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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2부 뿌리① - 4장 사상의 시대, 그리스로 옮겨온 철학(소피스트, 소크라테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4장 사상의 시대, 그리스로 옮겨온 철학(소피스트, 소크라테스)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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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로 옮겨온 철학

 

 

소피스트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정이 발달한 아테네에서는 토론과 설득의 기술이 중요했다.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물론 전통적인 신분이나 재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이제는 평민층의 발언권이 커졌으므로 누구든 논리와 수사에 능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회나 법정에서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공직자로 발탁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이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이 지혜(sophia)를 사랑한다(phailos)’는 뜻이듯이, 훗날 궤변가(詭辯家)’라는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소피스트도 원래는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었다. 지혜를 쌓으려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많이 해야 했다. 그래서 소피스트들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관습과 문화를 두루 익혔다. 민주정이 꽃을 피운 아테네야말로 그들의 장기를 써먹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도 사상가들이 자신의 이론을 써먹을 수 있는 제후국을 찾아다녔다. 공자도 자신의 정치사상을 받아줄 나라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는데, 그리스식으로 말하면 소피스트에 속한다고 하겠다. 프로타고라스, 고르디우스, 프로디코스 등 주요한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아테네인이 아니고 떠돌이 교사나 외교관으로 아테네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었다소피스트들은 이오니아 철학자들과 달리 ……란 무엇인가?”라는 방식의 질문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철학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목적을 지닌 탓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크게 격하되었고, 후대에도 중시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연에서 인간으로 철학적 대상을 바꾸어놓은 소피스트의 철학적 공헌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실용적인 기술을 주 무기로 한 만큼 소피스트들이 철학에 직접적으로 공헌한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오니아의 철학자들과 달리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로 요약되듯이, 소피스트들은 (자연) 세계를 분석하는 대신 (인간) 세계를 움직이는 기술을 철학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적 기준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모든 지식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오니아에서 발생한 철학의 품격을 크게 떨어뜨렸다.

 

 

소크라테스

 

더구나 소피스트의 활동이 광범위해지자 그렇잖아도 혼란스런 아테네의 지성계는 더욱 혼탁해졌다. 이때부터 소피스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궤변을 일삼는 자가 되었으며, 아테네 사회에 심각한 윤리적 타락마저 조장했다. 이런 소피스트들에 맞서 다시금 도덕을 강조하고 철학에 학문적 기초를 놓으려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아테네 출신이었고, 철학은 탄생한 뒤 내내 아테네 외곽을 돌다가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아테네에 입성한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폐해를 반대하는 데서 출발했으므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바로 지식 장사꾼인 소피스트를 겨냥한 것이다(원래 그 말은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문구지만 소크라테스가 애용해 후대에 유명해졌다). 소피스트들의 지식 상대론에 대항해 그는 절대적인 지식의 추구를 철학의 목표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애초부터 통일된 결론을 낳을 수 없었던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문제 제기와 달리,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지식이었다. 더구나 절대적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법은 다분히 상대적이었다. 독단적인 관념을 주입하거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산파술인데(그의 어머니는 실제로 산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대화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철학의 내용보다 철학의 방법으로 더 큰 철학적 업적을 남겼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최초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의 황금기에 산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만년은 불행했다. 늦은 나이에 후대에 악처로 유명해진 크산티페와 결혼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참전해 고초를 겪었다. 결국 그는 제자가 스파르타의 첩자였다는 모함을 받아 독약을 마시고 죽었으니, 아테네가 전쟁에 패배한 것은 엉뚱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그러나 앞서의 철학자들이 가죽을 남긴 데 그친 것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하나의 뛰어난 사상이 열 명의 제자를 당해내지 못하는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보다도 더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다(그가 제자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대화를 통한 토론 방식을 즐겨 사용한 덕분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사상을 계승한 것은 물론 직접 글을 쓴 일이 없는 스승을 대신해 많은 저술까지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내려진 독배를 받아 들고 있는 장면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뒤 불과 5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여기서도 아테네의 몰락은 뚜렷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인데,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던 화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계몽주의의 죽음을 경고하고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

이오니아에서 탄생한 철학

그리스로 옮겨온 철학

서양 사상의 골격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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