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중세 이래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에서도 늘 그랬듯이, 유럽 세계의 전쟁은 상대방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지면 전쟁을 끝맺고 타협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조약을 맺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이라고 해서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 열강과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바로 국제연맹이다.
하지만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는데 왜 하필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기구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을까? 그 이유는 알기 쉽다.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세계 분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유럽은 지구상의 모든 구석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속속들이 분할했다. 따라서 열강은 이제 더 이상의 분쟁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세 이후 처음에는 종교를 두고(30년 전쟁), 그다음에는 유럽의 영토를 두고(에스파냐-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나폴레옹 전쟁), 또 그다음에는 해외 식민지를 두고(제1차 세계대전) 벌인 기나긴 월드 시리즈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분쟁이 아니라 조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게 국제연맹을 신설한 열강의 생각이었다【중세 이래 유럽은 내내 분권화를 향한 역사를 전개해왔으므로 더더욱 그런 조정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국제연맹은 중세질서의 기반이었던 느슨한 통합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제국적 중앙집권 질서는 근대 유럽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최소한의 통합성은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제연맹은 중세의 로마 교황과 같은 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아직 정답이 아니었고, 중세적 질서로 돌아가려면 또 한 차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 그 생각은 자가당착이요 자기 모순이다. 지배자의 눈으로 보면 세상만사가 아무 문제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살면 모두가 행복하리라고 막연하게 여긴다. “내 팔자에 무슨 난리야?”라는 말이 있지만, 정말 그렇다. 없는 놈의 팔자라면 차라리 난리라도 나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뒤집어질 테니까.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바로 그 ‘없는 놈’의 팔자를 계산에 넣지 않았다(아니면 알고도 모른 체 했거나). 내 집이 크면 남의 집이 작다.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던 시대, 세계의 상당 부분이 무주공산이던 옛날이라면 혹시 모를까, 이제 지구상 모든 구석이 알려졌으니 작은 집에 사는 없는 놈은 팔자를 고치려면 난리라도 피워야 했다.
특히 있는 놈이었다가 졸지에 없는 놈이 된 독일이 그런 처지였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독일에서는 공화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가 쫓겨났다. 독일 통일의 결실인 독일제국은 50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종말을 맞았다. 이듬해 1월 그 혁명을 주도한 바이마르에서는 독일연방 국민의회가 소집되었고, 다음 달에는 드디어 독일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어찌 보면 1848년에 생겼어야 할 공화국이 무려 70년이나 지각한 셈이다(게다가 그때 공화국이 성립되었더라면 세계대전도 없었을 것이다).
극단적 좌파를 배제하고 온건 좌파의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새 공화국은 개혁 의지가 충만했다. 정부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했고, 노동자의 각종 권리를 보장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여 유럽의 국제사회 속에서 신생국 독일의 좌표를 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였다. 독일이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이었어도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갚지 못할 금액이었다.
공화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 해결하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다(그때까지 유럽 열강과 미국은 독일의 신생 공화국을 지원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경험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그에 따라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전쟁 전에 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환율은 배상금을 갚기 시작한 1922년 말에 무려 달러당 7000마르크로 올랐고, 그 이듬해에는 달러당 수조 마르크라는 믿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늪에 빠진 공화국을 건져준 것은 미국이었다. 통화개혁이라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처방으로 겨우겨우 버티던 독일에 미국은 절묘한 타개책을 제시했다. 미국이 차관으로 독일의 경제 복구를 도와주면 독일은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갚아나간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유럽 경제를 살려야 했고, 유럽 경제가 살려면 독일이 살아나야 했으니, 어느 누구도 불만을 품을 수 없는 방책이었다.
이리하여 가까스로 한숨 돌린 공화국은 다시 개혁의 고삐를 틀어쥐었는데, 문제는 또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외국과 연이어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고 경제적으로 종속화되는 정부를 더 이상 신임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정부의 성격이 중도좌파인 만큼 좌파와 우파의 반대가 극심했다. 바이마르 정부는 점차 국민들에게서, 또 정치 세력에게서 인기를 잃어갔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복무한 경험으로 히틀러는 전후에도 계속 군대에 남아 있다가 1919년 독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독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으로 당명을 바꾸었는데, 이것을 줄인 말이 바로 나치 Nazi다. 명칭에서 보듯이, 나치는 원래 사회주의 정당으로 출범했지만, 군 시절에도 히틀러의 주임무는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데 있었으니 그런 아이러니도 없다. 어쨌든 선동적인 연설로 순식간에 독일 국민들의 인기를 얻은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계속 호황을 유지했더라면 히틀러의 집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29년 미국에서 터진 대공황의 물결이 유럽을 덮치면서 공화국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1932년 선거에서 나치는 독일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듬해 1월 히틀러는 드디어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다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독일은 ‘독일식 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 파시즘의 조건 오늘날 서양 역사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히틀러라는 한 명의 광인이 일으킨 ‘엄청난 불장난’으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치 깃발이 집집마다 걸려 있는 이 사진에서 보듯이, 파시즘은 결코 몇몇 파시스트들이 선동해서 성립한 체제가 아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파시즘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엄연히 ‘파시즘화된 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일국적으로 보면 파시즘 체제는 대단히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정치 실험이었다.
암흑의 목요일
19세기에 미국은 지리적인 조건을 십분 활용해, 유럽의 복잡한 정세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산업혁명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19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은 오히려 영국보다 미국이 주도했다). 말하자면 단물만 빼먹은 셈이다. 그 당분은 미국을 급속도로 살찌웠고, 뒤늦게 나선 식민지 경쟁에서도 미국은 유럽 열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성과를 올렸다. 1867년에는 재정난에 빠진 러시아 황실로부터 헐값으로 알래스카를 사들였을 뿐 아니라【264쪽의 주 참조. 그런데 20세기 초에 알래스카와 비슷한 운명을 겪을 뻔한 지역이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생겨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 쑨원(孫文, 1866~1925)은 혁명정부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를 일본에 팔아넘길 구상을 하고 일본의 가쓰라 총리와 접촉한 일이 있었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만주에서도 대규모 유전들이 발견되었으니 자칫하면 오늘날 중국인들은 땅을 치고 후회해야 했을 것이다. 영토란 그래서 중요하다】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손에 넣었고,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한 에스파냐를 두들겨 필리핀을 빼앗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렇잖아도 한창 뻗어나던 미국의 경제에 금상첨화와 같은 역할을 했다. 미국은 전쟁 중반까지 중립을 지키면서 군수품 보급을 도맡아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그런 점에서 전쟁 말기의 참전은 미국의 ‘애프터서비스’가 아니었을까?).
이어진 192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유럽의 전후 복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미국에는 자금이 남아돌았다. 미국은 유럽 각국에 빌려준 돈으로 일약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다. 유럽은 전승국들까지도 전쟁이 남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미국에 유럽의 상황은 오히려 번영의 호조건이 된 것이다.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에도 열심히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미국 의회는 윌슨의 조약 비준을 거절했고, 그 때문에 미국은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세계 정치에서는 아직 소극적인 자세였으나 세계 경제에서는 이미 확고한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독주에는 제동이 걸리게 마련이다. 소비가 없다면 생산도 지속될 수 없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국 경제의 큰 문제는 과잉생산이라는 점이었다. 자본 과잉에다 생산 과잉, 세계 전체가 가난해졌는데 미국만이 부자라는 것은 결국 수요의 부족을 낳을 테고, 그 결과는 세계의 단독 자본가이자 생산자인 미국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그 문제점이 드러나는 과정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너무도 순간적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가인 월스트리트에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주가가 사상 최대로 폭락했다. 사상 최초의 대공황이 시작된 이날은 목요일이었기에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고 부른다.
대공황의 물결은 몇 개월 만에 전 미국을 초토화시켰다. 직격탄을 맞은 금융업을 비롯해 돈줄이 끊겨버린 공업이 무너졌고, 심지어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농업도 공황의 파괴력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기업은 도산했고, 노동자는 실업자가 되었으며, 농민은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만 보았다.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는 수요를 늘리는 것만이 공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뉴딜정책(New Deal)이다.
국가가 잉여 농산물을 직접 구매해 농산물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실업자들을 댐 건설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에 고용한다. 또한 방대한 규모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빈민들을 구제하는 한편 국가 지출을 증대시킨다. 이것이 뉴딜의 기본 내용이었는데, 골자는 과잉된 자본과 생산을 수요 증대로 상쇄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정책은 공황 타개에 큰 효과를 발휘했으며, 이후 자유방임형 자본주의 대신 국가 개입형 자본주의로 궤도를 수정하는 큰 변화를 낳았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과 사정이 달랐다. 대공황의 직접적 피해는 미국에 닥쳤으나 감기만 걸려도 중병으로 전화될 정도로 취약한 유럽의 경제는 대공황의 간접적 피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만 유럽은 진원지인 미국처럼 급격하게 붕괴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932년부터 유럽에 불어닥친 대공황의 충격파는 유럽 각국의 경제와 정치를 뒤흔들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영국과 프랑스 정부에는 좌익 세력의 요구와 진출이 활발해졌다. 독일 좌익 세력의 ‘독특한’ 취향은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어주었지만.
뉴딜은 공황의 치료약은 되었으나 예방약은 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국가가 가장 큰 경제 주체로 나섰고, 영국에서도 19세기 이래 유지되어온 자유무역주의 대신 다시 보호관세의 장벽이 세워졌으나, 수백 년 전 중상주의를 연상시키는 국가 개입형 자본주의는 공황을 낳은 과잉생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과잉생산은 마치 체내에 쌓인 노폐물처럼 적절히 배설해주어야 했다. 이것이 곧이어 터져 나오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배경을 이룬다. 전쟁과 무기 산업만큼 대량으로 수요를 촉발해주는 것은 없으니까.
▲ 절망의 하루 요즘처럼 증권시장을 조작하기 위한 ‘작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과잉이 누적된 결과 어느 평범한 목요일 미국의 증권시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진은 대공황이 발생한 날, 1929년 10월 24일 월스트리트의 모습이다. 하루 동안 이곳에서만도 11건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파시즘이라는 신무기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치에 입당하던 1919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지도자가 전 국민의 인기를 모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였다. 사회주의 운동을 한 무솔리니는 파시즘(fascism)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면서 모든 이탈리아 국민의 결속을 주장했는데, 파시즘이란 ‘결속’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왔으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오늘날 파시즘의 원흉으로 꼽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사회주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게다가 소련식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적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거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실상 사회주의의 이념과 원리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파시즘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로 대척적이다(실제로 파시즘은 사회주의를 철저히 억압했고, 사회주의는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섰다)】.
무솔리니가 ‘뭉쳐야 한다’고 부르짖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마땅한 전리품을 얻지 못했다. 비록 양 다리를 걸치다가 뒤늦게 참전했고 전쟁에서도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그런 것뿐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불만이었다. 더구나 참전의 미끼였던 달마치야가 신생국 유고슬라비아에 넘어가자 국민들은 불만을 넘어 분통을 터뜨렸다. 약소국의 운명을 새삼 실감하게 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무솔리니의 ‘파쇼’는 가슴 깊이 파고드는 구호일 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당이 인기를 얻을수록 국왕의 인기는 그에 반비례해 추락했다. 국민들은 국왕 에마누엘레 3세에게 당신이 그토록 참전을 주장했는데 대체 지금 얻은 게 무엇이냐고 따지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여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결국 1922년 에마누엘레는 무솔리니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제 이탈리아는 허수아비 왕을 제치고 무솔리니가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는 기묘한 왕국이 되었다.
‘결속’의 위력은 대단했다. 무엇이든 국민의 이름으로 집행하면 정당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 이외에 모든 정당을 법으로 금지했고, 대외적으로는 실추된 이탈리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밀고 나갔다. 국가는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는 초법적인 기구였으며, 국가를 조종하는 주체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었다.
이 점에서는 독일도 결코 이탈리아에 못지않았다. 1933년 총리로 취임한 히틀러는 곧 의회를 해산하고 게슈타포라는 비밀경찰을 창설했으며, 나치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정당이라고 선언하고 일당 독재체제를 갖추었다. 이듬해에 이름만 남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까지 겸하면서 공화국 체제를 폐지해버렸다. 서유럽의 공화주의 지식인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독일 역사상 가장 건강한 정권,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로써 10여 년 만에 깃발을 내렸다.
▲ 뭉치면 산다 지금은 파쇼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 들을 사람이 없겠지만, 1920년대의 파쇼는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말이었다. 파쇼는 원래 ‘뭉치자’는 뜻이니, 어려운 살림살이에 그 구호에 반대할 국민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은 1922년 로마로 들어오는 파시스트들이다(앞줄에 걷고 있는 사람들 중 한가운데 인물이 무솔리니다).
공화국이 사라졌으니 이제 독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점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명쾌했다. 그는 독일을 ‘제3제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굳이 제국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문을 닫은 독일제국에 이어 두 번째일 텐데 왜 세 번째라고 했을까? 그는 역사적 근거를 들었다.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제국은 첫 번째가 아니다.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히틀러는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적통을 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칭은 총통이었지만 그는 황제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것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로마 황제를.
그래도 거기까지는 특별히 탓할 게 없고 굳이 미화하자면 독일식 민족주의의 발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기로 나아갔다. 찬란한 역사를 가진 독일이 이 지경으로 몰락한 것을 설명하려면 뭔가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는 그것을 바로 유대인에게서 찾았다. 순수한 게르만족의 혈통이 유대인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으므로 유대인을 제거하면 독일의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터무니없는 논리였으나 독일 국민들의 상당수는 그의 광기에 동조했다【이렇게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은 대중적인 기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은 흔히 말하는 독재와 다른 점이 있다. 독재는 국민의 지지 기반이 없어도 독재자가 군대 등을 이용해 유지하는 강압적 체제지만, 파시즘은 ‘파시즘화된’ 대다수 혹은 상당수의 국민들이 열렬히 지지하는 체제다. 이렇게 보면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파시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약간 모호해진다. 1972년 11월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93퍼센트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유신 체제는 파시즘이다. 그러나 계엄령을 내리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탄압한 가운데 국민투표가 강행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유신 체제는 독재다】. 대중 선동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적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두 나라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늦은 19세기 후반에야 국가 통일과 국민국가를 이루었다. 물론 그보다 더 늦게 국민 국가를 형성한 나라들도 있다. 하지만 두 나라처럼 오랫동안 서양 역사의 주류였으면서도 통일과 국가 형성이 늦은 곳은 없었다(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들이 파시즘에 적극 동조한 것은 그런 역사적 두께에서 생겨난 국민적 기대감이 당시 두 나라가 처한 현실에 비해 훨씬 높았던 탓이다).
둘째, 그렇게 스타트가 늦은 탓에 두 나라는 다른 열강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처졌다. 국내의 자본주의는 발전하는데 이를 소화할 해외 식민지가 부족한 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독일의 경우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부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셋째,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었다. 국가가 파시즘으로 치달으면 시민 사회가 제동을 거는 게 서유럽 국가들의 메커니즘이다. 시민혁명의 경험으로 시민사회의 전통이 형성되어 있던 영국과 프랑스라면 설사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하더라도 파시즘이 자리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후발 제국주의의 약점을 신속하게 극복하기 위해, 또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다는 결함을 국가 체제의 힘으로 보완하기 위해 채택한 ‘신무기’라고 할 수 있다. 무기는 모름지기 실전에 투입해야 하는 법, 파시즘으로 무장한 두 나라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모색하던 전후 질서를 단순히 과도기‘로 만들어버리고 또 한 차례의 대형 국제전을 일으키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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