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허의 오도송의 중략된 부분 속의 언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를 즐기지만, 나는 경허의 오도송의 핵심을 ‘춘산화소조가(春山花笑鳥歌), 추야월백풍청(秋夜月白風淸)’ 운운하는 데 있지 않고 처음과 끝의 탄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전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있을 때 그 깨달음의 경지가 스스로 이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의 깨달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공감의 전입이 가능한 그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만큼 경허의 깨달음은 지존한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이것은 진정 성우 경허의 대오의 경지를 나타내는 확철한 고독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경허를 오늘의 경허로 만들어준, 그에게 무궁무진한 교학의 도리를 깨우쳐준 만화 스님이 경허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경허는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도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준엄한 스승에게 기본적 예의도 차리지 않는단 말인가? 만화 스님은 정말 기분이 나빴습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의 괘씸한 놈이죠. 그래서 한마디 건넸습니다.
“웬일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는가[何故長臥不起]?”
경허는 대답합니다.
“무사지인은 본래 이렇습니다[無事之人, 本來如是].”
만화는 묵묵히 물러났습니다.
여기 ‘무사지인(無事之人)’이라는 말은 ‘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임제가 말하는 ‘무사인(無事人)’입니다. 즉 세속적 일에 얽매일
것이 없는 자유인,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지요.
“무사지인은 본래 이렇습니다.”
그 방을 묵묵히 걸어 나오는 만화 스님은 되게 기분나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화 스님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과는 다른 경계에 서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그것을 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의 상황은 경허에게도 동일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키워준 은사에게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인지상정상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례를 통해서라도 경허는 단절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존재의 모든 연속성을 절단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 심정을 표현한 말이 곧 ‘사고무인(四顧無人)’이라는 말이지요. 이제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습니다. 경허는 다음해 봄에 서산(瑞山) 연암산(鷰巖山) 천장사(天藏寺)로 거처를 옮깁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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