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지연기와 4성제의 부정
뿐만이겠습니까? 이 우주가 다 사라졌는데, 인식의 뿌리도 대상도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의식의 필드도 다 사라졌는데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지금부터 말하려는 이 단의 내용이야말로 진실로 소승의 아라한이라면 너무도 공포스러운 보살가나의 혁명적 외침이지요. 싯달타는 싯달타가 아니다. 그는 부처도 아니었다. 그가 생전에 깨닫고 설했다 하는 법문이 다 헛거다. 다 공이다! 보리수 밑에서 12지연기를 깨우쳤다고? 그것도 다 공이다! 다 헛거다!
보살반야의 세계에는 무명(無明)도 없고, 대단한 깨달음을 통하여 무명이 사라진다는 개구라도 없다! 이렇게 해서 12지연기의 모든 항목(지支)이 없다. 그리고 그 항목이 환멸연기에 의하여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늙어 뒈진다는 것도 없고, 늙어 뒈진다는 것이 사라진다는 개구라도 없다. 여기에 또다시 나온 ‘내지(乃至)’를 자세히 해설하면 옆의 표와 같이 되겠지요.
그러니 그가 초전법륜에서 설파했다 하는 불교의 최기본원리인 고ㆍ집ㆍ멸ㆍ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체개고라는 것도 없고, 그 고가 원인이 있다는 것도 없고, 그것을 또 멸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도 없고, 해탈할 수 있는, 열반에 갈 수 있는 8가지 정도(正道)가 있다는 것도 없다. 사성제가 다 개구라다! 다 헛거다! 다 공이다!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증득했다고 하는 것은 12연기인데 그것은 노병사의 현실로부터 그 고뇌의 원인을 파고들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궁극적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의 단멸에 의하여 인간의 고뇌를 멸할 수 있는 12조건을 계열화한 것입니다.
1) 무명(無明) 2) 행(行) 3) 식(識) 4) 명색(名色)
5) 육입(六人) 6) 촉(獨) 7) 수(受) 8) 애(愛)
9) 취(取) 10) 유(有) 11) 생(生) 12) 노사(老死)
무명이 행을 생하고, 행이 식을 생하고, 식이 명색을 생하고 이런 식으로 긍정적인 생성의 인과가 펼쳐지는 것을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 합니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소멸의 인과가 이어지는 것을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합니다. 유전연기는 고뇌의 생성이고 환멸연기는 열반의 과정이겠지요. 그런데 유전연기도 환멸연기도 다 개구라라는 것이죠. 오온이 없어졌는데 18계가 다 사라졌는데 무슨 12연기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를 압축해서 표현한 고ㆍ집ㆍ멸ㆍ도의 사성제도 사라지는 것이죠. 그리고 아라한의 팔정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공(空)의 철학’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철두철미한 ‘무(無)의 철학’입니다. ‘공이다’라는 규정성조차도 부정해버리는 철두철미한 부정의 논리지요. 그 부정은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불교의 주인공인 싯달타 대각자의 진제(眞諦)를 다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연 기독교가 『신약성서』를 전면부정한 적이 있나요? 과연 예수의 역사성을 전면부정한 적이 있나요? 기독교역사가 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 아리우스Arius, AD 256~336와 같은 사람들의 건강한 논의: 예수도 사람일 뿐)와 같은 운동을 포용해본 적이 있나요? 불교는 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한 지혜의 사상을 지혜의 완성(바라밀다)으로 옹립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대승불교의 장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장쾌한 사상혁명입니다.
이 단에서도 역시 ‘내지(乃至)’라는 말로써 12지연기에 모두 해당되는 기나긴 ‘무(無) - 역무(亦無) - 진(盡)’의 명제들을 압축시켰습니다. 명진 스님의 이름이 ‘명진(明盡)’인 것도 바로 이 『심경』에서 따온 것입니다. 원래는 ‘무명진(無明盡)’일 텐데 ‘명진(明盡)’이라 해도 아무 상관없겠지요. ‘무명(무지, Ignorance)이 사라지는 것이 없다’ 한다면 ‘명(지혜, Wisdom)이 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니깐요. ‘밝음이 다한다.’ 어떻게 해석하는 한 스님에게 붙여질 수 있는 좋은 이름이지요.
12연기의 항목(팔리어) | 『심경』의 부정의 논리 | ||
1 | 無明(avijjā) | 무무명(無無明) | 亦無無明盡 |
2 | 行(saṅkhāra) | 무행(無行) | 亦無行盡 |
3 | 識(viññāṇa) | 무식(無識) | 亦無識盡 |
4 | 名色(nāma-rūpa) | 무명색(無) | 亦無名色盡 |
5 | 六入(saḷāyatana) | 무육입(無六入) | 亦無六入盡 |
6 | 觸(phassa) | 무촉(無觸) | 亦無觸盡 |
7 | 受(vedanā) | 무수(無受) | 亦無受盡 |
8 | 愛(taṇhā) | 무애(無愛) | 亦無愛盡 |
9 | 取(upādāna) | 무취(無取) | 亦無取盡 |
10 | 有(bhava) | 무유(無有) | 亦無有盡 |
11 | 生(jāti) | 무생(無生) | 亦無生盡 |
12 | 老死(jarā-maraṇa) | 무노사(無老死) | 亦無老死盡 |
인용
'고전 > 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우주론적 명제를 윤리적 명제로 (0) | 2021.07.14 |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6강 무지에서 무소득고까지, 본문 (0) | 2021.07.14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5강 무무명에서 무고집멸도까지, 본문 (0) | 2021.07.14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4강 시고공중무색에서 무의식계까지, 18계의 이해 (0) | 2021.07.14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4강 시고공중무색에서 무의식계까지, 본문 (0) | 2021.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