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몽상
이 단락도 현장(玄奘)의 번역에 기준하여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주어가 ‘보리살타(bodhisattva, 깨달음을 지향하는 유정有情.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닌 보통사람, 즉 싯달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로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리살타의 약어가 곧 ‘보살’이며 그것은 대승운동의 주체입니다. 아라한을 뛰어넘는 새로운 불교의 주체입니다. 결국 반야경의 핵심인 심경」이 설파된 것은 보살에게 설파된 것이고, 그 설파된 내용의 최종적 수혜자는 비구가 아닌 보살입니다. 대승의 수혜자가 되려면 비구도 보살이 되어야만 합니다. 보살을 주어로 했을 때, 어떤 일이 최종적으로 벌어지는가?
보리살타, 즉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이해했고 그 원리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고로, 마음에 일체의 걸림이나 장애가 없습니다. ‘무가애(無罣礙)’라는 뜻은 걸리거나 장애가 있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마음에 뭐가 ‘걸린다’. ‘바위같은 것이 꽉 막고 있다’, 정말 괴로운 인생이지요. 나도 요즈음 ‘고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 솔직히 평온하고 아름다웠던 마음이 가애(罣礙)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 소환당해 조서를 쓸 생각은 가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진정한 실천자라고 한다면 이러한 가애를 극복해야겠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의 종이원고 위에 죽으라고 만년필을 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아~ 가애(罣礙)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보살은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恐怖)’가 사라집니다. 공포란 무엇일까요? 공포란 결국 나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다시 말해서 신체적 위협은 매우 직접적인 공포이지요. 다음으로 재산이 없어질 것 같다, 이것도 공포지요. 또 있습니다. 명예가 실추될 것 같다. 이것도 공포지요. 또 있지요. 권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내 아름다운 얼굴이 늙어서 추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인간은 세속의 악바리 같은 집념에 매달리지요.
그러나 반야의 완성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공포가 없다! 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까? 공포가 없을 뿐이 아니지요.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멀리 떠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전도란 무엇입니까?? 거꾸로 보인다는 뜻이지요. 몽상이란, 현실이 아닌, 망념에 의하여 지어내는 환상이지요. 공포에는 외마(外魔)가 있고 내마(內魔)가 있습니다. 내마는 꼭 몽상을 지어내게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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