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씨앗
문명의 빛이 처음 내리쬐인 지역은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추정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남쪽 나일 삼각주에서도 이집트 문명이 싹튼다. 두 문명은 초승달 모양의 이 일대를 점차 환하게 밝힌다.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나면서 오리엔트 문명이 생겨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사회가 형성되지만, 이 지역은 갈수록 확대되는 문명을 담당할 중심지가 되지 못한다. 오리엔트 문명은 점차 서쪽으로 중심을 이동하면서 유럽 대륙의 동쪽 끝자락인 크레타와 그리스에 전해진다. 이후 오리엔트는 문자(알파벳)와 종교(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큰 선물을 서양 문명에 전함으로써 뿌리의 역할을 다한다.
1장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인류는 마치 500만 년 전에 탄생한 이후 499만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번데기로 지내다가 1만 5000년 전에 갑자기 화사한 나비로 탈바꿈한 듯했다. 그러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햇빛을 누릴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 『최초의 혁명』에서
인류의 ‘화려한 변태’를 낳은 것은 농업과 사육이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이나 구석기로 생활하다가 1만 5000년경부터 신석기시대로 접어들었다. 두 시대는 단순히 ‘신구’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석기시대라도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음식물을 구하는 방법에 있다【예전에는 석기를 만든 방식을 기준으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나누었다. 구석기시대에는 돌을 깨서 만든 뗀석기를 썼고,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기준보다 수렵-채집 생활과 농경 생활을 기준으로 두 시대를 구분한다】. 예전까지는 동물을 사냥하고 먹을 만한 식물을 얻거나 캐는 수렵과 채집 생활을 했으나, 신석기시대부터는 동물을 사육하고 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음식물을 생산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처음으로 ‘노예(가축)’를 거느리고, 잉여 생산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의 맹아는 이때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농업과 사육은 인간에게 붙박이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아직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양식을 구하러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무시무시한 빙하기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따뜻한 남쪽을 찾아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가히 혁명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그래서 이것을 농경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의 혜택이 처음 주어진 곳은 어디였을까? 처음에 농경과 사육이 행해진 곳은 서아시아 북부의 고원지대, 바로 오늘날 터키가 자리 잡은 소아시아였다. 이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아 작물과 가축을 키우기에 적합했다【이 점에 관해서는 세계지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구 위의 땅은 아주 넓은 것 같아도 실상 원시 농경이 이루어질 만한 지역을 찾아보면 두 곳밖에 없다. 터키 부근과 북아메리카 평원이다. 유럽은 너무 춥고, 아프리카는 너무 더우며, 남아메리카 온대 지역은 험한 안데스 산지인 탓에 농경이 어렵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오늘날 식용작물의 원형들은 대부분 서아시아(밀ㆍ귀리ㆍ보리)와 북아메리카(옥수수ㆍ감자ㆍ강낭콩)에서 처음 재배를 시작한 것들이며, 우유를 먹기 시작한 것도 서아시아 사람들이 처음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인간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신석기 혁명이 일어나고 한참 뒤에까지도 수렵-채집 생활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과 한 차례의 혁명이 더 필요했다. 고원의 환경은 나날이 늘어나는 인구와 갈수록 커지는 촌락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석기 인간은 점차 고원에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터키의 고원지대(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아래쪽이라면 어딜까?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곳, 바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일대다. 점차 이 두 강의 유역으로 내려온 이들은 기원전 4000년경~기원전 3000년경 도시 혁명이라는 또 하나의 혁명을 이루었다(물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산 아래에 아무도 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평지의 삶은 산지보다도 더 원시적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 혁명의 성과가 바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 지역’이라는 뜻) 문명이다.
하지만 문명의 규모가 커진 만큼 문제점도 커졌다. 고원의 촌락에서는 자연 강우만으로도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으나 ‘대처‘로 내려와 도시를 이룬 다음에는 그게 쉽지 않았다. 도시는 인구가 밀집한 곳이므로 수량이 풍부한 강물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강은 물을 공급해준다는 점에서 좋지만 자칫하면 범람하기 일쑤이므로 언제나 통제가 필요하다. 마침 치수(治水)의 조건이 좋다는 게 다행이랄까? 촌락 규모의 사회에서는 큰 강을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풍부한 인력이 존재하는 도시의 조직 사회에서는 관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점차 척박한 고지대의 약탈 농경(토질을 최대한 이용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농경 방식)에서 관개를 이용한 넉넉한 농경으로 이행했다.
초기 문명에서는 치수에 성공하면 도시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을 지배하는 자가 왕이 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만이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동부 연안을 거쳐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에 이르는 초승달 모양의 고대 문명권을 가리켜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부른다. 초승달의 다른 쪽 끝에서는 이 무렵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 최초의 도시 예리코 문명이 최초로 생겨난 곳은 넓은 평야가 아니라 비좁은 고원지대였다. 이것은 기원전 8000년~기원전 7000년 무렵에 형성된 도시 예리코다. 더 앞선 시기의 도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예리코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시라는 영예를 얻었지만, 당시에는 분명히 이런 도시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의 나일 강변에서도 독자적인 문명이 발생했다. 나일 강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과 다른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일 강 하구 유역에는 특별한 지형적 굴곡이 없어 걸핏하면 강물이 범람했던 것이다. 일단 그 결과는 홍수였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은 재해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상류로부터 내려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나일 강 삼각주의 토양이 비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치수는 중요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이 지역의 지배자들은 오히려 적당한 시기에 강물이 범람해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니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년경~425년경)가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른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그가 이집트에 간 때는 이집트 문명이 발생한 지 2000여 년이 지났을 무렵이니까, 지금 우리가 고대 그리스를 바라보는 것처럼 이집트를 보았을 것이다).
자연의 혜택으로 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처럼 고원 시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문명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었다. 나일 강변을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농경 촌락은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작은 촌락들이 뭉쳐 큰 세력권을 이루었고, 이내 이들끼리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촌락이 도시로 변하는 과정이 메소포타미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머잖아 통일을 이룰 것은 필연이다. 과연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은 나일 강 유역의 촌락들은 결국 두 개의 지역적 통합체를 이루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남쪽 상류의 것을 상왕국, 북쪽 하류의 것을 하왕국이라고 이름 지었다.
▲ 나일 강의 선물 이집트 귀족의 묘에서 발굴된 벽화인데, 가축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농부들에게 천연비료나 다름없었다.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해 토지가 비옥해졌을 뿐 아니라 불어난 강물은 중요한 용수원이 되었다.
이렇게 한동안 두 왕국이 병존하는 시대가 이어졌으나 서로의 세력권이 넓어지자 최종적 통일이 불가피했다. 기원전 3100년경 상왕국의 메네스 왕이 하왕국을 정복하면서 드디어 통일 이집트 왕국이 성립했다.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처럼 사방이 트여 있지 않고 나일 강 양편으로 폭이 평균 5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지형이었기에 (서쪽과 남쪽은 불모의 땅이고, 북쪽과 동쪽은 지중해와 홍해가 가로막고 있다) 통일 왕국의 성립이 빠를 수 있었다(당시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이 아니라 이민족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른바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이집트의 연대가 가장 분명하게 밝혀져 있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통일 시기 이집트의 역사는 역사라기보다 전설에 가깝다. 이집트의 역사가 비교적 확실해지는 것은 제3왕조부터다. 이때부터 이집트의 역사는 보통 고왕국 시대(기원전 26세기~기원전 22세기, 제4~8왕조), 중왕국 시대(기원전 20세기∼기원전 17세기, 제12~14왕조), 신왕국 시대(기원전 16세기~기원전 11세기, 제18~20왕조)로 나누고, 고왕국과 중왕국, 중왕국과 신왕국 사이 두 차례의 이민족 지배기를 각각 제1중간기(기원전 22세기~기원전 20세기, 제9~11 왕조)와 제2중간기(기원전 17세기~기원전 16세기, 제15~17왕조)로 구분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신왕국 시대 이후의 이집트는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위용을 잃어버리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결국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다.
메네스 왕의 통일에서부터 이집트 왕국이 멸망해 로마의 속주가 되는 기원전 30년까지 치면, 이집트 왕국은 무려 30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따라서 이것만 해도 몇 권의 책으로 엮어야 마땅하겠지만, 그것은 이집트의 ‘국사(國史)’에 맡기고 여기서는 이집트 문명권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 어울려 오리엔트 문명을 형성하는 측면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 이집트의 통일 첫 왕조시대의 무덤에서 발굴된 매장판이다. 이 판 가운데를 보면 상왕국의 왕이 하왕국의 병사를 몽둥이로 때리려 하고 있다. 상왕국은 흰색 왕관, 하왕국은 붉은색 왕관을 상징으로 삼았으니까, 이 왕이 쓰고 있는 고깔 모양의 관은 원래 흰색이었을 것이다(고대 이집트의 상류층에서는 가발을 쓰고, 그 위에 고깔을 덧쓰는 게 유행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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