 사유를 떠받치는 기저를 이룬다. 이 점을 좀더 파고들기 위해 『열하일기』 바깥의 텍스트들을 음미해보자. 먼저 「낭환집서(蜋丸集序)」, 장님이 비단옷 입고 대로를 걷는 것과 멀쩡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 이 둘을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나은가? 이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암은 먼저 ‘옷과 살’의 사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曰: “然,” 女笑曰: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曰: “是也” 婦笑曰: “舅氏是我.”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不化, 非衣不傅, 故兩言皆是也. 雖然, 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衣膚之間.”
이 아리송한 변증에 대한 연암의 주석은 이렇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을 알 수가 있겠는가.” 자못 명쾌해 보이지만,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닌 ‘가운데’라니?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 自序)」에서 들고 있는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는 한술 더 뜬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 기울여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시골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피우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我無是矣]?”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해석해준다.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중략)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의도에 가까울 것이다.
嗟乎己所獨知者, 常患人之不知, 己所未悟者, 惡人先覺, 豈獨鼻耳有是病哉? 文章亦有甚焉耳, 耳鳴病也, 閔人之不知, 况其不病者乎? (中略) 毋聽耳鳴醒我鼻鼾 則庶乎作者之意也.
이해되는가? 더 헷갈린다고? 맞다. 그러면 연암의 일차적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그가 의도하는 바는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라는 것,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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