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작은 성취에 만족치 말고 더 나가라
1-15. 자공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면 어떻겠습니까?” 1-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니라.”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군요?”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이제 비로소 너와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지난 것을 알려주니 올 것을 알아 차리는구나.”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
몇 가지 단상
제15장을 대하면서 우선 다음의 몇 가지 단상이 머리에 떠오른다.
첫째, 자공은 공자학단 내에서 가장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공자가 죽고 난 후 초기학단에 있어서 직전제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매우 숭엄(崇嚴)한 것이었다. 따라서 『논어』라는 서물을 편집할 때, 공자와 직접 대화하는 제자의 모습으로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자공이라는 사실은 명백한 편집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서 학단의 살아있는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파편은 매우 초기에 노나라에서 전송(傳誦)된 것임이 분명하다.
둘째, 14ㆍ15ㆍ16장이 주제의 연관성이 있다. 전송자들의 기억 속에서 연상작용을 통해 선택되었을 수도 있다. 14장에서 ‘식무구포(食無求飽), 거무구안(居無求安)’에 대하여 군자의 덕성이 그러한 소극적 절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낙도(樂道)ㆍ호례(好禮)의 적극적 추구에도 있다고 하는 공자의 말씀을 대비시켜 독자의 이해를 풍요롭게 하려 했을 것이다.
셋째, 14장의 ‘호학(好學)’의 주제가 여기서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 하는 끊임없는 연마를 통한 인격완성의 주제로서 전개되고 있다.
넷째, 실제적으로 시(詩: 노래)를 중시하며, 그 노래가사를 주고 받으며 자기 계발의 소재로 활용했던 공자학단 내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 시와 노래와 음악과 학문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었던 학단의 분위기는, 피타고라스 학단의 종교적 분위기나 예수운동의 긴박한 사회개혁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문아(文雅)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다섯째, 제16장은 제1장에서 제시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의 테제를 마무리짓는 총결적 멘트이지만 역시 호학(好學)이라는 내면적 주제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최소한 호학하는 사람이라면 남이 자기를 모른다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며, 오직 자기가 타인을 못 알아볼까 하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일 것이다. 타인을 못 알아볼까 걱정한다는 것은 즉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의 끊임없는 발견이라는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제16장도 역시 공자의 호학과 관련된 하나의 명언일 것이다.
빈궁함 속의 삶의 기쁨
앞서 말했듯이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파라독시칼(paradoxical)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공의 질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반성할 수 있는 최대한 의 진리치를 드러낸 것이다.
“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한다면 그래도 훌륭한 삶의 자세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질문은 자공에 있어서는 뼈저린 반성의 외침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말자! 또 세상이 바뀌어 내가 돈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아첨하지 말자! 이렇게만 살면 우리 훌륭한 공자님의 제자라 할 만하지 않을까? 자공은 공자님의 입에서 “너 참으로 훌륭하다”는 긍정의 말씀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긴장의 순간! 공자의 입술에서 떨어진 한마디는 무엇이던가?
“可也.”
이 순간 자공의 가슴이 저미어졌을 것이다. 철컹! 결코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可也)’는 부정의 온화한 표현일 뿐이다. 중국사람이 좋아하는 ‘츠아뿌뚜어러(差不多了)’란 표현과 별 차이가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하오지러(好極了)’가 아닌 것이다. 그 다음엔, ‘커스(可是)’(but)로 연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질문에 대한 부정 끝에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긍정적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빈궁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빈(貧)에 대한 무첨(無諂)이나, 부(富)에 대한 무교(無驕)는 모든 ‘무(無)’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부정적 가치에 의한 소극적 대처로써는 군자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공자는 빈(貧)에 대한 락(樂)을, 부(富)에 대한 호례(好禮)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황본이나 정평본 등 많은 고판본에는 ‘빈이락(貧而樂)’이 ‘빈이낙도(貧而樂道)’로 되어있다. ‘부이호례(富而好禮)’와 대구를 이루기 때문에 그것이 더 오리지날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요번에 나온 정주한간(定州漢簡)에는 그냥 ‘빈이락(貧而樂)’으로 되어있어, 완본(13경주소)이나 집주본이 결코 여타 고판본에 비하여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갑부들은 세금 내기가 무서워 재단을 만든다. 문화사업을 한다는 시늉만 내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천운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며, 또 무엇보다도 물류나 시세를 파악하는 탁월한 실력과 직관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의 사회적 가치를 항상 동시에 고려할 때만이 그 부는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돈을 벌게 만들어준 사회의 가치의 제고에 기여함이 없을 때는 돈은 바로 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격절되고 생명력을 잃는다. 돈도 생명인 것이다. 부유하면서도 호례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공자의 명제는 부유한 자들의 사회적 가치에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禮)란 그 사회의 문화의 총체이다. 따라서 부자들은 그 예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진심으로 달성하고 싶은 적극적 비젼을 발견하고 그 비젼에 헌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빈궁한 자는 빈궁하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말아야지 하는 어떤 경계심만을 유지할 것이 아니라, 그 빈궁함 속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Joy of Life)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양시키는 사람
이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공에게는 어떤 영감이 스쳤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다는 어떤 깨달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때 그 순간 그의 영감을 스치는 것은 그의 고국, 위나라의 먼 옛날 노래였다.
瞻彼淇奧, | 저기 저 기수의 물굽이를 보라! |
綠竹猗猗. | 푸른 대나무 숲이 하늘하늘 우거졌구나 |
有匪君子, | 아 문채나는 군자여! |
如切如磋, | 자른 듯 다듬은 듯 |
如琢如磨 | 쪼은 듯 간 듯 |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시구는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덕성을 찬양한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문장(文章)이 빛났으며 간언을 잘 들어 예(禮)로써 자신을 잘 방비한 명군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는 옥석(玉石)을 자르고 갈아서 서서히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인간의 덕성의 함양의 과정에 비유한 말이라는 것이다. 절(切)은 골(骨)에 대하여, 차(磋)는 상(象: 상아)에 대하여, 탁(琢)은 옥(玉)에 대하여, 마(磨)는 석(石)에 대하여 쓰는 가공기술의 언어라는 것이다.
자공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자공의 의도는 곧 자신의 깨달음을 이 시(詩)에 은유하여 자신의 수덕(修德)의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시각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작업이 곧 못생긴 옥석(玉石)을 갈고 닦아 세련된 작품을 만들듯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결의를 구가했던 것이다.
이때, 공자는 자공의 이름을 부른다: “사賜여!” 사(賜)는 자공의 명(名)이다. 즉 애명이다. 아이적부터의 이름이요,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중국고대습관으로 명을 부른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의 친근감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명은 보통의 관계에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후대에서는 제자에게조차 명으로 부르는 것은 실례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를 부를 때는 항상 명으로 불렀다.
“이제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 말은 공자의 극찬이다. 제자의 깨달음을 상찬하는 찬미의 말이다. 공자는 이와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자하(夏)에게도 던지고 있다(「팔일(八佾)」 8).
‘고저왕이지래자(告諸往而知來者)’는 사실 문자 그대로는 해석이 어렵다. 지난 것을 말해주니까 올 것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미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직접적으로 ‘미약빈이락(未若貧而樂), 부이호례자야(富而好禮者也)’라는 공자의 교훈을 가리킨다. 미래는 ‘기욱(淇奧)’의 시구를 가리킨다. 즉 과거를 말해주니 미래를 안다는 것은, 한 귀퉁이를 튕겨주니까 깨달음이 줄줄이 따라온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레게의 영역이 아름답다: “I told him one point, and he knew its proper sequence.” 주희가 왕자(往者)는 말로 표현한 것이요, 내자(來者)는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라 주(註)한 것도 매우 좋은 해설이다.
‘사야(賜也)’의 ‘야(也)’는 사(賜)라는 실체를 한번 거리를 두어 확인시키는 의미를 가지는 조사이다. ‘기사지위호(其斯之謂乎)’는 ‘그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군요[기위사호(其謂斯乎)]’의 평상적 어순에서 사(斯)를 도치시켜 그 사이에 갈 지(之)를 삽입시킨 용법이다. 사(斯)를 강조하는 어세가 들어가 있다. ‘고저왕(告諸往)’의 ‘諸’는 우리말로 ‘저’로 발음한다. ‘지호(之乎)’ ‘지어(之於)’의 축약형이기 때문에 그리 발음하는 것이다. ‘부이무교(富而無驕)’는 「헌문」 11에 ‘빈이무원난(貧而無怨難), 부이무교이(富而無驕易)’라는 구절에 한 번 더 나오고 있다. 『좌전』 정공(定公) 13년에 위(衛)나라의 현자이며 대부인 사추(史鰌, 스 치우, Shi Qiu)【「위령공」 6에 나오는 사어(史魚)】의 말로서 ‘부유하면서 교만치 않은 자는 드물다[부이불교자선(富而不驕者鮮)]’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또 나오고 있다.
시경의 해석은 생기발랄하게
20세기는 고대중국의 문화ㆍ역사 각 방면에 있어서 놀라운 새로운 발견이 속출한 세기였다. 갑골문의 발견을 비롯하여 지하로부터 고대중국의 엄청난 일차 자료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중국 고대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들이 축적되어 갔다. 그것은 단지 ‘새롭다’는 차원을 떠나 우리의 인식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혁명시키는 그러한 발견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경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각이 요구되었다. 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문제시되었던 경전이 바로 『시경』이다.
『시경』의 ‘시(詩)’는 ‘쓰여진 시구(written poem)’라기보다, 일차적으로 ‘노래’였다. 즉 노래의 곡조가 사라지고 가사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시(詩)’를 말했을 때는 그것은 반드시 ‘노래(Songs)’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경(詩經)』에서는 노래를 ‘풍(風)’이라 부르는데 ‘풍(風)’은 민요다. 국풍(國風)이란 각 나라(國)의 민요(風)다. 즉 국풍(國風)은 민요집인 것이다. 민요는 민중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정감(情感)의 발출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조작된 체계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대중적 정서를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정감(情感)의 발출이다. 그래서 「악기」에서는 ‘감어물이동(感於物而動), 고형어성(故形於聲)’이라 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心]이 사물에 촉발되어 저절로 움직인 것이 소리로 구체화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감이동(感而動)’ 즉 ‘감동(感動)’이라 표현한 것이다. 시는 감동의 세계다. 그것은 이지적 조작이 아니다. 그래서 악(樂)이란 정(情)의 불가변자(不可變者) 요, 예(禮)란 이(理)의 불가역자(不可易者)라 한 것이다.
‘기욱(淇奧)’의 노래 한 소절은 발랄한 민중의 감동(感動)을 표현한 것이다. ‘무공(武公)의 덕(德)’이라든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의 수양’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일상적 풍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민요란 본시 어떤 특정한 대상을 찬양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사례는 희소하다. 뭇 남녀의 감정을 대변해줄 뿐이다.
기수(淇水)의 얼음이 풀리고 화창한 봄날씨가 되면 강변에 푸른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우거지기 시작하고 남녀의 가슴이 봄바람에 설레이기 시작할 때, 청춘 남녀가 모두 강변으로 짝짓기를 하러 나온다. 그때 멋있는 사내가 수레를 몰고 아름다운 새악씨들이 있는 곳을 지나간다. 소남(召南)의 ‘표유매(標有梅)’나 위풍(衛風)의 ‘목과(木瓜, 모과)’라는 노래가 얘기해주듯이, 아리따운 새악씨는 마음에 끌리는 남자가 지나가면 매실(혹은 다른 과일)을 따서 던진다. 그리하면 남자는 답례로서 패옥(佩玉)을 선사하여 서로의 사랑을 확약하는 증표로 삼 는 풍습이 있었다.
훨씬 후대 서진(西晋) 때의 이야기지만, 『세설신어(世設新語)』 「용지 (容止)」 7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고사가 실려있다. 당대의 시부(詩賦)에 능했던, 특히 애뢰(哀誄, 아이레이, ai-lei)【죽은 자를 슬퍼하면서 그 생전의 공덕을 읊는 문체】에 능(能)했던 명인 반악(潘岳, 판 위에, Pan Yue, AD 247~300)은 어려서부터 미모가 출중났고, 기동(奇童)이라 불릴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비파를 들고 낙양시가(洛陽市街)를 거닐면 그의 수레에는 사방에서 부녀들의 하느적거리는 손길에서 날아온 과일들이 가득찼다. 그런데 당대(當代)의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렸다고 한 그 유명한 『삼도부(三都賦)』의 저자 좌사(左思, 쭈어 쓰, Zuo Si, AD250~305)는 추남이었다. 그가 낙양의 거리를 거닐면 그의 수레에는 개왓장(瓦石, 와석)이 가득 찼다【『진서(晋書)』 권55(卷五十五), 「반악전(潘岳傳)」에는 좌사가 ‘장재(張載)’로 되어있다】.
여기 위풍(衛風)의 제1수인 기욱(淇奧)의 노래도 분명 이런 관습과 관련되어 있는 민요다. ‘유비군자(有匪君子)’는 ‘아 저 아름다운 사내’의 뜻이다. 『논어』가 말하는 도덕적 의미로 규정된 ‘군자(君子)’보다 훨씬 이전의 몰가치적 언사인 것이다.
瞻彼淇奥 | 저기 저 기수의 물굽이를 보라! |
綠竹猗猗 | 푸른 대나무 숲이 야들야들 우거지고 |
有匪君子 | 아 저 아름다운 님 |
如切如磋 | 자른 듯 다듬은 듯 |
如琢如磨 | 쪼은 듯 간 듯 |
瑟兮僩兮 | 무게있고 위엄이 넘치는 저 사내 |
赫兮咺兮 | 빛나고 훤출 |
有匪君子 | 아름다운 님이여 |
終不可諼兮 | 종내 잊을 수 없어라! |
이 노래에서 ‘여절여차(如切如磋), 여탁여마(如琢如磨)’는 한 사내의 섹시한 외관을 형용하는 아주 최상급의 표현들이다. 포마드를 짝 바르고 족제비 양복을 샥 늘어뜨린 기생오라비같은 청년을 형용할 때, ‘깎은 듯이, 쏙 빠진 듯이, 쪼아낸 듯이, 빤질빤질 갈아낸 듯이’ 그렇게 단장한 모습을 형용하는 최상급의 표현이 바로 ‘여절여차(如切如磋) 여탁여마(如琢如磨)’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절차탁마(切磋琢磨)’라 하면 옥을 갈아 빛나는 작품을 만들듯이 모나는 성격을 갈아 훌륭한 덕성을 함양한다고 하는 수덕(修德)의 의미로 풀이하고 사용하고 있다. 그 것이 유행가의 ‘그때 그 사람’의 섹시한 외모를 형용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치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당대의 유행가 위풍(衛風) 민요의 일차적 의미는 공자-자공 사이에서 이해된 세만틱스(semantics, 의미론)는 아니었다.
공자는 시(詩)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미 『시』를 자기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시경』의 왜곡은 이미 공자에게 그 남상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처녀탄생을 70인역 「이사야」 7:14를 인용하여 정당화시키려 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마태」 1:23).
그러나 여기의 ‘처녀’의 원어는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인데 이것은 처녀가 아닌 그냥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용의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시』에 대한 생각이 후대의 왜곡과 같은 형태의 왜곡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본 장의 이해에 있어서조차 최근의 새로운 관점을 수용하는 방향에서, 공자와 자공 사이에 오간 염화미소(拈華微笑)를 재해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자는 『시』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모시』의 구역질나는 도덕적 왜곡의 전형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이미 자기 사상의 시각에서 보는 어떤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공자의 『시』의 해석은 생기발랄하고, 민요의 원뜻을 꿰뚫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공자를 뛰어넘어,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공자와 대결하고 공자의 해석을 광정하는 지혜의 눈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樂’은 음이 ‘낙(洛)’이다. ‘호(好)’는 거성이다. ○ ‘첨(諂)’은 자기자신을 낮추고 무릎을 꿇는 것이다. ‘교(驕)’는 자랑하면서 방자한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가난과 부유의 한 가운데 빠져서 스스로를 지키는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두 가지의 병통이 있는 것이다. 아첨하지 아니 하고 교만하지 아니 하는 것은 스스로를 지킬 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빈부 그 자체를 초월하지는 못한 것이다. 대저 그냥 ‘가(可)’라고 말한 것은, 가까스로 괜찮을 뿐이요 아직 미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즐긴다’하는 것은 마음이 드넓고 몸이 여유로워 그 가난함을 잊는 것을 말함이요, ‘예를 좋아한다’하는 것은 편안하게 선(善)에 처(處)하고, 즐겁게 리(理)에 따를 줄 알기 때문에 자신이 부자라는 것도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자공은 재화를 늘리는 도사였다. 처음에는 가난했지만 나중에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는 데 힘쓴 자였다. 그러기에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러자 부자(夫子)는 이와 같이 대답하신 것이다. 대체로 자공이 이미 능한 바를 인정해주고, 아직 그가 달성치 못한 측면을 힘쓰도록 격려해주신 것이다.
樂, 音洛. 好, 去聲. ○ 諂, 卑屈也. 驕, 矜肆也. 常人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而忘其貧, 好禮則安處善, 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차(磋)’는 칠다(七多) 반이다. ‘여(與)’는 평성이다. 시는 「위풍」 「기욱(淇奧)」편의 내용이다. 뼈 와 뿔을 다스리는 공예장인은 이미 절단한 다음 그것을 다시 간다. 옥과 돌을 다스리는 장인은 이미 쪼은 다음 그것을 다시 간다. 그것을 이미 정교하게 다듬었 다 할지라도 더욱 더 그 정교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자공은 아첨치 아니 하고 교만치 아니 한 것을 지고의 경지로 여겼다가 공자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의리의 무궁함을 깨닫고 비록 어느 수준에는 왔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므로 노래를 인용하여 자기의 소감을 밝힌 것이다.
磋, 七多反. 與, 平聲. ○ 『詩』衛風「淇澳」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 而益求其精也. 子貢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引是詩以明之.
‘왕(往)’이란 이미 언표된 것을 말한다. ‘래(來)’란 아직 언표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 나 주희는 생각한다. 이 장의 문답은 그 얕고 깊음과 높고 낮음이 진실로 변설을 기다리지 않아도 명백해진다. 그렇지만 먼저 절단치 아니 하면 연마하는 것을 베풀 길이 없고, 먼저 쪼지 아니 하면 가는 것을 베풀 길이 없다. 그러므로 학자는 작은 성취에 안주하여 도(道)로 나아가는 극치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지만, 허원(虛遠)한 이상에 매달려 자기 자신에게 절절한 실제적 병통을 살피지 않는 것 또한 불가한 것이다.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辨說而明矣.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 而不察切己之實病也.
이 장의 집주는 일체 선학(先學)의 말의 인용이 없다. 주자 자신의 말로만 되어있다. 주자는 역시 사고력이 명쾌한 사람이다. 쉽고 군말이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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