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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 17.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 17.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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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다

 

 

그런데 그 순간. 고스케가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등 뒤에 태운 채 지나간다. 마코토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 했던, 아니 한 번 죽었던, 바로 그 기찻길 쪽으로. “마코토. 자전거 좀더 쓸게.” 마코토는 미친 듯이 달려가 고스케를 부르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고스케와 소녀는 그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마코토는 고스케를 향해 절규한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 순간. 타임 리프를 암시하는 화면이 지나간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고스케를 향한 그 피투성이 외침을 무정한 시간이 들은 걸까. 믿을 수 없는 마법처럼, 시간이 정말 멈춰버렸다. 길 위에 북적이던 사람들,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 달리는 자동차, 창공을 가르던 새떼들, 그 모두가 멈추고 오직 마코토만이 움직인다. 정지된 세계의 화면 위로 치아키가 불현듯 나타난다. “마코토, 역시 너였구나.” “치아키……. 네가 어떻게 여길……. 고스케는?” “아직 집에 있겠지.” 치아키는 마코토의 고장 난 자전거를 보여준다. 마코토의 자전거를 가져옴으로써 고스케가 그 자전거를 아예 탈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치아키라니. “지금 이거……. 네가 한 거야? 너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치아키는 마코토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한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면 웃을 거야? (……) 내가 사는 시대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장치가 있어. 바로 이거야. 몸에다 충전해서 쓰면 돼. 나도 이걸로 이 시대로 온 거고. 그런데 멍청하게도 어딘가에 흘려버렸어. 초조했었지.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찾았어. 과학 실험실에서. 이미 누가 써버렸지만. 하지만 다행이야. 이걸 쓴 게 바보라서. 나쁜 일에 쓰일까 봐 한숨도 못 잤어.”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된다. 어느 날 갑자기 마모토에게 생긴 타임 리프 능력과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치아키는 정지된 시간 속에 얼어붙은 거대한 도시 속을 천천히 걸어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 쪽으로 걸어간다. 마코토는 치아키에게 그 먼 미래에서 왜 지금 여기로 날아왔냐고 질문한다. “꼭 보고 싶은 그림이 있었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디에 있어도, 어떤 위험한 일이 생겨도, 보고 싶던 그림이었어.” 치아키가 다가간 그림에는 보존을 위해 전시를 보류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모가 복원하고 있는 바로 그 그림이다. “내가 사는 시대에서는 이 그림이 사라져버렸거든. 이 시대 이전에는 어디 있었는지 모르고. 확실히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이 시대, 이 장소, 지금 이때뿐이었어.” “그냥 보기만 해도 돼?” “보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평생 잊지 않을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젠 다 부질없지만.” 유리 저편에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를 덧없이 만지작거리던 치아키의 손가락이 유리 위로 힘없이 미끄러진다.

 

 

 

 

? 네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시대로 못 돌아간다고. 고스케가 타려던 네 자전거를 빼오느라 나한테 충전돼 있던 타임 리프 횟수를 다 썼거든.” 마코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따지듯 묻는다. “왜 써버렸어! 꼭 쓸 일이 있었잖아!” 치아키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게 꼭 쓸 일이었어.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고스케랑 그 여자애. 한 번 그 건널목에서 죽었다고. 누군가가 자기 탓이라며 울고불고 난리인데…….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렸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치아키: 강물이 흐르는 걸 처음 봤어. 자전거도 처음 타 봤고. 하늘이 이렇게 넓은 줄 처음 알았어. 무엇보다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도 처음 봤어.

마코토: 저기, 치아키. 혹시 그 그림과 네 시대가 관련이 있는 거야? 가르쳐 줘.

치아키: 난 이 시대가 좋아. 야구도 있고.

마코토: , 야구가 없어? (……) 그 그림말이야. 곧 볼 수 있어. 지금 복원 중이거든. 같이 보러 오자. 고스케랑 셋이서. 이제 여름방학이잖아. 치아키, 치아키?

치아키: 미안, 무리야. , 내일부터 없을 거야

마코토: , 어째서?

치아키: 과거 사람에게 타임 리프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거든 난 그 규칙을 어겼어. 그러니까 이제 우린 만날 수 없어.

 

 

그토록 찾고 싶었던 나의 시간을 위해 시간의 주사위놀이를 살짝 했을 뿐인데,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렸다. 그저 나의 즐거움을 위해 벌였던 시간놀이가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이 되어버리다니. 게다가 이제 치아키를 다시 볼 수 없다니. 치아키가 이별을 선언하는 그 순간.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시간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공포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시간의 세포가 파열되는 끔찍한 고통이, 나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 순간 치아키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마코토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가슴 설레고 행복했던 그 모든 시간들, 그 속엔 늘 치아키가 있었으며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그 시간, 그 고백의 시간을 스스로 삭제해버리려는 마코토의 타임 리프 소동은 뼈아픈 후회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마코토는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시간의 존재를 이제야 깨닫는다. 치아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기억은 마코토의 어리석은 현재를 내려치는 죽비가 되어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억들. 무의식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은 끝나는 순간에야 발견한 첫사랑이라는 별자리의 이름에 걸맞게 서글픈 성좌를 그리며 그녀의 기억을 완전히 다시 재구성한다. 치아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소중한 추억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의 세포를 구성한다.

 

시간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철저히 시간을 잃어버린 마코토. 그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실은 바로 그 고백의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타임 리프를 통해 시간을 창조하던 마코토, 제멋대로 타인의 시간을 지휘하던 마코토는 정작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다. 이 순간만큼 긴 시간이 있을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 순간 너를 잃어버려야 하는 이 고통스런 순간만큼 기나긴 시간이 또 있을까.

 

 

비자발적인 기억이 주는 계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으며 잠드는 순간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이따금 체험하는 것과 비슷한 불안정에서 오는 현기증같은 타격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우리에게 순수과거,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과거를 건네준다. (……) 비자발적인 기억은 우리에게 영원성을 준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 영원성을 잠시라도 더 지탱할 힘도, 영원성의 본질을 발견할 방법도 갖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비자발적인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오히려 영원의 순간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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