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2003년 5월부터 6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혀둔다. 군데군데 내용을 약간씩 추가 수정하였다.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
길을 나서기도 전에 여행은 시작되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열하일기』에 대한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동서고금 어떤 테마의 세미나에서건 『열하일기』로 시작해 『열하일기』로 마무리했고, 밥상머리에서 농담따먹기를 할 때, 산에 오를 때, 심지어 월드컵축구를 볼 때조차 『열하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의 원시적(!) 수다에 견디다 못한 후배들이 한때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하는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맞섰다. “내가 『열하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열하일기』가 나를 통해 자꾸 흘러나오는 걸 대체 어쩌란 말이냐?”라고.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말하면 나와 『열하일기』는 강도 높은 ‘기계적 접속’을 시도한 셈인데, 그 접속이 하나의 문턱을 넘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이 되어 나오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개전일이었다. ‘아(我)’와 ‘비아(非我)’, 선과 악의 적대적 이분법, ‘우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복음주의적 이성이 화려한 진군을 개시한 것이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그 순간 내 충혈된 시야를 어지럽힌 건 단지 미영제국의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라크 민중만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이성과 휴머니즘의 명분 아래 북미대평원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간 아메리칸 인디언과 버팔로떼였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죽음의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야생동물들의 비명소리였다. 서구 혹은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이 ‘더러운 전쟁’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 이젠 정말 나로부터 떠나야겠다. 존재 자체가 ‘반생명’일 수밖에 없는 ‘나’로부터, 자본의 하수인이자 제국의 신민인 그 ‘나’로부터. ‘열하로 가는 먼 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출발이 다가오면서 여행은 또 한 번 예기치 않은 문턱과 마주하게 된다. 느닷없이 ‘괴질에 대한 괴담’이 거리를 휩쓸고 다녔기 때문이다. 괴질이라는 ‘전설의 고향’식 이름은 곧 사스라는 ‘몹시 과학적인’ 버전으로 바뀌더니 급기야 이라크 침공에 맞먹는 공포와 충격의 스펙터클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렸다. 여행을 떠나지 말라고, 떨고 있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나는 연암처럼 ‘유머’로 대응했다. “여행 취소했다가, 국내에서 걸리면 ‘가문의 망신’ 이다”, “내가 이참에 사스를 싹 쓸어버리고 오겠다”, “사스에 걸리면 천운으로 알고 로또복권을 살 테다” 등등, 너무 ‘썰렁’했나? 하지만 과도하게 ‘뜬’ 분위기 ‘다운’시키는 데는 ‘냉각전법’이 최고다. 덕분에 이제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참.
1780년 여름, 연암은 압록강을 넘어 생애 처음 중원땅을 밟는다. 강을 건너면서 그는 말한다.
“자네, 길[道]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도강록(渡江錄)」
曰 “君知道乎” 洪拱曰 “惡是何言也” 余曰 “道不難知 惟在彼岸” 洪曰 “所謂誕先登岸耶”
余曰 “非此之謂也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사이[際]’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운데가 아니다. 평균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혀 낯설고 새로운 길, 시작도 끝도 없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고원이다.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
그로부터 약 2세기 뒤, 요동벌판, 천지를 뒤덮는 모래바람 속을 가로지르며 나는 묻는다. 『열하일기』와 나, 그리고 2003년 봄 중국, 이 세 개의 흐름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진정 ‘나’로부터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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