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의미 없던’ 파편들이 의미를 안고 내 안에 깨어나다
한편, 치아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스케의 마음도 편치 않다. “난 그렇다 쳐도, 너한테도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널 좋아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치아키가 그렇게 말했어?” “딱 보면 알지. 몰랐냐? 하긴 넌 그런 데는 좀 둔하니까. 그래서 치아키가 더 말 못했는지도 몰라.” 치아키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마코토는 ‘이미 고백을 받았으나 그 고백의 시간을 말소해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마코토의 시간 속에서 이미 치아키는 고백을 했고, 그렇게 ‘들었으나 듣지 않은 고백’이 마코토를 뒤늦게 괴롭힌다. “나 정말 못된 애야. 치아키가 어렵사리 해준 얘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어. 난 왜 더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까?”
치아키가 떠난 후 풀이 죽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코토에게, 이모는 말한다. 자기도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고. 어른이 되어 헤어졌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그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믿다가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고. 이모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원작 소설에서 타임 리프라는 ‘기이한 능력’을 갖는 것이 두려워 한사코 그 ‘초능력’을 거부하고 싶어 했던, 수줍고 겁 많은 바로 그 소녀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 ‘미래의 소년’을 기다리는 듯 처연한 눈빛을 지닌 이모는 마코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코토. 넌 나랑은 성격이 다르잖아. 친구가 늦게 오면, 네가 먼저 달려가 친구를 데려오는 게 너 아냐?”
마코토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침대를 뒹굴다가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0’이어야 할 숫자가 ‘01’로 보인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 치아키가 고스케를 살리려고 시간을 다시 돌렸으니까, 치아키도 분명 타임 리프 회수가 남았을 거야. 이제 마코토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가벼운 유희가 아니라 온몸과 온 마음을 건 도약으로, 멋지게 해낸다.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한 이후의 타임 리프는 이전의 타임 리프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치아키와 함께 걸어왔던 시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올올이 만지는 느낌으로 타임 리프에 자신의 온몸을 던진다.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너로 인해 웃고 울던 모든 시간이, 지진처럼 해일처럼 격렬하게 내 몸을 향해 돌진한다.
내가 알지 못하던 그 시간의 ‘의미 없는’ 파편들이 이제 저마다 절실한 의미를 품어 안고 다시 내 안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로 인해 단지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라 치아키의 마음이 되어, 치아키의 눈이 되어, 자신들이 걸어온 시간을 다시 되짚는다. 그녀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만난 것은 잃어버린 타인이었다. 타인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 곧 그녀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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