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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1부,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1부,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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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3000년 동안 수십 개의 왕조가 등장하고 퇴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결코 단일한 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편의상 그것들을 뭉뚱그려 이집트 왕국이라고 부르고 각 왕조에 일련번호를 매겨 구분하지만, 각각의 왕조는 사실상 별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고대 삼국과 고려, 조선을 한반도 왕국이라고 통칭할 수 있을까?). 당시 이집트인들은 단일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진행한 게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이 곧 천하였듯이, 이집트인들에게 이집트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 전체였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천하의 주인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였다. 반면 이집트인들의 천자는 바로 파라오였다. 사실 파라오는 천자보다 시기적으로 1500년 이상 앞서므로 파라오를 천자에 비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천자를 중국의 파라오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가 천자보다 앞서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천자가 하늘의 아들이라면 파라오는 하늘 자체다. 즉 파라오는 지상에 존재하는 신이다. 파라오는 원래 커다란 집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집이란 곧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고대 이집트 세계는 파라오라는 절대 권력자가 지배하는 제정일치의 강력한 전제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를 제국 체제로 보기도 하는데, 사실은 제국이라기보다 신국(神國)에 가깝다. 로마나 중국 등 후대의 제국들과는 달리 이집트는 속국들을 거느리지 않았으므로 제국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기도 하지만, 이집트의 파라오는 종교적 신앙에서 나오는 신적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다제정일치의 성격과 절대 권력의 강도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이집트중국로마의 순서다.

 

 

그런 파라오의 권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조물인 피라미드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이 10년 동안 일해서 한 개를 만들 수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고왕국의 수도인 멤피스 부근에는 여러 개의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큰 기자의 대피라미드(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제4왕조시대인 기원전 2500년대에 만들어졌다. 파라오의 권위는 아주 일찍부터 확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피라미드는 축조될 당시부터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후대의 피라미드들은 곳곳에 경고문을 새기고 왕의 시신을 감추는 등 도굴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현대인들처럼 이집트 말기 동부 지중해를 장악한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집트 관광을 즐겼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대부분의 피라미드들이 완전히 도굴되어 있었다. 20세기에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바위 깊숙이 파놓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헤로도토스는 이집트가 피라미드 건축 때문에 국력을 탕진해서 멸망했다고 기록했지만, 오늘날에는 나일 강의 범람으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피라미드 건축 사업을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피라미드 건축은 고대 이집트의 뉴딜 정책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신적인 존재라 해도 파라오는 지배자로 군림했을 뿐이고, 국가 행정의 실무는 관료 조직이 맡았다. 이집트 관리들은 상형문자를 이용해 파피루스에 기록을 남겼는데, 오늘날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전해지는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 사회는 이미 관료와 귀족, 기술자, 상인 등의 계층 구분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나일 강을 다스려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수학과 토목학, 천문학 등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다. 1년을 12개월, 365일로 나누는 태양력을 최초로 사용한 것도 이집트이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집트 문자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것이다.

 

고왕국 시대는 관개농업이 위주였고, 약간의 국제무역이 행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주변과 관계를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시대였다. 그러나 발전은 팽창을 낳는 법이다. 내적 성장이 어느 정도에 달하자 이집트는 점차 변경 지대에 대한 정복 사업의 횟수를 늘려갔다. 그런데 이집트의 주요한 변경인 서북쪽 너머 비옥한 초승달의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문명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두 문명의 만남은 불가피했다.

 

 

오리엔트 세계 서양 문명의 씨앗을 낳은 오리엔트 일대의 지도다. 초기 문명권은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비옥한 초승달의 형상으로 발전했다. 소아시아 동부 지중해 연안의 시리아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크레타 문명의 중간에 있어 영향을 받았다.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이집트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사방이 탁 트인 지역이다. 그러므로 문명의 씨앗도 한 곳에만 치중되지 않고 여러 군데에 골고루 퍼져나갔다. 아나톨리아의 고원에서 내려온 민족의 후예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인 아카드와 하류인 수메르 지역에 터를 잡고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을 세웠으나 그들 이외에도 이 일대에서는 문명의 빛이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라비아 사막 출신의 셈족 유목민들은 몇 차례의 민족이동으로 사막 지대를 벗어나 서쪽과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지중해 동부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고대 문명을 열었고, 기원전 8000년경~기원전 7000년경 지금의 요르단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시로 기록되는 예리코(ericho, 구약성서에는 여리고라고 나온다)를 건설했다현전하는 도시 유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의미일 뿐 실제로 최초의 도시인지는 알 수 없다. 또 북쪽으로 간 셈족은 고원 사람들과 어울려 기원전 25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카드와 수메르의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은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면서 지구라트를 건축하고 점토판 문서와 설형문자지구라트는 신전 한가운데 쌓아올렸던 탑인데, 후대의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에 맞먹을 만큼 대규모였다. 그러나 석재가 많았던 이집트에 비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건축재로 쓸 만한 돌이 없었다. 그래서 지구라트는 진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adobe)로 지었다. 바벨탑의 전설을 낳을 정도로 대규모였던 지구라트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진흙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집트처럼 파피루스가 자라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갈대펜으로 점토판을 긁어 설형문자를 기록했다. 이 지역에서 발명된 알파벳 문자가 훗날 유럽에 전해졌는데, 오늘날 알파벳 기호들이 대부분 세로 방향의 쐐기 모양을 취하는 것은 설형문자의 흔적이다를 사용하는 등 이집트에 못지않은 화려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집트의 통일보다는 1000년 가까이 뒤지지만, 메소포타미아에도 이내 통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원전 2350년경 셈족 출신의 사르곤 1‘1라는 말이 붙은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후대의 사르곤 2세와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사르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사르곤 2세는 한참 후인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왕으로, 사르곤 1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물론 사르곤 2세 역시 당대에는 그냥 사르곤이었다). 나중에 중세 부분에서 특히 많이 나오겠지만, 서양의 역사에서는 왕명이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데, 그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다는 수메르와 아카드 일대를 통일하고 아카드 왕조를 열었다. 이어 그는 서쪽의 시리아와 동쪽의 엘람(오늘날 이란의 서부 고원지대)까지 정복하고 대제국을 이루어 사계(四界, 천하)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근대의 에스파냐와 영국을 가리키는 말로 썼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이미 까마득한 고대에도 있었던 것이다(기록에 따르면, 사르곤은 하층민 출신으로서 새들의 안식처까지 파괴했다.”라는 무자비한 군주였다). 그러나 때 이른 정복 군주의 위용은 오래가지 못했다.

 

 

피라미드와 지구라트 왼쪽은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이고, 오른쪽은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지구라트다(지구라트의 아래 부분은 현대에 복원된 것이다). 둘 다 고대 세계의 웅장한 건축물이지만 환경이 달랐으므로 재료도 달랐다. 피라미드는 단단한 돌로 쌓은 반면, 지구라트는 진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 즉 어도비로 쌓았다.

 

 

절대군주 사르곤이 죽자 메소포타미아는 정치적 혼란을 맞았다. 이후 우르의 수메르 왕조가 패권을 장악하면서 잠시 안정을 되찾지만,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인이 아니었다. 기원전 20세기를 넘기면서 우르 왕조가 무너지자 다시 이 일대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게 된다이것을 계기로 수메르 문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아카드 문명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 수메르 문화가 실전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이집트에서도 대규모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영토가 넓으면 지배자의 권력이 강화되지만, 한도를 넘으면 오히려 지배자의 지위가 흔들리게 마련이다.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이집트의 강역이 넓어지면서 파라오의 신권도 바닥을 드러냈다. 단일한 지배 권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자 파라오는 귀족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그들의 충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봉건제가 성립했다봉건제는 중국이나 서양의 중세에만 있었던 특유한 제도가 아니라 여건이 맞으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제도다. 말하자면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다. 봉건제의 취약점은 중앙집권이 약화되는 데 있다. 원래 이집트는 정치만이 아니라 모든 경제활동도 파라오의 통제 아래 있었으나 중앙 권력이 약해지자 변방에서 권력을 장악한 귀족들이 점차 정치적·경제적으로 자립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기원전 22세기 무렵부터 약 200년간 분열기를 맞는데, 이것이 제1중간기다.

 

이 분열기를 수습한 사람은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였다. 그는 수도를 남쪽의 테베로 옮기고 다시금 왕권을 안정시켜 중왕국을 열었다. 초승달의 양 끝을 이루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접촉을 시작한 것은 중왕국 시대부터다. 사실 메네스의 통일이 있기 전인 기원전 3300년경에 이집트는 셈족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정복해 군사력의 우위를 입증한 바 있었다.

 

고왕국이 무너진 뒤 오랜 분열기의 혼란에 염증을 느낀 이집트인들은 평화와 안정을 희구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가 이집트 하나만 있다면 몰라도 주변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국제 정세에서 안정이란 자칫 퇴보를 의미할 수 있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메소포타미아에 뒤질 게 없었지만 불행히도 이집트는 군사력에서 진전이 없었다. 한 가지 예로, 그들은 바퀴를 만들 줄 알면서도 전차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개미들이 바글거리는 세상에서 베짱이의 운명은 뻔하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1700년경부터 시리아에 터전을 잡고 있던 힉소스인들이 난생처음 보는 전차를 앞세우고 침공해오자 제대로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힉소스인들은 낯선 땅에 온 것이지만, 시리아의 척박한 산지보다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 테베까지 점령해 이집트를 완전히 정복한 힉소스의 왕 셈켄은 마침내 이집트의 왕위에 올라 최초의 이민족 파라오가 된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기가 이집트 역사의 제2중간기다.

 

 

발상의 차이 이집트인들은 바퀴를 알았으나 그것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에서처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일찌감치 바퀴를 가지고 전차를 만들어 전쟁에서 주무기로 사용했다. 이집트는 힉소스의 지배를 받은 다음에야 바퀴를 군사용으로이용할 줄 알게 된다.

 

 

 최초의 국제사회

 

 

힉소스가 이집트를 공략하려고 준비하던 무렵, 그때까지 혼란과 분열을 겪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서서히 안정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수메르의 우르 왕조가 쇠퇴하자 서쪽의 아모리인들이 그들 세력을 대신했다. 아카드와 수메르의 중간 지점인 바빌론(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을 중심으로 흥기한 이들은 점차 세력을 키워 메소포타미아 고대사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나라로 기록되는 바빌로니아를 세웠다기원전 7세기에 등장하는 신바빌로니아와 구분해 이때의 바빌로니아를 고()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불과 수십 년밖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 고바빌로니아가 후대에까지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바빌론의 슈퍼스타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기원전 1750)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 그의 이름이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역사에는 법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 함무라비의 업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바빌론과 패권을 다투던 도시들인 이신과 라르사를 차례로 물리치고 사르곤 이래 600년 만에 다시금 시리아에서 엘람에 이르는 커다

란 통일 제국을 수립했다. 이때부터 바빌론은 오리엔트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아카드어는 오리엔트 세계의 국제 공용어가 되었다. 그 밖에 함무라비는 달력을 만들고 운하를 건설하고 관료제를 정비하는 등 내치에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당시 도시마다 받들던 여러 신을 정리하고 신흥 신이던 마르두크를 최고신으로 정함으로써 지상의 질서만이 아니라 천상의 질서마저도 안정시켰다.

 

그러나 사르곤이 그랬듯이, 걸출한 군주 개인에게 의존하는 고대적 전제 체제는 그 군주가 사라지면 체제도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다. 600년 전 사르곤이 죽자 일시에 메소포타미아의 통일이 무너졌던 것처럼, 함무라비가 죽자 바빌로니아는 급격히 쇠퇴했다. 물론 주변 상황은 600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비옥한 초승달은 크게 부풀어 보름달이 되었고, 이제는 서남아시아 전체가 문명의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로니아라는 강력한 힘의 중심이 무너진 것은 오히려 수많은 대권 후보가 약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오리엔트 국제 질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새겨진 조각이다.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에게서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를 받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조항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판결에 적용된 게 아니라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용된 법전이므로 오늘날의 법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우선 주목할 것은 이집트의 환골탈태다. 이집트인들은 약 100년간의 이민족 지배를 받으며 크게 각성했다. 힘이 있어야 평화와 안정을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힉소스의 군대에서 전차의 위력을 눈여겨본 이집트인들은 전차와 이중굴곡의 활을 비롯해 첨단의 신무기들을 적극 도입했다. 어차피 희소스는 군사력에서만 앞선 야만족일 뿐 국가의 운영이나 문화의 측면에서 찬란한 역사를 가진 이집트와는 도저히 견줄 수 없었다. 이렇게 단점을 보강하고 나니 두려울 게 없었다. 테베의 왕 아모세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기원전 1580년에 마침내 힉소스를 이집트 땅에서 쫓아내고 신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100년 동안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다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아모세는 힉소스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귀족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영토를 몰수해 중앙집권을 도모했다. 또한 지긋지긋한 식민지 경험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이집트를 군사 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집트답지 않게 역사상 처음으로 상비군이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으려고 군사력을 키웠어도 막상 군사 강국이 되고 나면 남는 힘을 놀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기원전 15세기 말에 아멘호테프 1세는 남쪽의 누비아와 서쪽의 리비아를 정복해 후방을 다진 다음 숙원인 북벌에 나섰다. 시나이 반도는 진작부터 이집트의 영향권이었으니 무사통과다. 계속해서 이집트군은 시리아를 거쳐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진출했다.

 

드디어 초승달 양편의 두 고대 문명은 처음으로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이미 바빌로니아가 무너진 이후부터 복잡한 국제 질서를 이루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무대에 이집트가 가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오리엔트 국제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환골탈태한 이집트 이집트의 공성을 방어하는 병사들, 리비아나 누비아의 성일 것이다. 힉소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선진 문명을 지키는 데도 물리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은 이집트는 이렇게 정복 국가로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아리아인의 등장

 

 

오리엔트 세계가 산고를 치를 무렵,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세력 판도에는 새로운 변화가 발생했다. 인도·유럽어족의 국가들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원래 민족 구분은 혈통이 아니라 언어를 기준으로 한다(최근 유전학의 발달로 고대 민족들의 혈통을 추적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충분치 않다). 그러므로 셈족과 인도유럽어족이라는 명칭은 언어의 계통 분류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하위 구분으로 고대사에 등장하는 여러 민족 이름들은 대부분 지역의 이름에서 나온 것들이다. 당시 이 일대의 여러 나라는 특별히 동질적인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는 셈족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판도에 느닷없이 등장한 인도ㆍ유럽어족은 과연 어디서 온 걸까?

 

그 해답은 인도의 초기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3000년경 찬란한 인더스 문명을 이루었던 인도의 원주민 드라비다족은 기원전 16세기부터 북쪽에서 철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부족의 침략을 받아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정복당했다. 그들은 바로 중앙아시아를 고향으로 하는 유목민족인 인도ㆍ유럽어족의 아리아인이었다.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7세기부터 아리아인들은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이 발전함으로써 태고 때부터의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민족대이동을 시작했다. 북쪽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추운 곳이었고, 동쪽은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갈 곳은 남쪽과 서쪽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간 일파는 인도를 정복하고 그대로 눌러앉았다(종횡무진 동양사, 66~68쪽 참조). 반면 서쪽으로 길을 잡은 무리는 예상보다 훨씬 멀리까지 가야 했다. 남서쪽은 강력한 오리엔트 문명권이 태동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 이래 쇠퇴를 거듭한 인도의 드라비다족에 비하면 셈족 문화권은 아리아인으로서 범접할 수 없는 선진 문화였다. 서쪽으로 간 아리아인은 소아시아를 거쳐 멀리 유럽 중심부에까지 이르렀다. 원래 중앙아시아 출신인 아리아인을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훗날 유럽 고대사에 등장하는 게르만족도 이들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아리아인의 이동은 계획된 게 아니었고, 계획할 만한 지배 세력도 없었다. 그러므로 일사불란하게 이동한 게 아니라 그저 수백년에 걸쳐 되는 대로 이동했을 뿐이다. 이동하는 도중에 부족이나 가족 단위로 대열에서 이탈해 여기저기에 눌러앉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폭은 좁지만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소아시아 서쪽에 이르렀을 때는 이탈하는 규모가 더욱 크지 않았을까? 아리아인은 소아시아에서 여러 부족이 이동에서 뭉텅이로 빠져나가고 나머지가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갔을 것이다.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고원이라면 맨 처음에 등장한 산 사람들의 고향이 아닌가? 그러나 알맹이가 빠져나간 문명의 고향은 이제 아무런 힘이 없었다. 기원전 17세기 무렵 아리아인은 아직까지 고원지대에 남아 있던 부족들을 손쉽게 정복하고 국가를 이루어 남쪽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출했다.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이집트 신왕국의 도전에 맞선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기원전 16세기~기원전 15세기경 아리아인의 후예답게 사납고 호전적인 후르리인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미탄니라는 국가를 세웠다. 미탄니는 군사력이 강한 나라였으나 당시 단일국가로서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이집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더욱이 미탄니의 걱정거리는 이집트의 침공보다 오히려 북쪽 소아시아에서 더욱 강성한 국가로 성장한 히타이트였다아리아인의 후예답게 히타이트는 오리엔트에서 가장 먼저 철기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히타이트는 그 방법을 비밀로하고 다른 나라에 전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오리엔트에서 철기 사용이 일반화되는 것은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난 기원전 12세기부터의 일이다. 히타이트에 관해서는 20세기에 수도였던 보아즈쾨이가 발굴되면서 그 역사가 상세히 알려졌다. 미탄니는 등 뒤의 히타이트를 견제하기 위해 눈앞의 이집트와 굴욕적인 타협을 맺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미탄니는 쇠퇴를 거듭해 결국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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