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뿌리②
서양 역사가 온전한 나무로 성장하려면 그리스라는 하나의 뿌리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스의 서쪽에서 생겨난 로마 문명은 지중해 세계 전체를 터전으로 삼는다. 강력한 도전자 카르타고의 산을 넘고 지중해를 한 바퀴 도는 제국 체제를 갖추면서 비로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된다. 그러나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던 북방의 게르만 민족들이 제국의 선진 문명을 이어받아 차세대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게르만족은 로마 문명을 기반으로 로마 게르만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 여기에 오리엔트의 마지막 선물인 그리스도교가 결합되면서 서양 문명은 줄기를 키워낸다.
1장 로마가 있기까지
늑대 우는 언덕에서
정상에 올랐으면 그다음에는 내려가는 게 원칙이다. 등산이나 경기 순환만이 아니라 역사도 마찬가지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명의 절정인 동시에 쇠퇴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 전쟁과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을 통해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본토를 벗어나 동부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 비록 ‘사람들이 사는 땅’을 모두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 그리스 문명은 완성되었다. 그것을 당시 또 하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지중해 서부 지역까지 포괄하는 진정한 유럽 문명의 뿌리로 키워내는 것은 그리스 문명의 몫이 아니었다. 그리스가 오리엔트 문명의 씨앗을 받아 그것을 능가하는 문명을 이루었듯이, 또 다른 청출어람(靑出於藍)이 그리스 서쪽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양 문명의 두 번째 뿌리인 로마였다.
로마가 건국된 것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의 일이다.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치고는 너무 정확한 날짜가 아닌가 싶다. 사실 그렇다. 이 연대와 날짜는 나중에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로 성장한 뒤에 정해진 것이다. 당시 여러 개의 연대와 날짜가 후보로 올랐으나 로마인들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을 공식적인 건국일로 선택했다. 실제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선택’한 것이므로 그 연대와 일자가 정확한 것일 수는 없다. 그냥 그 무렵에 테베레 강 유역 라티움의 한 언덕에서 로마가 시작되었다는 정도로 보면 된다(오늘날까지도 로마 시는 그 날짜를 공식적인 도시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연대와 날짜를 정한 마당에 건국자도 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로마의 공식 건국자는 로물루스다.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갓난아기 때 산에 버려졌다. 형제를 거두어 기른 것은 사람이 아니라 늑대였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형제는 커서 늑대무리처럼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여기서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를 세웠다. 레무스가 이겼다면 로마가 아니라 ‘레마’가 건국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로마는 늑대 우는 언덕에서 처음부터 피비린내를 풍기며 생겨났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건국신화다. 그러나 모든 건국신화는 양면적이다. 즉 사실의 일부를 말해주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사실의 일부를 은폐하는 측면도 있다. 로마의 건국신화는 무엇을 은폐하고 무엇을 드러낼까?
무릇 건국신화의 ‘속임수’는 그 이전에 아무도 살지 않았거나, 적어도 문명이 없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한다는 데 있다. 늑대가 로물루스 형제를 길렀다는 전설은 곧 그 이전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원전 753년 이전에도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문명이 있었다. 나아가 이탈리아 북쪽, 기금의 서유럽을 이루는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도 역시 여러 민족과 문명이 있었다. 다만 그것들은 결국 로마 초기 역사에 통합되므로 로마사의 일부로서 고찰할 수밖에 없다. 역사란 늘 승리가의 기록이니까.
그럼 로마의 건국신화가 말해주는 사실은 무엇일까? 바로 기원건 753년 무렵부터 로마는 당시 그 부근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부족을 물리치고 ‘동네의 패자’로 우뚝 섰다는 사실이다. 로물루스가 골육상잔의 비극을 통해 로마를 세웠다는 신화는 그 다툼의 과정을 압축한 것일 터이다.
어쨌든 로마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 로마는 ‘지역 유지’로서 첫발을 내디딘 정도일 뿐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명함을 내밀 만한 처지는 못 되었다.
▲ 건국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 젖을 먹고 있는 모습을 담은 기원전 5세기의 청동상이다. 로마의 건국자가 늑대의 것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는 여느 건국신화가 그렇듯이 로마가 독자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는 달리 이 청동상은 에트루리아의 기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에트루리아가 초기 로마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여러 민족과 문명이 공존하던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다. 반도의 중부에는 에트루리아가 있었고, 남부와 시칠리아에는 옛 그리스의 상인들이 건설한 식민시들인 마그나그라이키아 Magna Groecia(‘큰 그리스’)가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성장하는 드라마에서 훌륭한 조연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마그나그라이키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쇠퇴기를 맞은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발달했다. 말이 그리스 식민시일 뿐 사실은 이탈리아로 옮겨온 그리스 문명인 셈이었다. 따라서 마그나그라이키아는 그리스 본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장점은 지중해 무역을 통한 경제 번영과 선진 문명의 발전이고, 단점은 폴리스들 간의 분열과 다툼이다. 그래서 마그나그라이키아는 로마의 성장에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선진 문명을 전해주었으면서도 자체 통일을 이루지 못해 로마에 정치적인 위협은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만약 마그나그라이키아가 통일을 이루고 이탈리아 반도 정복에 나섰더라면 이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중부의 또 다른 세력인 에트루리아 역시 로마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상당한 수준의 자체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인은 로마 북부, 지금의 토스카나 일대에 여러 개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초기 로마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다만 정치적으로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고 도시국가들 간의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한 정도였다. 로마는 바로 이 빈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에트루리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 로마의 형성에서 에트루리아의 관습과 제도, 문명은 로마에 풍부한 자양분으로 기능했다【에트루리아 문명은 당시의 세력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문헌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유적과 미술품 등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로마 측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정치적 지배를 무척 혐오한 듯한데, 그래서 에트루리아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원도 미스터리다.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소아시아에서 왔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기원전 1000년 무렵에 그리스로 남하한 도리스인과 같은 계열, 아리아인의 후예일 것이다. 인도에서 그리스까지 고대의 세계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아리아인의 민족이동은 이렇게 이탈리아와도 연관된다】.
마그나그라이키아와 에트루리아, 두 조연의 충실한 도움에 힘입어 로마는 점차 이탈리아 중부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기원전 6세기 말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독재자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독자적인 발전의 토대를 갖추었다. 폭정을 일삼았던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로마의 정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로마인들은 왕정을 지극히 혐오하게 되었고, 공화정을 정치제도로 채택했기 때문이다(이후 로마는 기원전 1세기에 제정이 성립하기 전까지 공화정 체제를 유지한다). 물론 그것은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과는 큰 차이가 있고, 엄밀히 말하면 공화정이라기보다 과두정 혹은 귀족정의 성격이 강하다. 당시 로마에는 씨족을 바탕으로 한 귀족 가문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과두정을 이룬 것도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과두정이 전부였다면 로마의 공화정은 후대에 그렇게 큰 역사적 의미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공화정은 단순히 왕정에 대비되는 의미를 가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공화정의 시동은 귀족들이 걸었으나, 실제로 공화정을 밀고 나간 것은 바로 평민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 까마득한 고대에 평민들이 주도하는 진보적인 공화정이 성립할 수 있었던 걸까【로마의 공화정은 앞서 본 그리스의 민주주의처럼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후진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리엔트와 중국의 역사에서 보듯이, 고대사회에서는 확실한 왕정이나 제정이 ‘어설픈’ 공화정이나 민주정보다 발달한 정치제도였다. 결국 기원전 1세기에 로마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게 되는 사실이 그 점을 반증한다. 그러나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의 경험은 이후 서양의 역사를 동양처럼 중앙집권화에 기초한 ‘제국의 질서’가 아닌 분권화에 기초한 ‘계약의 질서’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렇게 보면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가 과연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권력을 스스로 내줄 바보는 없다. 평민들의 정치적 힘이 커진 것은 그들이 주도한 치열한 신분 투쟁의 결과였다.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공화정, 특히 기원전 6세기 초 솔론의 개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물론 로마인들은 마그나그라이키아를 통해 그리스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지만, 대표들을 뽑아 아테네의 정치를 직접 참관하게 할 정도로 정치 개혁에 큰 의욕을 보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솔론의 개혁은 평민층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혁의 일부가 로마에 도입되자 로마 평민층은 귀족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발언권이 강해졌다.
▲ 로마 병사의 무장 투구 갑옷, 창 등 무장을 제대로 갖추려면 돈이 많이 들었으므로 처음에는 경제력이 있는 귀족들이나 병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기원전 6세기경부터 평민들도 로마의 병사가 되기 시작한다.
평민들의 총파업
로마 초기 공화정은 귀족들이 주도한 과두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리스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솔론의 개혁도 귀족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한 폐단에서 생겨났듯이, 로마에서도 귀족들이 토지와 각종 특권을 차지하고 평민들은 철저히 소외된 게 문제였다(로마의 또 다른 신분으로는 노예가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전쟁 포로들이었다).
귀족들은 원로원【원로원은 라틴어로 세나투스(senatus), 영어로는 senate라고 쓰는데, 양원제를 취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나중에 보겠지만 서구 근대에 양원제가 성립한 것은 시민계급이 성장해 신분제가 약화되면서 의회가 둘로 나뉘어 귀족들이 상원을 구성하고 시민 대표들이 하원을 구성한 데 기인한다(432~433쪽 참조). 로마 원로원 역시 귀족들의 기구였으므로 그 말을 그대로 상원의 뜻으로 쓴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느낌이 달라지지만, 원로원과 상원이 원래 같은 용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을 구성해 과두정을 공식화했고, 귀족들 중에서 다수의 정무관(magistratus, 원로원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운영위원)과 두 명의 집정관(consul, 행정 총책임자로서 정무관 중에서 뽑는다)을 임명해 정치를 맡겼다. 왕정을 지극히 혐오하던 귀족들이었으므로 정무관과 집정관은 철저히 임기제로 운영해 독재를 막았다. 국가 비상사태에는 집정관이
일시적으로 독재관(dictator)이 되어 전권을 장악했지만 그 기간도 6개월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민회가 있었지만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은 집정관에게 있었으므로 평민들의 정치적 발언로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귀족들에 비해 로마의 평민들은 성격이 단일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평민들 중 일부는 귀족들과 피호 관계(clientela)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귀족을 보호자로 삼고 신의와 의무에 바탕을 둔 도덕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일반 평민과는 달리 귀족의 편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이런 전통이 후일 중세 시대에 영주-기사의 계약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을 제외한 ‘평민다운 평민’은 도시 장인, 자유로운 농민, 부유한 상인, 가난한 이주민 등이었는데, 이들 역시 이해관계가 각기 달라 행동을 통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본가에 비해 노동자의 행동 통일이 더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 강해질수록 내부의 통일은 더 쉬워지는 법이다. 사실 기원전 5세기 초 로마의 상황은 솔론의 개혁이 실시된 80여 년 전의 아테네보다는 드라콘의 법전이 생겨날 무렵인 200여 년 전 아테네와 비슷했다. 평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은 정치적 발언권에 앞서 법 체계였기 때문이다. 명문화된 법전이 없었으므로 모든 법은 관습법이었고, 그러므로 귀족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평민들은 법전을 만들라는 요구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기원전 494년 그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저항운동을 구사한다. 바로 ‘철수’다. 로마의 평민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로마 시를 빠져나가는, 문자 그대로의 철수를 단행했다. 철수라면 파업에 비해 뭔가 소극적인 저항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철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시민 총파업’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기술자, 농민, 상인 등이 전부 파업에 동참하면 나라 전체가 즉각 마비될 것이다. 따라서 철수는 가장 적극적인 투쟁 방식이었다. 더구나 로마 시를 나온 평민들은 성스러운 언덕에 모여 있었으므로 정부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해서 해산할 수도 없었다. 하기야, 억지로 진압하려 해도 안 되었을 것이다. 병사도 대부분이 평민이었으니까.
투쟁의 대가는 아주 컸다. 평민들은 철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조직인 평민회와 평민의 대변인인 호민관(tribunus)이라는 관직을 얻어냈다. 특히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했다. 호민관은 평민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행정·사법·군사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력과 발언권을 누렸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은 바로 그들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에서는 드라콘이라는 귀족이 법전을 만들어 베푸는 식이었으나 로마에서는 평민들이 투쟁한 결과로 법전을 얻어낸 것이다.
드라콘의 법전이 아테네의 아고라에 공시되었듯이, 기원전 451년에 12표법은 청동판으로 만들어져서 로마 광장에 공시되었다. 그 힘은 드라콘의 법전보다 더욱 강했다. 당시 로마의 청소년들은 12표법의 조항들을 외우고 다녔고, 일부 조항들은 이후 비잔티움 시대까지도 적용되었다(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12표법의 조항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 법전의 내용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소송, 가족, 상거래 등 당시 생활상의 필요와 관련된 사항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문법전이 마련됨으로써 귀족들의 주먹구구식 법 적용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런 진보의 속도가 지속되었더라면 로마의 공화정은 얼마 안 가 근대적인 공화정과 비슷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민들이 주도하는 거센 신분 투쟁의 고삐가 늦추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왔다. 그것은 바로 로마 전체의 존폐와 관련된 중대한 위협, 로마인들로서는 최초로 겪는 대규모의 외침(外侵)이었다. 위기를 맞은 로마에 다행스런 점은 신분 투쟁의 결과로 군대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었다. 로마의 평민들은 그리스로부터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을 도입하고 상비군적 성격을 가지는 시민군을 구성했다. 갓 태어나 이제 막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로마를 위기에 빠뜨린 외부의 적은 누구였을까?
고난 끝의 통일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은 로마만이 아니었고 이탈리아만도 아니었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벗어난 기원전 5세기 무렵만 해도 로마에는 아직 경쟁자들이 많았다. 신생국 로마로서 가장 효과적인 대처 방식은 주변 민족들과 타협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이웃 라티움인들과 라티움 동맹을 맺고 최초의 지역 통합을 이루었다. 이 동맹은 로마인과 라티움인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맺은 최초의 평화조약이자 불가침조약이자 상호보호조약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로마의 대외 관계가 나아갈 기본 방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훗날 정복 국가로 알려지게 되는 로마였으나 출발 무렵에는 이렇게 평화조약을 외교 노선으로 삼았다.
평등한 조약으로 출발한 라티움 동맹 내에서 로마는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라티움 동맹은 같은 처지의 고만고만한 아이들끼리 맺은 의리 관계와 비슷했으므로 바깥에서 제법 몸집이 큰 아이가 공격해오면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기원전 390년 로마를 공격한 갈리아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예전에도 갈리아인들은 반도 북부의 포 강 유역까지 자주 침범했으나 보통은 국지적인 약탈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라티움 동맹으로 중부에서 제법 발언권을 얻은 로마가 그것마저 방어하려 하자 갈리아인은 로마의 기세를 꺾고자 했다.
갈리아가 침공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는 서둘러 군대를 꾸려 로마 북부의 알리아에서 맞섰다. 에트루리아를 물리치고 동맹을 주도한 로마로서는 최초의 본격적인 국제전인 만큼 긴장도 되었겠지만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한여름의 전투에서 로마는 갈리아의 켈트 전사들에게 대패했다. 도시는 철저히 유린되고 약탈과 방화가 잇달았다. 로마 광장의 12표법 청동판도 이때 불타 없어졌다(현재 전해지는 12표법의 내용은 나중에 재구성된 것이다)【갈리아는 로마를 최초로 정복한 이민족이었고, 이후 로마는 410년 서고트족에게 함락당하기까지 800년 동안 한 번도 이민족의 정복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태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참극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갈리아는 로마의 철천지원수가 되었으며, 나중에 이를 잊지 못한 로마의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대한 철저한 복수에 나서게 된다】.
로마를 위해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갈리아가 로마를 지배하기로 마음먹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3년에 걸쳐 로마를 마음껏 유린한 뒤 갈리아는 로마를 직접 영토로 삼느니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그 덕분에 로마는 자칫하면 역사에 명패도 올리지 못한 채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당시 로마의 사정은 기원전 3세기 말 중국 한 제국의 사정과 비슷한 데가 있다(로마와 한은 각기 서양과 동양의 고대적 기틀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위상이 비슷하다). 한은 건국 초기에 북방의 흉노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 로마가 갈리아에 내준 배상금은 한의 조공에 해당한다. 로마는 갈리아를 야만족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는데, 한으로서도 역시 흉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스의 ‘야만족’은 언어와 습속이 다르다는 뜻이 강했으나 로마의 ‘야만족’은 오늘날과 비슷한 의미였고 중국으로 치면 오랑캐에 해당한다(한은 흉노를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 ‘야만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로마보다 중국이 약간 빨랐다. 한은 기원전 2세기 중반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며, 로마는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벌에 성공한다】.
▲ 전우의 시신을 넘고 넘어 그리스와 달리 주변 민족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했던 로마는 일찌감치 군사적 측면이 강조된 정복 국가로 출범했다. 그러나 갈리아는 초기 로마가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기원전 4세기, 갈리아가 로마를 침공해왔을 무렵에 제작된 이 청동상은 로마 병사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전우의 시신을 나르는 모습이다.
그러나 로마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갈리아에 치욕을 당하는 꼴을 본 라티움 동맹의 도시들은 로마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었다. 특히 캄파니아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삼니움인들은 기원전 350년 별도로 삼니움 동맹을 맺고 로마와 라티움 동맹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로마는 아직도 같은 체급에서는 챔피언이었다. 삼니움인들은 비록 전투에 능하고 기질이 억센 산악 민족이었으나 그리스에서 도입한 로마의 선진적 밀집대형 전술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산업 중심지인 카푸아와 비옥한 곡창지대인 캄파니아, 그리고 중요한 무역항 네아폴리스(나폴리)를 얻는 ‘횡재’를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로마가 전리품을 독차지하자 동맹시들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평화조약으로 출범한 라티움 동맹의 틀을 깨지 않기 위해 동맹시들은 우선 점잖게 재분배를 요구했다. 그러나 제 코가 석 자인 로마가 그 요구를 수용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전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340년에 로마는 또다시 동맹시들의 연합군을 맞아 3년 동안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로마의 힘은 이제 과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2년이 지나자 전쟁 수행 능력을 잃은 동맹시들은 로마에 강화를 제안했다. 사실상의 항복인 셈이었다. 정치적 지도력을 확고히 한 로마 앞에는 다시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로마가 선택한 메뉴는 세 가지였다. 첫째, 적극 협력하는 도시들에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 둘째, 끈질기게 저항하는 도시들은 요새를 파괴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추방한다. 셋째, 이도 저도 아닌 중립 도시들에는 정치적 자치권만 부여한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마무리만 남았다. 아직도 완전히 복속되지 않으려 하는 삼니움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과 남쪽 끝자락의 마그나그라이키아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삼니움인들은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완강하게 버텼으나 기원전 295년에 센티눔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이때 갈리아인도 삼니움 측에 가담해 싸웠으므로 로마로서는 갈리아에 복수한 셈이다). 이제 반도 통일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냥 접수하면 될 줄 알았던 마그나그라이키아에서 예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발굽 부분에 있는 항구도시 타렌툼은 로마를 새 주인으로 맞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옛 주인인 그리스의 품을 찾았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미 동맹시들이 로마에 강화를 요청하던 해(기원전 338년)에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에 굴복한 터였다. 따라서 타렌툼의 도움 요청에 응답한 것은 그리스도, 마케도니아도 아닌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Pyrrhos, 기원전 319~기원전 272)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제2의 알렉산드로스를 꿈꾸던 야심가인 데다 평소에 타렌툼을 위대하고 부유한 도시라고 여기던 그이니, 타렌툼의 요청은 그에게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격이었다. 그는 원래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려 했으나, 이참에 목표를 서쪽으로 돌려 이탈리아 전체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피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용병과 마케도니아 연합군은 스무 마리의 코끼리와 함께 타렌툼이 깔아놓은 레드카펫으로 왔다. 이탈리아 내의 여러 작은 민족만 상대해온 로마로서는 처음 맞는 헬레니즘 세계의 군대였다. 그러나 큰 싸움에서 이기면 큰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원전 275년, 양측은 베네벤툼에서 맞붙었다. 승부의 핵은 코끼리였다. 코끼리 전술이 장기인 피로스로서는 이들이 제 역할을 해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로마인이 코끼리를 보고 놀란 것 못지않게 코끼리들도 로마의 밀집대형을 보고 놀랐다. 결국 로마군의 창에 부상을 당해 미쳐버린 코끼리가 거꾸로 그리스 병사들을 짓밟아 죽이면서 피로스의 야망은 꺾였다(피로스의 고향은 오늘날 알바니아에 해당하는데, 알바니아 사람들은 피로스를 아직도 고대사의 영웅으로 존경한다). 피로스가 물러간 뒤 로마는 타렌툼을 접수해 기원전 272년에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 코끼리 접시 전에도 코끼리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겠지만, 이탈리아인들은 피로스의 코끼리 부대에서 코끼리를 처음 구경했다. 그러니 그들이 혼비백산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림은 그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접시다.
귀족정+민주정+왕정 로마 공화정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침입에서부터 통일에 이르는 전란기에도 로마 평민들의 신분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신분 투쟁이라니,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싸운 것도 바로 평민들이었으니까.
갈리아에 패배했을 때 로마는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막대한 배상금도 배상금이지만 정복 활동이 중지된 게 더 치명적이었다. 그전까지는 식민시를 건설하거나 정복으로 얻은 공유지를 분배하는 것으로 토지 없는 농민들을 달랠 수 있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토지는 갈수록 부족해졌고, 가난한 평민들은 점점 쌓여가는 부채에 시달렸다. 물론 토지와 부채의 임자인 귀족들은 난리 속에서도 끄떡없었다.
아무리 나라가 위기에 처했어도 개혁의 필요성은 명확했다. 오히려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개혁이 필수적이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빚을 얻어 살았고, 빚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에 이르면 귀족들의 노예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옛날 그리스의 사정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12표법을 낳은 기원전 5세기 중반의 상황이 드라콘 법전을 낳은 아테네의 상황에 해당한다면, 이번의 로마는 솔론의 개혁을 앞둔 아테네의 사정과 비슷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은 달랐다.
솔론의 개혁에서는 빈민들이 채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채무를 탕감해주는 정책이 나왔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자체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것이 기원전 376년의 리키니우스 법이다【비슷한 상황에서 아테네와 로마의 처방이 서로 다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개혁 주체의 문제다. 아테네는 귀족출신의 집정관인 솔론이 개혁 주체로 나선 반면, 로마는 평민들이 개혁 추진 세력이었다(드라콘의 법전도 귀족이 주체였지만 12표법은 평민들이 주체였다). 그러므로 단순히 채무를 탕감해주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정책이 나올 수 있었다. 둘째는 로마와 아테네의 성격이 다르다는 데 있다. 아테네는 농경보다 대외 무역이 중심이었으므로 토지 분배의 문제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농경 국가였으므로 토지문제가 가장 핵심이었다. 또한 로마는 대외 식민 활동 이외에 정복 활동을 하지 않았던 그리스와는 달리 정복을 통해 공유지를 분급하는 정책을 전통적으로 사용했으므로 그게 어려워지면 토지문제가 난관에 봉착할 것은 필연적이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토지 소유 상한선을 500유게라(약 1.3제곱킬로미터)로 제한했다(농지가 아닌 목초지의 경우에는 500마리의 양이나 소를 방목할 수 있는 규모를 상한선으로 정했다). 물론 모든 토지의 면적을 일일이 잴 수 있었던 것도 아닐 뿐더러 당시에도 명의 변경 같은 변칙적인 토지 소유 방법이 있었으니, 리키니우스 법이 정확하게 통용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토지 소유 상한선이 제도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귀족들의 대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귀족들은 대부분 이미 상한선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새로 정복지가 생겼을 경우에는 그 토지가 평민들에게 분급될 가능성이 컸다. 평민들이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경제적인 내용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법으로 평민들은 두 명의 집정관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집정관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다른 고위 관직들도 점차 평민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었다. 심지어 귀족들이 악착같이 사수하려 했던 신관(神官)도 결국 평민에게 개방되었다(에트루리아의 전통으로 로마의 정치에서는 마법과 주술, 점술이 중요했으며, 따라서 신관은 상당한 정치적 권한을 가졌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참정권까지 확보한 평민들에게 이제 남은 목표는 한 가지뿐이다. 얻을 것을 다 얻었으니 이제 ‘이대로 영원히’만 이루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민회의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칫하면 최고 권력을 평민들에게 넘겨줄 판이었으므로 이번에는 귀족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평민들은 다시 한 번 비장의 무기를 쓴다. 바로 철수다.
기원전 287년, 200년 만에 다시 ‘시민 총파업’을 감행한 평민들은 파업의 대가로 호르텐시우스 법을 얻어냈다. 이 법으로 이제 평민회의 결정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법으로 시행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평민회는 정식 입법기관이 된 것이다. 호르텐시우스 법은 기원전 494년 첫 번째 철수 이후 200여년에 걸쳐 진행된 신분 투쟁의 대단원을 내리는 쾌거였다.
신분 투쟁 기간 동안 평민들은 거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철수가 가장 적극적인 저항 수단이었으니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에서처럼 유혈 사태로 치닫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그리스보다 한 걸음씩 뒤졌던 개혁도 이제 확실히 앞서 가게 되었다. 의회, 상원(세나투스), 국민투표 등 오늘날까지 서구 민주정치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두 이 시대 로마에서 탄생했으며, 로마의 원로원과 민회는 오늘날 양원제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물론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불만이었지만,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평민의 진출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환영하기도 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을 잃었고 오로지 전통과 명예만이 남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귀족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한, 즉 원로원 활동에 충실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노리지 않았다【당시 로마 귀족의 귀족다운 자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귀족의 의무’라는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말은 ‘상류층의 도덕과 책임’을 강조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류층의 양심이라고 이해하지만, 의무(오블리주)라는 말이 붙은 데서 보듯이 도덕적 개념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전통이 없는 사회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되기 어렵다】. 원로원의 귀족정, 평민회의 민주정, 집정관의 왕정이 조화 속에 한데 어우러진 당시 로마의 공화정은 가장 완성된 정치 형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이 완벽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로마는 애초부터 타고난 정복 국가였다. 따라서 로마의 공화정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것은 잠시뿐이었다. 반도의 통일을 이룬 뒤 로마는 곧장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중해의 패자가 되는 것이다.
▲ 그리스풍 초기 로마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를 본받는 식으로 전개된다. 한가운데 광장과 신전이 있는 로마 시가지 유적의 현재 모습(위쪽)과 옛 로마를 표현한 모형(아래쪽)에서도 그리스 폴리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