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큰 전쟁과 큰 혁명
최초의 세계대전
빌헬름 2세는 초조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영국과 프랑스가 쳐놓은 두터운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오스만에까지 접근했다.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멀리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 바그다드에서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은 비잔티움이었으므로 이른바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3B 정책이었으나, 이것은 케이프(남아프리카)-카이로(이집트)-캘커타(인도)를 잇는 영국의 더 넓은 3C 정책에 가로막혔다【아프리카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굶주린 이리처럼 저돌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마저 허겁지겁 먹어치운 데서도 알 수 있지만, 독일의 허기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중국에서였다. 독일은 중국을 아예 영토 분할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처럼 문명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유럽에서 거리도 먼 데다 수천 년의 제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직접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열강은 독일의 주장을 반대했으며, 당시 외세 배척 운동이 한창이던 중국 민중은 그 때문에 독일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1899년 의화단 운동이 산둥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도 바로 독일이 러시아 대신 산둥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종횡무진 동양사」, 375쪽 참조)】. 그러나 빌헬름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자신은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삼국동맹은 삼국협상을 이길 수 없었다.
독일에 못지않게 초조한 나라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차라리 “독일의 미래는 해상에 있다.”라고 외칠 수 있는 빌헬름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오스트리아에는 바다로 나갈 항구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발칸에 더욱 집착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인 발칸을 영토화하면 지중해로 향하는 항구도 얻게 되리라. 이런 생각에서 1908년 오스트리아는 발칸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일방적으로 합병해버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던 열강은 그 사실을 그냥 넘겼으나, 당시 발칸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세르비아는 격분했다. 애초부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탐내고 있던 세르비아 정부는 물론이거니와(당시 세르비아는 발칸에 슬라브족의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대세 르비아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국민들이 발칸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야욕을 알아차렸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거리에서 대낮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를 반대하는 비밀조직(흑수단의 회원인 프린치프라는 세르비아 청년이 군대 시찰을 위해 사라예보에 온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것이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뺌했으나 오스트리아는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흑수단은 바로 세르비아 정부에서 조직한 비밀 테러 단체였기 때문이다.
▲ 사라예보의 총성 모든 역사적 대사건이 그렇듯이, 발단은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진들은 사라예보 사건을 시간순으로 열거하고 있다. 맨 위는 사라예보에 도착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이고, 가운데는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프린치프가 체포되는 장면이며, 아래는 입관된 황태자 부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계기는 바로 이 사건이었다.
비록 황태자가 죽었지만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에 큰 손실이 아니었다. 왕조시대 같으면 왕위 계승이 걸린 문제지만 이제는 정치적 구실로만 이용될 뿐이다. 오히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세르비아의 야심을 꺾고 발칸을 쉽게 장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한 달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양측은 서로 외교 통로를 동원하면서 비교적 점잖게 사태를 이끌었다. 그러나 양측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는 외교 카드로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7월 말부터 사태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게 변했다.
드디어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가 그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소식은 곧바로 유럽 전체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우선 가뜩이나 발칸의 이해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러시아가 즉각 비상 태세에 들어갔다. 삼국동맹과 삼국 협상이 순발력을 보인 것은 이때였다.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같은 날 프랑스도 동원령을 내렸다. 이틀 뒤 독일군은 프랑스로 진격을 개시했으며, 그다음 날에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원래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은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만을 다루고 있었으므로 군사 조항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이유로 참전을 선언했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려면 벨기에를 거쳐야 했으므로 사실상 그것은 참전의 구실에 불과했다】. 7월 28일부터 8월 4일까지 불과 일주일 만에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에 속한 여섯 나라 중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전쟁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래 다시 유럽은 대규모 국제전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치열할 게 뻔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산업혁명이 유럽에 퍼지면서 유럽 각국의 공업은 크게 발달했고, 그 성과의 하나로 군사 무기가 개발되었다(그래서 1853년의 크림 전쟁을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한 나라를 유럽 각국이 방어하는 전쟁이었지만, 이번 전쟁은 유럽의 열강, 그것도 전 세계를 분할 지배하고 있는 국가들이 두 패로 나뉘어 벌이는 총력전이었다. 결국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지는 세계대전이 된다. 물론 20여 년 뒤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 진짜 화약고 서양의 역사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발칸 반도를 화약고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전쟁의 주요 이해관계가 서유럽 세계에 내재해 있었음을 다소나마 은폐하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진짜 화약고는 사진에서 당당한 자세로 걷고 있는 빌헬름 2세(앞 열 맨 왼쪽)였다. 그는 뒤늦게 뛰어든 식민지 쟁탈전에서 기존 열강의 지분을 빼앗기 위해 전쟁이라도 불사할 각오였다. 사진에서 빌헬름과 나란히 걷고 있는 인물들은 그의 여섯 아들인데, 불행히도 그들은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제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빌헬름 2세로 독일은 제국의 역사를 끝장내게 되니까.
신구 열강의 대결
전선은 예상한 것처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으로 갈렸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은 한편으로는 명분을 쌓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을 늘리기 위해 각자 중립국들을 영입하려는 활발한 외교전을 병행했다. 그 결과로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체질상’으로 일본은 동맹국에 속해야 하지만 영일동맹 때문에 본색을 숨겼다),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측으로 참전했고, 이듬해인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배반하고 연합국으로 참전했으며【이탈리아는 삼국동맹 소속이지만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여섯 나라 가운데 국력에서나 군사력에서 가장 약했으므로 어느 쪽으로 가도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전쟁과 더불어 전개된 어지러운 외교전에서 이탈리아의 거취가 가지는 외교적 가치는 컸다. 동맹국 측은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 남부 이탈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남티롤과 트리에스테를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연합국 측은 그것 이외에 달마치야까지 얹어주겠다고 제의했다. 당연히 이탈리아는 연합국 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국이 승리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탈리아는 줄을 아주 잘 선 셈이다】, 발칸에서도 불가리아는 동맹국에,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명실상부한 세계대전으로 변모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일으켰으나 삼국동맹의 리더는 독일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동맹국 세력은 독일이 이끌었다. 애초에 독일의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를 모두 상대해야 했을 뿐 아니라, 독일로서는 이번 전쟁이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은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먼저 프랑스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이동해 러시아를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격이 예상외로 빨랐다는 사실이 독일의 전략 수행에 중요한 차질을 빚었다(다시 한 번 러시아는 승부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과 싸우면서 병력의 일부를 빼돌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속전속결 구도는 깨어지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이제까지 역사상 어느 전쟁도 이렇게 장기전으로 전개된 경우는 없었다【기간으로만 보면 4년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짧은 편이다. 그러나 백년전쟁이나 30년 전쟁 같은 과거의 전쟁들은 그 기간 내내 싸운 게 아니었고, 전면전도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 기간 내내 전선이 존재했고 전투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상 최초의 장기전이었다】. 장기전은 단기전과 달리 총력전일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규모가 큰 전쟁이라 해도 군사력으로만 승부했지 전 국민이 동원되는 총력전을 펼치지는 않았다. 이는 그만큼 이번 전쟁이 각국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이미 각국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국민들까지도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개념을 확실히 숙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참전국들의 정부는 각자 자신의 국민들을 향해 애국심과 자발적 동원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호소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싹을 보인 ‘국민전’의 양상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처음부터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그 점을 여주는 한 가지 예로, 이탈리아 총리는 참전을 선언하면서 “조국의 신성한 이기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좋게 보면 국민전을 주창한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렇잖아도 국민들이 품고 있는 징고이즘과 쇼비니즘을 더욱 조장한 것이다】.
▲ 대륙 전체가 전선으로 17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 세계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집대성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보여주는 이 지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전역이 얽힌 세계대전의 면모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장기전이 되자 새삼스럽게 중요해진 것은 보급로였다. 특히 해외 식민지로부터 필요한 군수물자를 수송해 올 수 있는 해상 보급로가 중요했다. 장기전의 양상으로 1917년까지 전선이 교착되면서 팽팽하게 맞서던 전황이 깨지게 된 계기는 바로 바다에서 발생한다.
독일 해군은 전통에 빛나는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해권을 빼앗긴 독일은 물자 수송은커녕 그동안 획득한 해외 식민지마저 차츰 잃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독일은 비상 카드를 빼어들었는데, 이게 패착이 되고 말았다. 독일이 개발한 신무기인 잠수함 U보트는 북해를 장악한 영국 해군만이 아니라 민간 상선들에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으며, 나아가 중립국의 상선과 여객선마저도 침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뜩이나 동맹국 측에 불리한 세계 여론은 이것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동맹국에 등을 돌렸다. 그게 여론만이면 좋겠는데, 악화된 여론은 예상치 못한 ‘거인’을 불러들였다. 그전까지 군수품 수출로 재미를 보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이 1917년 4월에 참전을 선언한 것이다. 그해 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초 러시아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단독 강화를 맺고 철수를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레시아와 미국이 맞교대한 셈인데, 연합국 측으로서는 소총을 버리고 대포를 얻은 셈이었다.
미국의 육군이 유럽 전선에 투입되면서 독일은 육상전에서도 연합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승패의 윤곽이 금세 뚜렷해졌다. 원래 동맹국 측은 독일의 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전개한 전투에서는 거의 이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미군은 유럽에 상륙하기도 전에 힘을 발휘했다.
1918년 봄 곧 미군이 파견된다는 소식에 초조해진 독일은 그전에 전황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프랑스 북부의 솜 강에서 총공세를 벌였다.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독일은 개전 이후 최대의 영토를 획득했다. 그러나 무리한 공격은 곧바로 큰 후유증을 불렀다. 적진 깊숙이 들어간 탓에 전선이 너무 길어졌고, 병력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그런 판에 미군이 매달 30만씩 파병되자 독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여름이 되자 역전은 도저히 불가능한 형세였다.
종전 역시 개전에서처럼 발칸에서 시작되었다. 9월에는 불가리아가, 10월에는 오스만이 항복했으며, 이렇게 발칸 전선이 붕괴하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오스트리아도 11월 초에 항복했다. 그 일주일 뒤인 11월 11일 독일은 동맹국의 우두머리답게 휴전조약을 맺는 형식으로 항복했다.
▲ 전 국민의 전쟁 이전까지의 전쟁은 군대가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의 국제전은 참전국의 군대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후방에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선동이 중요했다. 위의 사진들은 그 정점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영국, 독일, 미국의 포스터다.
다시 온 수습의 계절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세계 분할이 완료되면서 제국주의 세계 질서가 일단 완성되었다. 어지러운 유럽의 국제 정세는 대립하는 두 개의 축으로 단순화되었다. 남은 것은 전쟁이든 외교든 양측의 이해관계를 정산하는 절차였다. 여기서 현실의 역사는 전쟁을 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양대 제국주의 세력이 맞붙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질서의 완료이자 새로운 재편을 향한 진통이었다. 이 전쟁에서 기득권층은 신흥 세력을 누르고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이 끝난 뒤 참전국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후 질서를 수립했고,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는 빈 체제가 교통정리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세기 초마다 터진 대형 국제전에서 유럽 각국은 전쟁이 끝난 뒤 늘 국제회의를 열어 국제조약을 맺고 전후 질서를 수립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전후 처리를 위해 연합국 수뇌들이 1919년 파리에 모였는데, 여기서 생겨난 새로운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른다.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자 국민전이었고, 25개의 참전국으로 전쟁의 규모도 사상 최대였다. 게다가 잠수함, 비행기, 비행선, 탱크, 독가스 등 각종 신무기도 선보였다. 무엇보다 전사자가 무려 1000만 명에 달한 재앙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는 의외로 쉬웠다. 그 이유는 참전국들이 확연히 두 패로 나뉘었고 승패가 명확히 판가름 났기 때문이다.
수습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를 확고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전 세계가 영국, 프랑스, 미국의 주도로 운영될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계는 소수의 ‘지배 국가’들과 다수의 ‘피지배 국가’들로 나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패전국들을 포함한 피지배 국가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우선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가 몰수되었고, 무기 생산도 금지 되었으며, 1320억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이로 인해 독일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는데, 이는 20여 년 후 독일이 다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나서는 계기가 된다). 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형적인 제국은 생겨난 지 50년 만에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분립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나라가 탄생했다. 민족적으로 이질적이면서도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보헤미아가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것이다. 원래 오스트리아는 영토와 민족에서 독일계 헝가리계·슬라브계로 나뉘어 있었으니, 패전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민족 국가의 멍에를 벗은 셈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전쟁의 계기를 제공한 세르비아는 두둑한 보너스를 챙겨 승전국과 패전국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바라던 대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물론 크로아티아까지 통합해서 발전적 해체를 이루어 새로 유고슬라비아라는 연방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오늘날의 유럽 세계를 기준으로 볼 때, 17세기 30년 전쟁으로 서유럽 국가들의 면모가 처음 드러났고,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서유럽 각국의 경계선이 확정되었다면, 20세기의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 국가들의 경계를 확정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수백 년의 시차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격차를 나타내는 듯하다】.
▲ 신무기 박람회 제1차 세계대전은 각종 신무기의 경연장과도 같았다. 독일은 잠수함과 비행선을 무기화했고 독가스를 신무기로 선보였다. 또 영국은 탱크를 실전에 처음 투입했다. 특히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개전 초기 비행기는 정찰용으로만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는 전투기도 출현했다). 왼쪽은 독일의 독가스에 대비하여 방독면을 쓰고 있는 프랑스군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해골로 발견된 독일군 병사의 모습이다.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국의 주요 세력이던 오스만 제국은 원래 연합국들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케말 파사(Kemal Pasha, 1881~1938)가 이끄는 공화주의자들이 반정부군을 구성하더니 유명무실해진 제국을 대신해 연합국의 간섭에 거세게 저항했다. 분할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어차피 이교도 세계인 소아시아를 영토적으로 지배할 자신이 없던 연합국은 결국 그들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케말 파샤는 연합국 측과 로잔 조약을 맺고 새로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로써 한때 동유럽을 호령하며 서유럽 세계까지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은 6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나라들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따라 교통정리만 해주면 되었다. 그에 필요한 신호등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시했다. 그것이 곧 민족자결주의, 즉 각 민족이 스스로 국가를 형성하고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원래 윌슨은 주로 유럽 지역을 염두에 두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고 베르사유 체제의 승전국들도 그렇게 이해했으나, 전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 민족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민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919년 한반도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바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바탕으로 일어났다【만약 일본이 패전국이었다면 한반도도 당연히 이때 독립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이 유럽에서만 벌어졌음에도) 승전국의 신분이었고, 승전국의 식민지는 베르사유 체제에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된 1910년은 세계적으로 열강이 식민지 정복을 거의 완료하던 시점이었으므로 세계 여론에 비친 한반도는 그저 열강에 먹힌 또 하나의 식민지일 뿐 별다른 주목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 우리처럼 인구가 무려 2000만 명에 달하는 식민지는 없었다고 보면 당시 세계 여론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연합국의 핵심이었다가 전쟁이 거의 끝나갈 즈음 배신한 러시아는 ‘괘씸죄’로 찍혀 패전국이 아니었음에도 패전국보다도 더 심한 제재를 받았다. 패전국이 아니니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연합국 측은 ‘역사적인 책임’을 묻기로 했다. 무려 2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초 북방전쟁으로 러시아가 얻은 발트 해 연안 지역을 독립시켜버린 것이다. 그에 따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이 신생국으로 탄생했으며, 폴란드와 핀란드가 독립을 얻었다. 폴란드인들은 100여 년 만에 독립을 얻은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189쪽 참조)에 참여한 독일(프로이센)·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모두 단죄를 받았으니 더욱 기뻤을 것이다.
한 가지 당시 연합국이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은 동양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진출이었다.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에 참전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차피 기본 전장은 유럽이니까 일본으로서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했으나 유럽 전선에 참여하기는커녕 전쟁 기간 동안 아시아에서 제 몫을 부지런히 챙겼다. 명분은 독일 식민지인 태평양의 작은 섬들을 접수하여 독일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애초에 목표로 삼은 중국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마침 산둥 반도는 독일의 조차 지역이었으므로 구실도 좋았다. 일본은 잽싸게 만주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산둥 반도도 이동시켜 독일군의 요새를 격파하고 중국 침략의 든든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 미국의 역할 전쟁의 종반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러시아가 맡은 역할 이상을 해냈다. 미국의 참전은 교착 상태에 있던 전황을 순식간에 연합국 측의 우위로 만들었다. 사진은 프랑스에 처음으로 상륙한 미군이 도열하고 있는 장면이다. 전쟁 중반까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었고 종전 이후에는 막강한 정치력까지 얻었으니, 미국으로서는 여러모로 유익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혁명의 러시아
1918년 4월 러시아가 전선에서 발을 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또 전후 연합국이 러시아에 거의 전범처럼 취급하고 특히 가혹하게 나온 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가지 이유는 사실 하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그전까지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것은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고, 전선에서 철수한 것은 새로 생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니 이렇게 본다면 러시아는 ‘배신자’도 아닌 셈이었다.
국가의 위상으로 따진다면 러시아는 전쟁에서 연합국이 아니라 동맹국 측이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선진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고 서유럽 국가도 아닌, 후발 제국주의 국가에다 슬라브족의 전형적인 동유럽 국가였으니까(게다가 아프리카에 식민지도 없었다). 그랬기에 러시아는 그 이전까지 수백 년 동안 영국, 프랑스와 항상 거리를 두었고 더 가까운 독일, 오스트리아와 교류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협상으로 서유럽 세계와 동맹을 맺는 ‘부자연스런’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순전히 차르 정부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이미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1868~1918, 재위 1894~1917)는 전대로부터 이어지던 차리즘으로 국내 정치를 탄압했으나, 서구에서 탄생한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 오히려 더욱 성장했고, 1898년에는 정식 정당까지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이름은 사회민주 노동당이었지만 사실상 최초의 공산당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공산당 선언』이 나온 지 50년 만에 드디어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의 정당으로 탄생한 것이다. 차르 정부에 의해 곧 불법화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공산당은 계속 존속하면서 세력을 키웠으며, 유럽의 공산주의 조직들과 연계해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했다.
물론 니콜라이가 러시아의 문제를 몰랐거나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하루빨리 러시아를 명실상부한 열강의 반열에 올리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차리즘 전제에 의존해서라도 국내의 정치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내외의 상황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904년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의 도전으로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국제 정세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 흔들리는 차리즘 차리즘이라는 혹독한 전제 체제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탓일까? 서유럽의 지식인들과 달리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자유주의를 넘어선 것을 원했다. 사진은 피의 일요일 사태 이후 황제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하고 나선 혁명적 민중의 모습이다(오른편에 한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은 니콜라이의 초상이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러시아 민중은 더 이상 차르에게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니콜라이가 이 요구를 거부한 것은 제국을 유지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다.
일본은 이미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만주에서 육군이 연패하고 황해에서 해군이 궤멸당하는 지경에까지 간 뒤에야 차르 정부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바로 그때 ‘피의 일요일’ 사태가 터졌다. 1905년 1월 22일(러시아력으로는 1월 9일)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5만 명의 수많은 군중이 차르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 위해 운집했다.
멀리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판에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그런 소요 사태를 차르 정부가 반가워할 리는 없었다. 친위대는 궁전으로 행진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사망했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 이후 수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나라 밖보다 안이 급해진 니콜라이는 일본에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양도하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사실 일본의 승리는 아슬아슬했다. 전투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아직 토대가 취약한 일본의 국력으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감당할 수 없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러시아는 두드려 맞으면서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일본은 거의 전 국민이 생업을 중단한 채 전시 체제에 동원된 데다 흉작까지 겹치고 전쟁 비용이 고갈되어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피의 일요일’은 결국 일본에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불행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한반도를 합병했다】 국민들에게는 의회의 창설을 약속해 간신히 사태를 무마했다.
그런데 위기를 넘기자 차르는 다시 반동으로 돌아섰다. 시대의 추세를 전혀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의회를 구성하고 농업 개혁을 하는 등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개혁 조치를 시행했으나, 문제는 혁명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차르 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사회민주노동당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1912년의 당 대회에서는 볼셰비키 급진파가 확실히 당을 장악하면서 레닌(V. I. Lenin, 1870~1924)이라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를 탄생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차르 정부에 크나큰 고통이었다. 발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만 저지하면 될 줄 알았던 정부는 전쟁이 장기화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재정은 곤두박질쳤고, 전쟁 동원령으로 식량마저 부족해진 민중은 분노했다. 전쟁의 터널이 아직 끝을 보이지 않고 있던 1917년 2월에 마침내 그 분노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페트로그라드(제1차 세계대전 중에 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12년 전처럼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으나 이제는 군대마저도 한 몸이 아니었다. 군대의 발포는 오히려 다른 병사들의 분노를 불러 ‘무장한 시위대’를 만들어냈다.
불과 한 달 만에 시위는 혁명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니콜라이는 제위를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미하일도 쥐약을 먹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결국 로마노프 왕조가 300년 만에 문을 닫았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이 사라지고 공화국이 새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1910년대는 ‘제국이 소멸하는 시대’였다. 1911년에는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청 제국이 무너졌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래 2000여 년에 달하는 중국의 제국사가 끝난 것이다. 러시아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의 세 제국도 제국의 명패를 내렸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제국 체제는 공교롭게도 모두 1910년 대에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도 서유럽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
▲ 늙은 공룡의 자만 10년 전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무릎 꿇린 일본이었지만 러일전쟁을 일으킬 당시 국제 여론은 일본이 이기기 힘든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탓에 유럽에서 ‘명예로운 고립’을 유지하면서 유일하게 아시아의 일본과 동맹(영일동맹)을 맺은 영국도 일본을 군사적으로 돕지는 않았다. 그림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일본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러시아 측 만화다.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
차르가 물러나자 일단 러시아의 정권은 의회에 넘겨졌다. 의회는 서둘러 임시정부를 구성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은 이번 혁명을 12년 전처럼 불발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혁명을 완성하려면 혁명정부가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가 함께 참여하는 소비에트(‘평의회’)라는 새로운 권력체를 만들었다.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와 민중이 구성한 소비에트 정부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1905년의 상황과 달라진 것은 소비에트가 생긴 것만이 아니다. 혁명적 대중 외에 볼셰비키라는 혁명의 지도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1917년 4월에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이것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였으나, 이미 볼셰비키와 동맹을 맺은 사회주의자들 중 상당수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다분히 모험적인 것이었다.
승산이 없는데 승부수를 던지는 바보는 없다. 레닌은 임시정부와의 힘겨루기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믿는 도끼’는 바로 전쟁을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국민 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려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국가 간의 약속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히 중요한 것이므로 임시정부의 노선은 명분에서 앞섰다. 하지만 혁명적 상황에서 대의명분이란 쓰레기나 다름없다.
6월에는 또다시 페트로그라드에서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여 러시아의 전쟁 중단을 소리 높여 외쳤고, 7월에는 병사들마저 무장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이 기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타도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족했다. 임시정부에게는 그게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 볼셰비키와 레닌을 제압했으면 사회주의혁명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전쟁에, 대내적으로는 혁명적 분위기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를 과소평가했다. 오히려 임시정부 최고사령관인 코르닐로프는 정부 수반인 케렌스키를 무시하고 군사독재를 실시하려 들었다. 결국 코르닐로프의 조급함은 또 한 차례의, 그리고 마지막이 될 혁명을 불렀다.
▲ 귀국하는 망명자들 1917년 4월 레닌은 32명의 볼셰비키 망명가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적국인 독일을 경유해서 러시아로 귀국했다. 사진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군중의 환영을 받는 레닌의 모습이다. 독일 정부는 그들에게 독일을 통과하는 동안 열차에서 내리면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는데, 그래서 그 열차를 봉인열차라고 부른다. 독일은 물론 사회주의를 혐오했지만 러시아로 귀국하겠다는 레닌의 요청을 들어주는 게 전쟁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레닌은 독일 정부에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겠다는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8월 말, 코르닐로프는 휘하 군대에게 수도 진격을 명령했다. 임시정부마저도 무시한 반란 행위였다. 볼셰비키는 이제 합법적인 자격으로 반란군을 막았다【볼셰비키는 이미 적군(赤軍)이라는 자체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레닌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이론가였던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는 1917년 4월에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로 적군을 편성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 적군은 러시아의 정규군이 된다】. 코르닐로프가 체포됨으로써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제치고 권력을 장악했다. 10월 23일, 껍데기만 남은 임시정부는 뒤늦게 볼셰비키를 공격하는 데 나섰으나 볼셰비키는 간단히 맞받아쳐 손쉽게 임시정부를 타도했다. 이것이 러시아에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성립시킨 10월 혁명이다.
이듬해 3월에 레닌은 볼셰비키당을 러시아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겨 새 헌법을 제정했다. 그런 다음 그는 혁명 전부터 주장하고 약속한 대로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 단독으로 강화를 이루었다. 굴욕적인 강화의 대가는 참담했다. 러시아는 독일에 핀란드와 발트 해 연안, 우크라이나를 내줘야 했다(전후 베르사유 체제는 러시아가 그 영토를 포기한 것을 추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출혈은 새로 탄생한 사회주의 정권이 안정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레닌은 스위스에 체류할 때 독일과 밀약을 맺고, 자신이 집권하면 전선에서 발을 빼겠다고 약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일 것이다. 실제로 1917년 4월 그는 독일 정부가 제공한 봉인열차(중간에 아무 역에도 서지 않는 직행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왔는데, 밀약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비록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과거의 러시아 제국과 다르다 해도 기존의 국제적 약속을 어긴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금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제국과 다르다는 이유로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는 것과 같다】.
레닌으로서는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 게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전선에서 발을 뺀 지 몇 개월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버린 것이다. 종전 자체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연합국 측에서 러시아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응징에 나섰다는 점이다. 게다가 서유럽 모든 정부에서 혐오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러시아에 들어섰기에 연합국들은 더욱 분노했다(자유주의 공화국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연합국들의 기세에 힘입어 러시아 내에서도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0년까지 이들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치러 마침내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당시 러시아에 진출한 연합국 군대들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군대는 바로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국제전에서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던 일본군은 대소간섭전쟁에서 처음으로 패배하고 비참하게 철수한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6장 최후의 국제전 (0) | 2022.01.02 |
---|---|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5장 불안의 과도기 (0) | 2022.01.02 |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0) | 2022.01.02 |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2장 완성된 유럽 세계 (0) | 2022.01.02 |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1장 각개약진의 시대 (0) | 2022.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