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모든 것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두 가지 관점이 동시에 제시되어서 위의(威義)라는 것이 무엇인지 오히려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결과를 중심으로 보면 남을 배려하는 방식을 익혔을 때 나타나는 세심함이 위의(威義)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근본적으로 위의(威義)란 소양인의 모습을 태음적인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니까. 소양인의 남에 대한 배려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들쭉날쭉한 것에 비해, 태음인의 위의(威義)는 일관성이 있고 지속성이 있다. 게다가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박함이 없다. 그러니 대인의 위의(威義)라 부를 만하다. 또 소양인의 배려는 사회 통념에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것에 비해, 태음인의 위의(威義)는 상대가 처한 특수성을 고려해주니까 배려 받는 입장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감이 떨어진 태음인에게서 남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다. 태음인의 섬세함이 우선 적용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다음에 가족이며, 다음에 타인에게로 향한다. 자기에게 닥쳐올 수 있는 여러 가능한 상황 중에 자신이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고 느껴지면 그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이다.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지레 겁을 먹고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생각이 미치기 어려워진다.
위의(威義)를 갖추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태음인의 장점, 즉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침착함을 최대한 키우는 것이다. 똥개 이야기를 한 번만 더 꺼내자면, 50점은 접어주는 자기 바닥을 조금씩 조금씩 넓히는 것이다. 자기 바닥도 다 이해가 안 된 상태에서 함부로 남의 영역에 가서 어슬렁거리지 않는 것이다.
‘저 바닥이 더 물이 좋다’고 여럿이 떠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깃해한다. 그러나 태음인은 같은 바닥에서 더 많이 건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남들이 10을 건지는 바닥에서 20을 건지고, 남들이 20을 건지는 바닥에서 30을 건지는 능력이 있다. 남들은 이제 물 다 갔다고 떠나는 바닥에서도 태음인은 계속해서 건질 것을 찾아낸다. 예를 들자면, 태음인은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기도 한다. 볼 때마다 조금씩 더 건져낸다. 한 영화를 대여섯 번씩 보고 나서, 어떤 느낌이 있어서 표현은 했지만 감독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워했던 부분을, 관객입장에서 건져낸다.
그렇게 확실한 자기 영역이 있으면 모든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누그러진다. 탈심(奪心)을 탈리(奪利), 절심(竊心)을 절물(竊物)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치심(侈心)도 다른 설명이 붙는데, 이를 ‘치심(侈心)은 자존(自尊)’이라고 설명한다. 치심(侈心)이란 자신을 높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결과다. 확실한 자기 영역이 있다는 안도감이 있으면 함부로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반대로 불안감이 생기면, 어떻게든 자신을 높이려 들게 된다. 결국 자신의 영역에 익숙해지는 것, 원래 태음인이 가장 잘 하는 것, 그 부분에 치심(侈心)을 극복하는 열쇠가 있다.
확실한 자기 영역이 있어서 이것만 지키면 다른 것들은 잃어도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타인에 대해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남이 뭐라 하든 자신이 있으니까 굳이 강하게 강조할 이유도 없다. 여유 있고 웃는 모습이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십팔기 유단자인 후배를 안 적이 있다. 그 후배가 음악다방에 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밤에 일이 다 끝난 뒤에 다방의 의자를 한 쪽으로 밀어놓고 십팔기 기본 동작을 펼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동작을 가만히 보다보니, 마치 무용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안에 들어가 필자가 좋아하던 죤 바예츠(Joan Baes)의 〈River of pine>이라는 노래를 틀어 놓았다. 음악과 무도(武道)가 너무 아름답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다가 흥이 돋아 몇 가지 동작을 따라 해보려는 순간,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근육이 충분히 단련되지 않으면 흉내조차 불가능한 동작들이었던 것이다. 힘이 뒷받침되었을 때 유연함이 나온다는 것을 아주 감명 깊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이를 마음에 적용시켜보자. 자신감이 뒷받침되어야 마음의 유연함이 나오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마음에 힘이 있어야 비로소 유연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천성의 섬세함을 타인에게까지 적용시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태음인의 유연하면서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대인의 위의(威義)라 부른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