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절망에 빠진 이의 넋두리?
우리 청각의 한계. ―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
-니체, 안성찬 · 홍사현 역, 『즐거운 학문』, 책세상, 2005, 231쪽.
노튼 소장은 전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앤디를 협박한다. 그는 앤디를 더욱 충실한 개로 만들기 위해 토미를 죽이고도 천연덕스럽게 뻔뻔한 거짓말을 읊어댄다. “토미 말이야. 출옥이 1년도 안 남은 놈이 탈옥하려고 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었어. 하들리도 쏘며 괴로워했지. 그 문제는 끝났네. 이제 우리 일을 해야지.” 1달 동안의 독방 생활로 걷잡을 수 없이 초췌해진 앤디는 소장의 제안을 거부한다. “난 안 하겠습니다. 모든 게 끝났어요.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노튼은 더욱 잔인한 미소로 앤디를 옥죈다. “끝난 건 없어. 끝나면 넌 살아가기 힘들 거야. 간수 보호도 못 받아. 내가 그 감방에서 끌어내면, 넌 또다시 강간당할 거야. (…) 도서관도 마찬가지야.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폐쇄할 거야. 책들을 마당에서 태우면 수마일 밖에서도 연기가 보일 테지. (……) 한 달만 더 있으면서 생각해봐.” 노튼 소장은 앤디가 입고 있던, ‘자유’라는 이름의 투명코트를 완전히 벗겨 내 그를 서글픈 알몸으로 홀로 서 있게 할 작정이다. 앤디는 다시 텅 빈 독방에 갇힌다. 앤디가 고통 속에서 창조해낸 모든 것을 말소시키는 것, 그것이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힘겹게 독방에서 풀려나온 앤디 옆에는 언제나처럼 레드가 앉아 있다. 앤디는 전에 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레드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내놓지 않았던 아내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내는 저에게 말했죠. 난 이해하기 힘든 남자라고. 내가 좀처럼 속마음을 안 드러낸다고 항상 불평했지요.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전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했어요. 다만, 그걸 표현할 줄을 몰랐지요. 내가 그녀를 죽게 했어요.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지만 제가 죽게 만든 거예요.” 죄 없이 감방에 갇힌 19년 세월도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을 지우진 못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내의 살인범으로 몰려 무려 19년 동안 감옥에 갇힌 것이다. 그는 풀려나오지 못했지만 적어도 누가 그녀를 죽였는지 알게 되었으며,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자유나마 얻게 되었다.
“네가 살인자는 아니잖아. 나쁜 남편이긴 했지만.” 앤디는 어찌할 수 없는 과거의 옷자락을 붙들지는 못함을 안다. “레드. 당신은 석방될 것 같으세요?” “나? 흰 수염이 나고 세월이 흘러가면 그때야 나갈 수 있겠지.” 앤디는 한 번도 고백하지 않았던 자신의 꿈을 말한다.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지후아타네오예요.” 앤디의 몽환적이지만 더없이 진지한 표정에 레드는 당황한다. 독방에 두 달 동안 갇히는 초유의 형벌 앞에서, 앤디가 입던 무적의 투명코트도 효력을 잃은 것일까. “지후…… 뭐라고?”
“지후아타네오. 멕시코에 있어요. 태평양에 있는 조그만 섬이죠. 멕시코 사람은 태평양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추억이 없는 곳이라고 해요. 그곳에서 남은 생을 살고 싶어요. 추억이 없는, 따뜻한 곳. 바닷가에 조그만 호텔을 열고 낡은 배를 사서 수리한 다음 손님들을 태우고 낚시를 하는 거지요. 지후타네오. 그곳에선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레드는 쓴웃음을 짓는다. “난 거의 평생을 여기서 살았지. 사회에 나가면 쓸모없는 인간이야. 나도 이제 길들어졌어. 브룩스처럼.” 앤디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거두고 레드를 바라본다. “자신을 비하하지 마요.” 하지만 레드는 이미 체념한 듯한 표정이다. “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라. 태평양? 엿이나 먹으라지! 난 큰 바다를 보면 빠져 죽을까 봐 겁부터 날 거야.” 앤디는 굳은 표정으로,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말한다. “난 아니에요. 난 내 마누라도 정부도 쏘지 않았어요. 난 내 실수보다 더 많은 걸 보상받을 거예요. 호텔과 보트……. 그 정도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레드는 전에 없이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앤디의 정신 건강이 걱정된다. “자신을 학대하지 말게, 친구. 실현될 수 없는 꿈이야. 멕시코는 저 멀리 있다고.” 앤디는 마치 유언을 하듯이 비장한 표정으로 레드에게 말한다. “그래, 그렇지요. 멕시코는 저 멀리, 난 여기 있죠. 선택은 간단해요. 열심히 살던가, 빨리 죽던가.” 흠칫 놀라는 레드에게 앤디는 부탁한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나가거든 부탁이 있어요. 벅스톤 근처에 풀밭이 있어요. 거대한 오크나무를 끼고 긴 돌담이 있는 곳. 프루스트의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요. 그곳에서 아내에게 청혼했어요. 우리는 함께 소풍을 가서 그 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아내는 내 청혼을 받아줬죠……. 당신이 나가면 그곳을 찾아줘요. 담 아래를 보면 특이한 돌 하나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까만 흑요석이에요. 그 돌 아래 뭔가가 있을 거예요.” 앤디는 지금 스스로 미래를 만들고 있다. 흑요석 아래에 그가 담을 메시지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 레드와의 ‘약속’을 통해 그는 이미 자신의 미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앤디의 진심을 알 리 없는 레드는 더럭 겁이 난다. 마지막 유서를 남기듯 절절한 그의 메시지는 레드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른 죄수들도 앤디를 걱정하긴 마찬가지다. “듀프레인 말이야.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밤에는 꼭 혼자 있잖아.” 헤이우드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털어놓는다. “맙소사. 듀프레인이 오늘 나한테 와서는 밧줄을 구해 달랬어.” 레드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밧줄?” “응. 2미터 길이로 말이야.” 아직 앤디의 계획을 모르는 관객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은 브룩스다. 브룩스처럼, 절망에 빠진 앤디가 목숨을 놓을까 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관객을 살짝 속이기 위한 거짓 복선. 그날 밤, 아무리 걱정되어도 앤디의 방을 찾아갈 수 없는 처지인 레드는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을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이던 앤디의 표정과 브룩스의 유언이 담긴 마지막 편지와 헤이우드가 전해줬다는 밧줄이 머릿속에서 ‘공포의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는 듯하여, 레드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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