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무소유
여기 ‘무소득(無所得)’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무소득’이라는 말은 이미 법정(法頂) 스님께서 ‘무소유’라는 말로 충분히 대중을 설득시키셨고 또 그것을 돌아가시기 전에 완전히 실천하셨기 때문에 우리 대중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본인의 저술조차도 족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 모든 판권을 회수하셨습니다. 아마도 스님의 출판된 글로서는 제 『금강경강해』의 서문으로 남은 글이 유일할지도 모르겠네요. 공수귀향(空手歸鄕)을 실천하신 참 드문 분이지요. 법정 스님은 제가 생전에 많이 만나뵈었지만 참 깊은 인격을 갖춘 분이지요. 글을 보면 매우 여성적이지만 만나뵈면 임제와도 같은 단호함과 강인함이 있는 분이었어요. 보조지눌의 맥을 잇기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송광사 학인들 중에서 앞으로 법정 스님을 뛰어넘는 인재들이 계속 배출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산스크리트어본의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에 해당되는 ‘나 즈냐낭 나쁘라쁘띠흐(na jñānaṃ na prāptiḥ)’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즈냐낭(jñānaṃ)’은 ‘지혜’가 아니라 단순히 ‘안다’는 계열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소승불교가 얘기해 온 모든 이론을 안다는 것이죠. 여기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소승적 이론을 안다고 하는 것의 무의미성, 모든 이론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승비구들은 이러한 앎을 통하여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경지를 얻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나의 『금강경강해』제9분을 볼 것. 그곳에도 계속 ‘득(得)’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앎이 없으므로 이러한 경지의 획득도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서 소승적 앎과 지향의 목표가 사라질 때 진정한 대승의 경지가 새로 전개되는 것이죠.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야말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넘어가게 되는 반야의 추뉴(樞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포가 없고 전도몽상이 없는 진실불허한 신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팔만대장경 경판의 『심경』에는 무 자가 ‘무(無)’와 ‘무(无)’가 번갈아 쓰였는데 기실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리드믹하게 배열한 것 같습니다.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사람들의 심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합니다. 다음 강의 ‘가애(罣礙)’의 애(礙)도 가장 간략한 ‘애(㝵)’를 썼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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