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1:38
728x90
반응형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전혀 다른 전후 처리

 

 

2차 세계대전이 수백 년간 유럽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의 종착역이라는 점은 종전 직후부터 드러났다. 무엇보다 전후 처리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서유럽 각국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뒤 매번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고 새 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왔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엑스라샤펠 조약을, 7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나폴레옹 전쟁은 빈 회의를, 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을 낳았고, 이 조약들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는 게 유럽 근대사의 기본 공식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은 처음으로 그 공식에서 벗어난다. 연합국들은 우선 국제연합을 결성하고 이 현대의 교황청의 이름으로 전후 처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처럼 각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제조약으로 모든 사안을 일괄 타결한 게 아니라 각각의 현안을 별도로 처리하는 방식을 취했다. 장사꾼에 비유하면 물건들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게 아니라 하나씩 제 가치를 매겨 실수요자에게 파는 식이다.

 

그만큼 국제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정교해진 걸까? 좋게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전과 달리 새로운 세계 체제를 구상할 필요가 없었다. 전쟁 중에 이미 그 윤곽이 확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총론이 결정되었으니 전후 처리는 각론에 따르면 되었다.

 

과거에는 대규모 국제전이 끝나도 늘 다음 전쟁이 예약되어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한 차례의 전쟁만으로 완전히 해소될 수 없을 만큼 모순이 켜켜이 쌓인 탓이었다. 때로는 승전국들이 그 점을 지나치게 의식해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새로운 국제전이 앞당겨지는 경우도 있었다(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하는 엑스라샤펠 조약에서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인정하는 바람에 7년 전쟁을 부른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달을 무렵 연합국들은 이제야말로 근대 유럽의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지긋지긋한 전쟁이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사실 베르사유 체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더 정교하게 진행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훨씬 작은 규모로 일어났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연합국 측이 패전국들을 거칠게다룬 이유는 그 전쟁으로 국제전이 끝났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세계의 영토 분할이 완료되었으므로 그런 생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에서 마무리 처리가 미숙했던 것예를 들면 국제연맹의 엉성한 구조은 결국 유럽 역사의 부산물에 불과한 파시즘을 지나치게 키웠고,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불렀다. 유럽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수백 년 동안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알려지고 임자가 정해졌으므로 더 이상 다툼이 발생할 소지가 사라진 것이다. 전 세계의 퍼즐 조각들이 다 맞추어졌으니 이제 퍼즐 놀이는 끝났다. 앞으로는 적어도 유럽 세계 내에서는 전쟁이 없을 것이며, 다른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대규모 국제전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유럽에서 그런 전쟁은 이제 없다.

 

각개격파의 처리 방식은 그런 확신에서 나왔다. 세계대전도 두 번째 치르는 셈이었으므로 나름대로 노련해진 연합국 측은 패전국에 대해서도 무조건 과중한 징계를 가하고 알아서 기라는 무책임한 처리 방식을 피했다. 일단 독일이 파시즘 같은 신무기를 또 다시 개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독일을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했고, 독일의 하수인이던 오스트리아를 중립화시켰다.

 

패전국들에 점령된 나라들의 경우에도 예전 같으면 새로 정해진 국제 질서에 따라 일괄적으로 처리했겠지만 이제는 각국이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처방이 취해졌다(한반도를 포함한 11개 국가에 신탁통치를 결정한 게 그런 예다. 한반도는 오히려 그 조치 때문에 극심한 홍역을 치렀지만), 독일의 주권을 회복시켜주고 오스트리아를 영세중립국으로 만든 시기가 전후 10년이 지난 1950년대 중반이라는 사실은 전후 처리에 임하는 연합국들이 그만큼 신중한 절차를 취했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후를 대비하자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후 처리를 시작한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의 특징이다. 그만큼 전쟁에 임하는 당사자들이 노련해졌다고 할까? 사진은 19452월 연합국 정상들이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모습이다.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이다.

 

 

그러나 현실이 변화하는 속도는 그들이 대처하는 속도를 앞질렀다. 장차 등장할 새 국제 질서가 전 지구적 체제 대립의 형태를 취하리라는 것은 이미 전쟁 중에 감지되었으나 그것이 냉전 체제로 현실화된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변화의 속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패전국과 식민지에서 하나씩 찾을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분단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패전국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이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의 주역인 만큼 연합국이 독일을 온전히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응징이 분단의 형태를 취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 분단이 그토록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종전이 되기 전에 죽은 루스벨트는 물론이고 처칠과 스탈린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죽기 2개월 전인 19452월에 처칠, 스탈린과 함께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종전 후 독일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여기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국이 독일을 분할 통치하고 전범들을 재판하며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아시아의 일본만 저항하고 있을 때 미국과 영국, 소련 3개국 정상 루스벨트만 트루먼으로 바뀌었다은 베를린 인근의 포츠담에 다시 모여 얄타 회담에서 정해진 4개국 공동 관리의 방침을 확인하고 구체화했다. 하지만 말이 4개국이지 색깔로 보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한편이고 소련이 다른 한편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결국 독일의 국토와 베를린은 이 양대 세력에 의해 동서로 양분되었다. 19495월 서독에서 먼저 단독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9월에 정부를 수립했으며, 여기에 자극을 받은 동독이 그다음 달인 10월에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식민지의 분단은 패전국의 분단과 비슷하지만 시기는 오히려 1년이 이르다(그만큼 패전국을 처리할 때보다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1945815일에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곧바로 한반도 남부에는 미군이, 북부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사실상의 분단 체제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경우처럼 한반도에서도 분단 직후까지는 교통과 물자 이동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19485월 남한에서 먼저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고 헌법 제정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선언하자 북한도 그해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한반도에서 냉전 체제가 이렇게 빨리 모습을 드러낼 줄은 그것을 결정한 연합국 정상들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발칸을 독점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지만 동유럽에 대한 욕심은 이미 그전의 얄타 회담에서 내비치고 있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게 폴란드의 사례다. 당시 루스벨트와 처칠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원했으나 스탈린은 폴란드 현지에 있는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지지했다. 그때는 아직 전시였으므로 그냥 견해 차이로 남았으나 종전이 가시화되면서 그 구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독일까지 동서로 분할 점령한 판이었으니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가 어느 측의 지배를 받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사회주의는 원래 파시즘과 상극이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레닌에서부터 사회주의의 이념과 이론에서 이탈한 현실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묘한 친화력을 보였다. 1인 권력 구조, 국가 지상주의, 선전과 선동으로 대중을 호도하는 전체주의적 성격에서 두 체제는 닮았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스탈린이 히틀러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분할에 함께 나선 것은 그 유사성의 표현이다.

 

이런 변화를 신호탄으로 냉전은 바야흐로 새 시대의 구호로 자리 잡았다. 이제 유럽 전체가 얽힌 세계대전은 두 번 다시 없을지 몰라도 냉전의 보이지 않는 전선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전쟁이 아닌 체제 간의 경쟁이지만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만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종래의 전쟁보다 더욱 치열했다. ‘냉전과 열전 사이는 없었다.

 

 

냉전의 상징 독일은 전후에 서독과 동독으로 분립했어도 민간의 통행은 계속 이루어졌다. 특히 베를린은 서독과 동독이 분점했으므로 자유로운 왕래가 활발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 이 장벽이 무너진 1990년까지 30년 동안 독일은 완전한 분단국가로 존속했다. 사진은 장벽이 세워지는 장면(위쪽)과 철거되는 장면(아래쪽)이다.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첫째, 앞으로 유럽 세계에는 국제전이 없을 것이다. 둘째,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 공산주의 진영의 두 체제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답은 하나다. 즉 이제부터는 유럽 지역이 아닌 곳에서 유럽 세계의 체제 모순이 대리전 혹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전쟁은 세계사적 필연성의 소산이다. 당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필 한반도에서 그런 전쟁이 터졌다는 게 억울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 체제 대립을 국지전으로 표출할 만한 마당은 한반도 이외에 없었다. 우선 유럽은 제외해야 했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도 소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열외다. 남은 곳은 서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인데, 실은 서아시아도 유력한 후보였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과 대결을 체스 경기에 비유한 용어다. 두 나라가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마치 체스판처럼 병력을 이동시키며 상대의 길목을 가로막는 양상을 취하는 것을 보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정보장교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계속 남하하려 했고 영국은 동서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차단하려 했는데,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이자 최종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을 치열하게 벌인 현장인 데다 특별한 지역적 구심점이 없어 대리전의 무대가 되기에 좋았다. 하지만 이 지역은 너무 넓어 전쟁이 벌어지면 금세 국제전으로 전화되기 쉬우므로 최선의 무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후보로 남는 곳은 동북아시아다. 여기서 일단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므로 자격 미달이다. 중국은 좋은 후보지만 서아시아 지역처럼 자칫 전쟁이 대규모화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종전 직후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 세력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국지전의 대상국이라기보다는 주관국의 자격을 갖춘다. 결국 국지전의 유일한 후보지는 한반도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물론 연합국의 어느 누구도 의식적으로 이 과정을 계획하거나 주도한 것은 아니다(만약 계획자가 있다면 한반도 분단의 주범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지만),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보스로 하는 두 세계 체제가 제3의 지역에서 일합을 겨룬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소련이 처음부터 특정한 구도나 음모를 가지고 일관적인 수순을 밟아나가 전쟁의 국면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역사의 각 장면은 대부분 의식적인 행위의 소산이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역사적 흐름은 어느 누구의 의도와도 무관한 경우가 많다.

 

1950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3년이나 지속되었으나 실제로 치열한 국면은 개전 후 10개월까지였다. 이 기간에는 전황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초기에는 북한군이 남한을 거의 점령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역전되었고, 다시 중국군이 투입되면서 긴 교착상태로 접어들었다. 19514월에 주전론자인 맥아더가 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말하자면 국지전(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속의 국지전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해 후반부터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전선과 협상 테이블 양쪽에서 지리멸렬한 공방전이 2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19537월에야 정식으로 휴전 협상이 체결되었다.

 

휴전이라면 무승부라는 이야기다. 차라리 승부가 났으면 좋았을 텐데, 두 세계 체제가 첫 번째 힘겨루기에서 무승부를 이루었으므로 체제 모순은 해소되지 않고 더욱 증폭된다. 예전 같으면 어느 측이든 끝장을 보자고 나섰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기에 이후 냉전 체제의 양측은 공갈 포로만 일관한다. 말하자면 두 터프가이가 실제로 한판 붙기는 서로 겁나니까 헬스클럽에서 하드트레이닝으로 근육만 잔뜩 키우는 격이다. 이것이 1950년대의 군비 경쟁으로 나타났다. 사실 냉전이 실제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장군과 대통령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10월 맥아더와 트루먼이 웨이크 섬에서 만났다.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 작전을 주도한 맥아더의 주가도 점에 달한 시기였다. 두 사람은 여기서 38선을 돌파하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전쟁에 소극적이던 대통령은 장군의 제안을 수용했을 것이다.

 

 

싸우지 않고서 상대방을 제압하려면 덩치를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 양 진영은 각자 똘마니들을 끌어들여 세 불리기에 매진한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유럽 주요 국가와 캐나다를 동원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시아 지역에도 그런 장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1954년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이에 맞서 소련은 1947년에 동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을 회원으로 받아들여 코민포름을 결성했으며, 1955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조직해 본격적인 냉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디

 

우두머리의 임무는 뭐니 뭐니 해도 조직을 관리하는 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똘마니들을 먹여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서유럽은 문명적으로 북아메리카에 유럽 문명을 이식한 모태 문명권이지만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애오라지 미국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계대전을 통해 더 부자가 된 미국은 우두머리답게 지갑을 화끈하게 열어 유럽 세계를 지원했다. 정식 명칭은 유럽 부흥 계획, 비공식적으로는 마셜플랜(Marshall Plan)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의 제안으로 1948년에 시작된 이 계획에 따라 미국은 유럽에 4년 동안 120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 종잣돈으로 유럽은 산업과 농업을 안정시키고 재정난을 극복하고 무역을 회복시켰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은 독일인의 근검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마셜 플랜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지만 한국전쟁 이후 전 국토가 피폐해진 남한도 미국의 전폭적인 경제원조를 받았다. 다만 미국의 전략적 육성 지역이 아닌 탓에 유럽처럼 체계적인 경제원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주로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받는 식이었다. 그래도 잉여 농산물의 유통과 배급을 밑천으로 삼아 오늘날에까지 이르는 재벌 기업들이 성장했고, 이 기업들의 자금으로 정치 활동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무책임한 경제원조가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와 정경유착을 빚은 셈이다.

 

 

군사와 경제 전후 서양 세계의 단독 리더로 떠오른 미국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유럽 지역을 부흥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침은 두 가지, 군사적으로 냉전을 대비하는 것과 경제 안정이었다. 왼쪽은 전자에 해당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포스터이고, 오른쪽은 후자에 해당하는 마셜 플랜의 포스터다.

 

 

적의 우두머리가 돈을 마구 뿌린다는 소식에 아연 긴장한 또 다른 우두머리 소련도 제 똘마니들을 부지런히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셜 플랜이 발효되자마자 곧바로 19491월 소련은 경제상호 원조회의(Communist Economic Conference, 코메콘)라는 기구를 조직해 사회주의 경제블록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달리 호주머니가 넉넉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부족한 돈은 이념으로 메워라!

 

소련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해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한 형제라는 구호 아래 국제적 분업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형제라도 소금 장수와 우산 장수의 이해관계는 다른 법이다. 원치 않는 분업 체제에 속하게 된 국가들은 입이 잔뜩 부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형제들 간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어, 가난한 폴란드는 공평한 부의 분배를 기대하면서 경제블록과 분업화에 찬성했지만 헝가리나 루마니아처럼 사회적 인프라와 자체 시장이 충분한 나라는 악평등화도 사회주의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특히 전쟁으로 산업의 기간 시설이 초토화된 북한은 그 블록에마저 속하지 못해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였다. 우두머리가 외면하면 굳이 똘마니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자연히 자력갱생이 모토가 된다. 그 일환으로 소련에서 수입한 콤바인을 분해한 뒤 재조립해 보니 기계가 거꾸로 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다. 화가 치민 북한의 지도부는 세상에 믿을 놈 없다면서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라고 외친다. 이것을 이념적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지배자의 우상화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만든 게 바로 주체사상이다(이념 체계로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주체사상이 의외로 북한 인민들에게서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해낸 데는 전후 고립무원이던 북한의 처지가 큰 몫을 했다). 한국전쟁 직후 소련의 경제원조가 충실했더라면 주체사상이 북한 사회에 그렇듯 강력하게 뿌리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장 강경한 독자 노선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전 세계가 피폐해졌으나 미국은 자기 세력을 착실히 꾸린 반면 소련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동유럽마저 팽개친 형편이었으니 아시아의 북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동유럽보다 더 강력한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천명했는데, 사진은 이 이념을 웅변하는 주체사상탑이다.

 

 

 다원화를 향한 추세

 

 

냉전 체제는 과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역사, 나아가 전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은 다원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한 차례의 국제전이 끝나면 신흥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전통을 가진 유럽 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천 년의 중앙집권적 제국사를 전개해온 중국 사회에서도 근대에 접어들어 사회 계층의 분화가 뚜렷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체제는 다원화의 무의식적 흐름을 의식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이었으나 이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우선 체제는 양대 진영으로 단순해졌어도 국가의 수는 급증했다.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1951)가 이탈리아로부터, 수단(1956)이 영국으로부터, 콩고(1960)와 알제리(1962)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1945)이 일본으로부터, 인도네시아(1945)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했으며(1947), 베트남(1954)이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베트남은 그때 분단국가가 되었다가 1975년에 통일되었다). 그 밖에 서아시아에서 레바논(1945)과 시리아(1946), 요르단(1949)이 독립했고, 1948년에는 말썽 많은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세계적으로 다원화의 추세가 역력한 가운데 시대착오적인 냉전 체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한 도시가 동서로 나뉘어 있던 독일의 베를린에는 1961년 도심 한가운데 장벽이 설치되고 이동과 왕래가 금지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전후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필연성을 거스르는 냉전 체제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케네디의 용기 있는 대처에 소련이 꼬리를 내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설령 케네디가 폼을 잡지 않았다 해도 당시 세계 언론이 겁낸 제3차 세계대전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다원화의 흐름을 인위적인 구조로 얽어매려는 냉전 체제의 마지막 시도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건사하기에도 벅차 베트남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반대편 우두머리인 미국은 베트남인들이 스스로 정한 사회주의 노선을 저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260만 명의 병력(아울러 30여만 명의 한국 용병)1200만 톤의 폭탄, 3500억 달러의 천문학적 비용을 투입하고 통킹 만 사건을 조작하는 비열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끝내 패배했다. 물론 베트남인들의 강력한 투쟁이 승리를 일궈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더 넓게 보면 미국의 패권주의적 의도가 역사의 흐름에 역행했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추악한 전쟁 인류 역사에는 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무의미한 전쟁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추악한 전쟁으로도 악명이 높다. 왼쪽은 부상한 동료 병사를 옮기는 미군이고, 오른쪽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트남의 모습이다.

 

 

묘한 것은 냉전 체제를 이루는 두 진영의 움직임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에서는 냉전 시대를 거치며 다원화의 논리가 점차 관철되는 추세를 보였다. 소련이 아무리 국제주의 원칙과 인위적 블록 체제로 결속을 다지려 해도 우두머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 대오의 이탈은 막을 수 없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1947년에 코민포름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 본부도 베오그라드에 유치했으나, 금세 180도 태도를 바꾸어 바로 이듬해에 코민포름을 탈퇴하고(실은 축출이지만)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대대적인 반소비에트 대중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소련이 직접 개입해 정권을 교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반면 유럽에서는 언뜻 그와 정반대로 보이는 변화가 나타났다. 냉전 시대 초기인 1950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은 프랑스와 서독의 철강과 석탄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혹시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제안한 것이었으나 그의 제안은 2년 뒤 서유럽 여러 나라가 가입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 현실화되었다. 당시에는 석탄과 철강의 무역 장벽이 사라지고 생산과 판매가 공동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 직접적인 성과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유럽 세계가 경제블록화되는 첫 단추였다. 그런 배경에서 1959년에는 유럽공동시장(EEC)이 성립되었고, 이것이 1967년에 유럽공동체(EC)로 발전했으며, 1992년에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럽연합(EU)이 탄생했다.

 

다원화의 추세를 막으려 해도 막지 못한 사회주의 진영과 오히려 의식적으로 블록화를 시도한 자본주의 진영, 이 정반대의 변화는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알고 보면 정반대가 아니다. 통합을 지향한 서유럽의 노력은 인위적인 게 아니었다. 우선 그것은 정치적 통합과 무관했다. 처음부터 군사적·경제적 측면으로 제한되었고, 이후에도 (사회주의 블록화와 달리) 이념적·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가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유럽 통합은 시대와 정황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일 뿐 특정한 집단이나 지배 이념에 의해 위로부터하달된 게 아니었다. 더구나 통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는 수시로 대립했고, 반목과 엇박자를 빚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런 사정은 유럽 중세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종교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었으나 세속적으로는 나라마다, 도시마다 분립한 시대가 바로 중세였다. 수백 년간 진통을 앓은 뒤 유럽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세적 질서를 되찾은 것이다. 유럽의 뿌리는 중세에 있었다. 유럽연합은 각국이 다원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최소한의 통합성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연합(나아가 국제연합)의 성립은 바로 중세 유럽에서 국제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교황의 부활에 해당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1917년 레닌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은 사회주의의 실현인 동시에 변질이었다. 사회주의 이론을 구성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의 태내에서생겨나야 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사회에서 그 생산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본주의가 자동 붕괴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 이행해야 했다. 그 계기가 사회혁명의 형태를 취할 수는 있지만 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혁명이 될 수 없었다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특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 관계, 또는 이전까지 적합했던 소유관계와 갈등을 빚게 된다.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힘이었던 이 관계는 오히려 생산력을 제약하는 질곡으로 변화한다. 그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어떠한 사회질서도 그 내부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 다. 또한 그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새롭고 고도한 생산관계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러시아에서(경제적이 아닌) 정치적인 과정을 거쳐 현실 사회주의가 탄생한 것은 두 가지 문제를 낳았다. 첫째, 자본주의 제도를 통한 경제 발전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분배의 평등을 구현할 경제적 역량이 모자랐다. 둘째, 러시아는 혁명 직전까지도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였으므로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인 의회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역사적 과정이 결여되어 있었다(편의상 경제적 문제점과 정치적 문제점으로 구분했지만 실은 하나다.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의 경제적 표현이며, 의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은 두고두고 현실 사회주의의 굴레가 되어 결국 사회주의 실험을 실패로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념의 약점 거칠게 도식화하면 냉전 구도는 경제가 중심인 체제와 이념이 중심인 체제로 양분할 수 있다. 전자는 풍요로운 경제에 비해 이념이 약했고, 후자는 반대로 강력한 이념을 뒷받침할 경제가 약했다. 사진은 냉전 시대가 정점에 달한 1970년대에 물건을 마음껏 구할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장을 본 소련 여성의 모습이다.

 

 

앞서 본 것처럼 사회주의 신생국인 소련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신경제정책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단계의 생략을 뒤늦게 만회하려는 노력이었다. 정상적인 사회주의 사회로 진입하려면 자본주의 단계를 통한 생산력의 발전이 필요한데, 그 단계가 생략되었기에 인위적으로 공백을 메우려 한 것이다. 혁명이 끝난 뒤에 비로소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행정이 거꾸로 되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일단 즉각적인 효과는 있었다. 혁명 직후 붕괴 직전에 놓였던 소련 경제는 신 경제정책이 끝날 무렵 상당히 건강을 되찾았다. 신생국 소련은 일약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급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냉전 체제의 한 우두머리가 된 데는 그런 배경이 작용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바깥이 화려해질수록 안이 더욱 높아가는 옛 제국 체제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련이 이룬 경제성장은 제국 체제를 연상시키는 중앙집권, 국가 성장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경제정책이 결합된 소산이었다.

 

제국 체제라면 당연히 황제가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 지도자가 바로 그런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병사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30년간 철권통치를 한 스탈린을 비롯해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최고 지도자들은 사실상 사회주의적 황제였다. 서유럽의 경우 절대주의 시대에도 의회가 나름대로 기능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사회주의적 황제가 권력을 독점한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는 정치에 관한 한 300년 전 서유럽의 절대주의보다도 못하다. 역사의 진보를 기치로 내건 사회주의가 극히 보수적인 체제를 취했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다이 점은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1949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이 혁명 후 수십 년 동안 단독 집권했고, 그 뒤에도 화궈펑, 덩샤오핑, 장쩌민으로 이어지는 1인 집권 체제를 내내 유지했다. 그 밖의 동유럽 국가들과 쿠바, 북한 등도 정당과 의회의 기능이 구분되지 않고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으며, 공산당의 최종적 지배자는 1인이었다. 심지어 북한 같은 경우는 권력이 한 가문에서 세습될 정도다. 이것을 왕조식 사회주의라고 해야 할까? 아니, 이런 체제에도 사회주의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요리사와 식인종 레닌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현실 사회주의는 이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훨씬 더 튼튼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후계자가 하필 스탈린이었다는 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의 신생 사회주의 국가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없애버렸다. 사진은 병상의 레닌과 거리를 활보하는 스탈린인데, 냉전 시대에 프랑스에서 나온 어느 책에서는 레닌을 요리사에, 스탈린을 식인종에 비유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사회주의권을 블록화하려 한 것은 반대 진영에 맞서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과거의 유제인 제국 체제의 본능에서 탈피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동유럽 지역은 제국의 속주에 해당한다). 그래도 전선이 둘로 갈려 매우 단순했던 냉전 시대에는 그런 체제가 어느 정도 통했다. 하지만 전 세계가 다원화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그런 낡은 발상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그런 점에서도 냉전 체제는 역시 과도적이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소련의 코앞에서부터 붕괴되었다. 1980년 폴란드에서 레흐 바웬사(Lech Watesa)가 공산당과 무관한 자유노조를 결성한 것을 신호탄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블록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ev)는 대외적으로 글라스노스트(개방), 대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내세우며 시대의 변화를 현실적으로 수용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의 출발점인 70년 전부터 잘못 꿴 단추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조치는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붕괴 현상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은 1989년이다. 이해에 폴란드에서는 자유노조 출신의 총리가 집권해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18년 동안 동독 공산당을 지배한 호네커가 대규모 시위로 실각했다. 계속해서 헝가리에서는 의회가 3244라는 압도적인 표결로 야당을 인정함으로써 공산당 지배 체제가 무너졌고,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도 몰락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산당에 반대하던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었다.

 

이런 사태가 잇따르자 현실 사회주의의 본산인 소련도 변화의 물결을 피해가지 못했다. 1991년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급진 개혁파인 옐친(Boris Yeltsin)이 압승을 거두었고, 8월에는 고르바초프가 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했다. 하지만 해체된 것은 공산당만이 아니었다. 8월 말에서 9월 초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이 며칠 차이를 두고 차례로 독립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음을 뜻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유럽 지역의 공화국들만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공화국들이 하나둘씩 독립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1993년에는 소련의 국호가 러시아 연방으로 개칭됨으로써 유럽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막을 내렸고, 냉전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청바지의 지도자 다원화를 향한 세계사적 흐름은 체제의 장벽마저도 무너뜨렸다. 처음부터 다원화가 보장되어 있었던 서양 세계에서는 인위적 블록화가 최소한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사회주의권에서 시도한 블록화는 결국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사진은 그 시도를 거부하고 나선 폴란드 자유노조의 지도자 바웬사다. 그가 입은 청바지가 그의 이념을 상징하는 듯하다.

 

 

 미국의 지위와 역할

 

 

숲의 호랑이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남은 한 마리가 숲의 단독 주인이 되어 모든 동물을 지배할 것이다. 미국산 호랑이도 바로 그렇게 하려 했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숲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모든 신민 위에서 군림하려 했다.

 

1991년 미국에서 멀고 먼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해묵은 영토 분쟁에 끼어든 게 그 예다. 이 문제의 뿌리는 30년 전인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사태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에도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미국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태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서아시아의 석유 이권을 노린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 냉전 시대가 끝나고 단독으로 전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Bush)는 미국 의회와 국제연합을 움직여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결의안을 신속히 통과시키고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을 구성해 이라크를 공격했다. 정식 명칭은 페르시아 만 전쟁이지만 보통 걸프 전쟁이라고 부른다걸프 전쟁은 현재의 시사적 의미만이 아니라 전쟁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역사상 최초로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 시스템이 이용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미사일 담당 병사는 물리적 발사 장치를 조작했지만 걸프 전쟁에서는 오로지 컴퓨터 프로그램만을 조작했다. 이렇게 전쟁 과정이 비인격적(impersonal)이기 때문에 대량 살상에 따른 인도주의적 부담이 적어진다. 지금 우리가 19세기 중반의 크림 전쟁을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기록하듯이, 후대의 역사서에는 걸프 전쟁이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이미 냉전 시대부터 세계의 경찰이라는 불편한 별명을 얻었던 미국이다. 그래선지, 그 별명에 걸맞게 불과 42일 만에 걸프 전쟁을 완승으로 이끌었어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위는 오히려 하락했다. 경찰은커녕 조폭의 딱지나마 면하면 다행이었다. 왜 그럴까? 세계의 단독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왜 미국은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는 명예로운 경찰이 되지 못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냉전 시대가 과도기였다는 점에 있다. 냉전 시대에 한 진영의 우두머리였던 미국은 그 시대가 지나자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럼 원래의 위치는 무엇일까? 미국은 서양 문명의 훌륭한후손이지만 관리자나 지배자의 지위는 아니었다. 학급으로 비유하면 미국은 학급을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교사가 아니라 반장의 역할이다. 반장은 반을 통솔하고 관리할 뿐 총책임을 지는 위치는 아니다. 급우들도 반장을 급우 대표라고는 인정해도 교사에게처럼 복종하지는 않는다. 반장은 명령을 내리는 지위가 아니고, 급우들도 반장의 명령에 따를 의무는 없다. 반장은 이해관계가 다양한 급우들의 의견을 총괄하고 급우들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지위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면서도 국제연합에서 다른 나라와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미국의 착각은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반장이라기보다 교사라고 여긴 데 있다.

 

미국이 교사가 되지 못하고 반장에 그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미국 내의 체제적 결함에 있다. 알다시피 미국은 연방 체제를 취하는 국가다. 미국의 한 주를 가리키는 ‘State’라는 단어가 국가를 뜻하듯이, 미국은 여러 국가가 모여 이룬 합중국이다. 서유럽의 시민혁명과 같은 역사적 기능을 담당한 남북전쟁으로 연방 체제가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적 연방제라는 묘한 체제를 이루게 되었지만 연방국가의 속성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 독립 시기에 제정된 미국 헌법에 따르면, 미국에 속한 각 주는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권리는 지금도 법적으로 유효하다. 미국이 건국될 때부터 탈퇴의 권리는 국민의 자연권이자 중앙정부의 권한 남용을 제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미국 헌법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쳤으나 개헌된 적은 없으므로 주의 탈퇴권은 아직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오히려 법적으로 연방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권한만을 행사하고, 나머지는 주정부 또는 국민이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의 연방정부는 앞으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지향하겠지만 다원화의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자칫 오버 페이스를 한다면 또다시 연방이 깨지는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결국 장기적인 견지에서 볼 때 미국은 대외적으로 반장의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고 대내적으로 연방 체제의 굴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한계가 있으므로 미국은 아무리 패권주의 전략으로 일로매진한다 해도 그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내의 강성 우파가 아무리 애국주의를 부르짖는다 해도 미국이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미국은 서유럽에서 이미 폐기 처분된 낡은 민족주의 이념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서유럽에서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50년에 걸쳐 민족주의라는 독소적인 요소 - 실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한 데 따르는 필연적인 산물 - 때문에 엄청난 전란을 치러야 했다(그 절정이 히틀러의 인종주의다). 미국은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기에 아직 민족주의의 폐해를 실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대외적으로 표출시키고 있지만, 결국 생략되거나 부재한 역사 과정은 앞으로 미국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 문명의 역사에서 미국은 당분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겠지만 세계의 경찰은 영원히 미국인들만의, 아니 연방정부만의 꿈으로 남을 것이다.

 

 

초토화된 문명의 고향 체제 간의 대결이 사라진 이후 전쟁은 미국이라는 반장이 명에 따르지 않는 급우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1991년의 걸프 전쟁(위쪽)2003년의 이라크 전쟁(아래쪽)이다. 두 전쟁에서 미국의 공적으로 꼽힌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결국 반장에 의해 최초로 처형된 급우가 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