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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1부 씨앗 - 3장 새로운 판 짜기,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1부 씨앗 - 3장 새로운 판 짜기,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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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몰락하는 자가 있다면 흥기하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쇠퇴는 오리엔트 세계에 힘의 진공 상태를 빚었다. 특히 히타이트의 붕괴는 그들만이 보유하고 있던 제철 기술을 오리엔트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켜 본격적인 철기 문명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때마침 제3세력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동부를 장악한 카시트도 기원전 13세기에 엘람과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상태였다. 상위 랭커들이 몰락하는 것은 하위 랭커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틈타 흥기한 세력은 누굴까?

 

비옥한 초승달이 부풀기 시작하던 무렵, 지중해 동부 연안에도 문명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이지역에는 우가리트, 티로스(티레), 시돈, 비블로스, 베리토스 등 여러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이들은 비록 정치적인 통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일종의 도시 연맹체를 이루어 일찍부터 동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에 나섰는데, 이들을 총칭해 페니키아라고 부른다페니키아는 지역의 명칭이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페니키아인은 셈족 계열의 가나안인에 속한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는 오래전부터 혼혈이 이루어졌으므로 구분이 별 의미는 없다.

 

페니키아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집트와 무역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오리엔트 세계의 선진 문명이 지중해의 여러 섬, 특히 크레타에 전파되었다. 원래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페니키아 상인들은 오늘날 서구 문명을 낳은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범한 산파가 아니었다. 산파라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페니키아 산파는 그 아이에게 중요한 선물까지 주었다. 바로 서구문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알파벳을 발명해 유럽에 전한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상의 필요 때문에 장부 기재용으로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본떠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리스에 전해져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쌍웅 체제가 오리엔트 일대를 지배할 때도 페니키아는 그들에 복속되지 않았다(물론 어느 하나로 통일되었더라면 그 휘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이유는 페니키아가 오리엔트의 대권 주자를 선택하거나 지지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말하자면 너무 약했기 때문에 강대국에정복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역설이지만 사실이다. 페니키아는 단일한 정치적 중심을 가진 국가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강대국들이 적수로 삼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본연의 경제적 역할에 충실한 편이 강대국들에 더 이득이었으므로 굳이 페니키아를 제압해 지중해의 상업 활동을 위축시킬 이유는 없었다. 근대적 관점으로 보면 페니키아를 정복해 국제무역을 독점하려 할 수도 있겠지만, 고대에는 그런 발상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고래들이 싸우던 시절에 안전했던 새우는 막상 적들이 없어지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일단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무너진 뒤 페니키아 상인들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느슨한 결사체에 불과한 페니키아는 물리력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때 무역의 필요에 따라 용병을 고용하는 게 고작이었을 뿐, 무기는 물론 상비군 조직도 갖추지 않았다. 이런 판에 이집트와 히타이트를 괴롭히던 해상 민족들이 침략하자 페니키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기원전 12세기부터 페니키아는, 무역은 갈수록 활발해지면서도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처할 힘은 여전히 부족한 처지였다. 심지어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는 비극도 몇 차례 겪었다. 그런데 위기를 타개하는 페니키아인들의 방법은 엉뚱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그들은 오히려 지중해 서부까지 세력을 확장해 지중해 연안 곳곳에 식민시를 건설했다. 그들의 발길은 멀리 에스파냐에까지 미쳤는데, 로마 초기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도 기원전 9세기에 페니키아의 식민시로 출발했다. 문자에서 통상까지, 페니키아는 지중해 전역에 오리엔트 문명의 씨앗을 뿌리는 역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알파벳의 어머니 그리스의 청동판(왼쪽)과 도기에 새겨진 알파벳(오른쪽)이다.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에 전해진 초기의 문자 형태에 해당하는데, 지금의 알파벳과 큰 차이가 없다. 기원전 8세기경의 물건이므로 얼추 호메로스의 시대에 해당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 알파벳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수수께끼의 해적들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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