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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14. 호학의 조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14. 호학의 조건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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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호학의 조건

 

 

1-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 만하다.”
1-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의 오리지널한 발언

 

공자의 일생을 규정하는 말에서 호학(好學)이라는 한마디처럼 리얼하게 그의 삶의 역정을 그려내는 말도 없다. ()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호학(好學)이라는 동적 과정(dynamic process)이 훨씬 더 공자라는 인간을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학이(學而)편이라는 편명은 우연히 결정된 이름이지만 공자의 호학정신을 하나의 주제로서 전편에 관통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배움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1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6즉이학문(則以學文)’, 7오필위지학의(吾必謂之學矣)’, 8학즉불고(學則不固)’, 그리고 본장의 가위호학야이(可謂好學也已)’가 호상(互相) 발명하고 있다. 그리고 본장의 내용은 다음 장미약빈이락(未若貧而樂), 부이호례자야(富而好禮者也)’와 주제의 연관성이 있다. 본장에서 말하는 청빈한 생활에 대한 고차원의 적극적 삶의 자세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동시절부터 입술에 붙었던 이런 말들, 나는 어린시절부터 엄마에게서 성경구절을 배웠고 또 이런 고전의 향기를 배웠다. 본 장의 말은 내 또래의 사람들만이라도 교양있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대체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논어는 단순히 논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 속에 지속되어온 우리 삶의 가치였다. 식무구포(食無求飽)하며 거무구안(居無求安)하며 민어사이신어언(敏於事而愼於言)이요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이면 가위호학야(可謂好學也已)이니라! 그 얼마나 정감 있는 우리의 언어였던가?

 

 

ᄌᆞᄀᆞᄅᆞ샤ᄃᆡ 군ᄌᆞ 식애포호ᄆᆞᆯ 구티말며

거호매 안호ᄆᆞᆯ 구티말며

ᄉᆞ애 민ᄒᆞ고 언애 신ᄒᆞ고

유도애 취ᄒᆞ야 졍ᄒᆞ면

가히 ᄒᆞᆨ을 호ᄒᆞᆫ다 니ᄅᆞᆯ디니라(율곡언해)

 

 

이 장은 인간 공자의 질박한 모습을 담고 있는 오리지날한 파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 언어가 소박하고 개념적 비꼬임이 없다. ‘예지용(禮之用), 화위귀(和爲貴)’와 같은 난해한 개념적 결구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소박한 일상적 언어가 공자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군자는 공자의 이상이요, 공문 커리큘럼이 지향하는 인간상이었다. 천자(天子)라 할지라도 군자의 모습을 위배할 수 없다.

 

 

구문 해석

 

식무구포(食無求飽)하고 거무구안(居無求安)하라는 명령은 반드시 빈핍(貧乏)한 식사와 궁핍(窮乏)한 주거환경에 만족하라는 뜻은 아니다. 우선 먹되 배부름을 구하지 말라는 메시지의 주어가 군자(君子)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학이(學而)편이 공자교단에게 들어오는 학동들에게 군자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군자의 덕성을 훈계하는 성격이 있다는 것은 이미 서술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지향해야 할 추상적 개념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회를 지도하는 위치를 가진 권력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군자는 당연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소유한 인간이다. 그러한 군자가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이미 범용의 도덕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군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렬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80감기식(甘其食), 미기복(美其服), 안기거(安其居), 낙기속(樂其俗)’이라 했듯이, 먹는 것을 달콤하게 하고,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 문명적 삶(civilized life)의 기본이다. 그러나 여기 공자는 어디까지나 전체의 문맥을 호학(好學)’이라는 한 줄기에 잡고 있는 것이다. 호학의 조건으로서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배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먹되 배부른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고, 살되 편안한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배부르게 먹기 위해 사는 인간, 편안하게 살기 위해 사는 인간, 이런 인간들처럼 굴욕적이고 자기기만적이며, 이기적이며 몰가치적인 인간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먹되 배부르지 않게 먹는다는 명제는 참으로 실천키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입맛이 당겨도 과식하게 된다. 이러한 과식은 단순히 나의 위장의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혼의 타락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탐식의 마음이 바로 사() 즉 공무원의 독직과 연결되어 있다고 공자는 우리에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집도 편안하게 꾸미려면 한이 없다. 돈을 처들이기 시작하면 무한정 들어가는 것이 집이다. 조촐한 방 한 칸, 깨끗한 온돌장판에 창호지 발라 놓고 조그만 책상 하나만 있어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것이다. 빗자루 하나, 걸레 하나면 족할 것이지 뭔 인테리어냐?

 

민어사이신어언(敏於事而愼於言)’이라는 말은 교언영색(巧言令色)’부터 일관되어 내려오는 공자의 인의 사상의 주제이다. 똑같은 말이 조금 표현을 달리하여 이인(里仁)24에서 말에는 어눌하고 행동에는 민첩하다[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으로 나오고 있다. 모두가 공자의 일관된 입장, 언어적 표현에 대한 거부감, 언어적 표현보다는 행동의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입만 나불거리는 말빠른 인간처럼 경멸스러운 인간은 없었다. 요즈음 같이 말(verbalism)을 중시하는 가치관 속에서는 공자의 이런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가치로 보일 수도 있으나,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현대인이 이러한 공자의 말에 심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증오하는 것은 웅변이나 달변그 자체가 아니다. 실천이 앞서지 않는 공허한 웅변이나 달변이 가증스러운 것이다.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은 많은 사람들이 애써 번역을 어렵게 하고 있는데, 그냥 액면 그대로 쉽게 해석하면 된다. 유도(有道)는 유도자(有道者)이다. 고전한문에서는 추상적 속성만으로 그 속성을 구현한 사람이나 물건의 뜻이 된다. ‘()’나아간다그리로 간다’, ‘그것에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정언(正焉)’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한다이다. ()은 곧 광정(匡正)의 정()이다. ‘()’을 유도자(有道者)에 의하여 바르게 된다는 식으로 대부분 해석하는데 이것은 오석이다. 어떻게 유도자(有道者)가 나를 바르게 할 수가 있겠는가? ‘바르게 함은 오직 나의 실존적 책임이다. ‘…… and so is corrected by them’(Brooks). ‘…… and find improvements in their company’(Ames). 등은 모두 에두른, 좋지 않은 번역이다.

 

 

호학은 끊임없는 삶의 자세

 

문장 전체를 볼 적에 호학(好學)’의 내용이 식()ㆍ거()ㆍ사()ㆍ도()와 같은 이런 일상적 사태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학문의 내용은 본시 문자를 익히고 독(讀書)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인데, 앞서 자하의 말대로 미학(未學), 오필위지학의(吾必謂之學矣)’와 같은 식으로 이러한 일상적 덕목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이 장에 대하여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퍽으나 가소로운 질문이다.

 

공자학단에 있어서 문자를 익히고 독서를 하며, 예악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식무구포(食無求飽)하고 거무구안(居無求安)하는 것과 분리되어 이해된 적은 없다. 특히 마지막의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이라는 말 속에는 스승을 만나 나의 무지를 끊임없이 깨우친다는 함의가 들어가 있다. (, 바르게 함)’의 내용에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독서의 함의가 배제될래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먹되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살되 편안키를 구하지 않고,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하며, 훌륭한 스승 밑에 나아가 공부하는 것 이 4가지 사태는 단 하나의 학()의 사태인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삶의 과정이다. 호학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그것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명사화된 지식의 달성이 아니라, 좋아하는 느낌의 문제이며, 그 느낌은 죽는 순간까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호학은 끊임없이 자기 무지를 깨우치는 과정이며, 끊임없이 기존의 이념을 탈피하는 과정이며,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향해 미래적 무()에로 자기를 투여(投與)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군자들을 볼 때 호학의 정신이 완전히 차단된 위군자(僞君子)의 모습만 오버랩될 때가 허다하다. 그리고 이러한 위군자들이 영향력 있는 기관의 장()을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사회는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 공자의 사상은 호학(好學)’()’으로 압축된다. 공자가 말하는 인간은 호모 스투덴스(homo studens)인 것이다.

 

가위호학야이(可謂好學也已)’는 텍스트에 따라 가위호학이의(可謂好學已矣)’(한석경漢石經), ‘가위호학야이의(可謂好學也已矣’(황본皇本)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가 확실한 단정을 나타나는 조사임에 비하면, 단정은 단정이되 그 단정의 느낌을 부드럽게 하는 조사이다.

 

 

()’는 거성이다.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하는 바가 다른 데 있어 그런 데 미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일에 민첩하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그 부족함을 힘쓴다는 것이다. 말에 삼갈 줄 안다는 것은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어도 그것을 다 끝내려고 나불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스스로 옳다고 자만하지 않고 도()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옳고 그름을 질정한다면 그를 호학(好學)한다 이를 만하다. 무릇 도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일컫는 것이니,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함께 말미암아야 할 것이다.

, 去聲. 不求安飽者, 志有在而不暇及也. 敏於事者, 勉其所不足. 愼於言者, 不敢盡其所有餘也. 然猶不敢自是, 而必就有道之人, 以正其是非, 則可謂好學矣. 凡言道者, 皆謂事物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윤언명이 말하였다: “군자의 배움이 이 네 가지에 능하다고 한다면 가히 뜻이 돈독하고 실천을 힘쓰는 인물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러나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그 바름을 취하지 않는다면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임을 면치 못한다. 양주와 묵적이 인의를 배웠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것과도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 흐름의 폐단이 무부(無父)하고 무군(無君)한 데까지 이르렀으니 과연 학문을 좋아한다는 일컫는 것이 가하겠는가?”

尹氏曰: “君子之學, 能是四者, 可謂篤志力行者矣. 然不取正於有道, 未免有差. 如楊墨學仁義而差者也, 其流至於無父無君, 謂之好學可乎?”

 

 

선말 사상가 심대윤(沈大允, 1806~1872)은 여기서 호학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독서가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서라는 것은 그 독서한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읽은 바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보면 그가 독서를 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실천을 하지 않으면 비록 독서를 했다 할지라도 그는 참으로 독서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독행(篤行)으로써 호학의 내용을 삼은 것이고 독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은 것이다. 독서를 폐하고 단지 행동만을 일삼으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讀書, 欲以措行也. 果能措行, 則其讀書可知矣. 苟不能措行, 則雖讀書亦猶不讀書也. 故以篤行爲好學, 而不及讀書也, 非謂廢書而但行也].” 궁행(躬行)을 강조 하는 그의 시대정신이 엿보인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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