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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서설 - 4. 분서갱유가 촉발한 금고문논쟁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서설 - 4. 분서갱유가 촉발한 금고문논쟁

건방진방랑자 2021. 9. 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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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4. 분서갱유가 촉발한 금고문논쟁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고전(古典)의 운명

 

그런데 ()’, ‘오경(五經)’이라는 말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없었던 말이며, ‘오경이란 말은 한대(漢代)에 생겨난 것입니다. 전국시대에서 한대로 넘어오는 데 가장 거대한 사건이 바로 진시황의 중원 통일입니다.

 

진시황이라는 인물은 분열되었던 춘추전국시대를 끝낸 놈으로서 진시황은 서양으로 말하면 줄리어스 시이저와 비슷한 사람인데, 중국에 최초로 제국(empire)을 만들었습니다. 제국의 특징은 거대한 제국의 영토를 중앙집권제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즉 분권화(localized)되었던 모든 체제가 집권화(centralized)된다는 거예요. 진시황 밑에는 이사(李斯)라고 하는 아주 걸출한 사상가이자 탁월한 지략가가 있었습니다. 이사가 진시황에게 고하기를 요새 지식인들은 아주 완고하여 항상 옛을 가지고 금()을 비판하며, 시대가 이미 변해서 법이 없으면 통제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자(儒者)들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늘 옛날만 찬양하고 현실을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이죠. 이것이 이사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가장 큰 근거는 이렇게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는 고()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지식인들이 전거로 하는 것이 대개 시·····춘추들이었는데 역()은 당시에 사이언스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분서갱유의 대상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놈들이 근거하고 있는 모든 서물들을 불살라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보부를 시켜서 그 당시 문제아들을 조사해보니 460명으로 많지도 않았다는데 이 460명을 파묻어 죽인 것이죠.

 

사실 여왕마고(Queen Margot) 같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 사회에서 분서갱유란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460명이라는 숫자는 인류역사를 통해보더라도 그다지 많은 게 아니었고 실제적으로 책을 다 태울 수도 없었어요. 게다가 과학계통의 책은 안태웠습니다. 사실 분서갱유는 지식인에 대한 상징적인 탄압이었을 뿐이며 역사에서 자꾸 언급을 하기 때문에 확대되어서 인식이 되는 것이지, 분서갱유에 의해서 중국의 고전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예요. 그것보다는 B.C 206년에 항우가 수도인 함양을 불태웠을 때 더 많은 문헌의 손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서가 있은 지 22년 후에 서물을 복귀하라고 칙서가 다시 내려져서 오히려 중국문명은 더 적극적으로 부흥(Revival)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분서갱유가 학문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진시황과 모택동의 문자개혁

 

모택동도 중국을 통일하고 간자개혁(簡字改革)을 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간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컴퓨터가 발달한 지금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죠. 간자는 보기도 좋지 않을 뿐더러, 중국문자가 워낙 특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결코 간자혁명만으로는 문맹이 퇴치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서 내가 새로 알파벳을 만드노라[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라는 말을 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모택동은 중국인민들이 문자가 하도 복잡해서 배우기 어려우므로 문자개혁을 한 것입니다.

 

진시황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진시황의 개혁 중에 가장 큰 것이 문자개혁이었는데 모택동보다 더 잘했던 것 같습니다. 말에 방언이 있듯이 진시황 이전에는 각 제후국들마다 글자들이 다 달랐는데, 과두문자(蝌蚪文字)니 뭐니 해서 아랍문자가 저리가랄 정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었지요. 그래서 문자들을 통일하여 먼저 소전체(小篆體)를 만들었고 그 후 노예들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글자라고 만든 글자가 예서(隸書)입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라는 것은 이 예서에서 비롯된 해서(楷書)입니다. 대개 해서는 육조(六祖)시대에 완성이 되었다고 봅니다.

 

 

 

분서갱유와 금고문논쟁으로 성립된 경()

 

칙령으로 고문헌을 다시 거두어들일 때, 진시황의 분서(焚書) 이후에 살아있던 사람들이 암기한 내용을 받아쓴 것에는 예서(隸書)로 썼을 것이며 이것이 대개 금문입니다. 그리고 숨겨둔 덕분에 분서에서 살아남은 문서는 복잡한 고문으로 되어있었겠죠? 그래서 한대(漢代)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내 것이 진짜 텍스트라고 구라를 치는 복잡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고문 논쟁은 결과적으로 한대의 문화를 엄청나게 부흥시켰습니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좋은 영향을 더 많이 발휘한 사건이었던 것이예요.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이가 조금 더 용감했다면 광주에 가서 애매한 사람을 죽일 게 아니라 국회도서관 정도를 하나 확 불 질러 버렸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러면 활발한 학술논쟁이 많이 벌어졌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도 책을 많이 써서 양심에 걸리지만 요새 왜 이렇게 쓸데없는 책들을 많이 써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컴퓨터가 처음 나올 때는 책이 없는 간략한 사회를 모토로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문자공해를 야기시켰어요. 요새는 책이 저렇게 많은데 거기다가 목록 하나를 더해서 도서관 사서의 손을 한번 더 괴롭혀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책을 내기가 죄송스럽고 미안합니다.

 

하여튼 중국문명은 한대 금고문논쟁을 통해 크게 일어나서 고증학ㆍ훈고학이 발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죠. 즉 경()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텍스트(most cardinal text)라는 뜻이죠. 그러므로 분서갱유 이전의 서물에 대해서는 경()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자는 시()를 편찬했지 시경(詩經)을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자는 시()에 대한 인식이 있을 뿐 시경(詩經)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경(詩經)은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경학(經學)이 성립되면서 한대(漢代)에 오경(五經)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도서관학도 발달하게 됩니다. 텍스트가 없어지니까 나라에서는 대대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들을 모두 수집하고 조사하는데, 그 당시의 문헌은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이었으므로 모두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어(論語)가 백 권이 있다고 하면 백 권이 다 다른 것이죠. 중국에서 인쇄술이 발달한 것은 송대 이후이므로 그 이전의 텍스트라는 것은 요즘 책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자의 변화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복잡해진 데서 단순해진 것으로, 둥그러운 모습에서 반듯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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