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간 알렉산드로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간 알렉산드로스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1:52
728x90
반응형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간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까지 정복해 페르시아의 수족을 모조리 자른 뒤, 이듬해 여름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로 진출했다. 이제는 페르시아로서도 더 이상 물러난다면 죽음을 의미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차피 싸우다 죽거나 굶어 죽거나 마찬가지라면 싸워야 했다. 페르시아는 가우가멜라 평원에 배수의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접전은 예고편에 불과했고, 이번의 전투가 전쟁 전체의 향방을 가늠하게 될 터였다. 전투를 하루 앞둔 날 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에게 이 전투가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다. 우선 양측 군대의 구성부터 국제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수천 킬로미터를 진군하는 동안 그때그때 현지의 병사들을 징발해 군대를 보강했다. 또한 아직 오리엔트의 패자로 군림하는 페르시아도 남북으로 이집트부터 중앙아시아까지, 동서로 인도부터 소아시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 내의 온갖 민족으로 군대를 조직해 맞서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래 200여 년 만에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공격과 수비를 바꾸고 또다시 대회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이 마지막일 게 확실했다.

 

페르시아는 병력의 규모에서도 앞섰지만 전차가 믿는 도끼였다. 그리스에서 벌인 침략전에서는 그리스의 지형적 여건상 전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평원에서는 전차가 최고 아닌가? 그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장기는 기병 전술인데, 기병으로 전차를 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페르시아의 믿는 도끼는 다리우스 3세의 발등을 찍었다.

 

기병 전술에 능하다는 것은 적재적소에 기병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보병으로 페르시아의 전차 부대에 맞섰다. 원래 그의 기병 전술은 기병이 전면에 나서는 게 아니라 밀집대형의 보병들이 적을 막고 있는 동안 적의 약점이나 측면을 겨냥해 기병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필리포스에게서 배운 전군 공조 전술인데, 탁월한 조직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전이기도 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잘 구사한다는 것만 알았지 어떻게 구사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대패한 페르시아는 결국 멸망했다(오늘날의 이란이 그 후예지만 역사상 가장 위명을 떨쳤던 때는 2000여 년 전 페르시아 시대였다). 마케도니아군은 찬란한 오리엔트 문명의 중심지였던 바빌론과 수사, 페르세폴리스 같은 도시들을 마음껏 유린했다. 특히 페르세폴리스의 엄청난 황금은 마케도니아가 헬레니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귀중한 밑천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예언대로 과연 가우가멜라 전투는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했다. 200년 동안 오리엔트의 주인이었던 페르시아가 멸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내친 김에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가보리라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이미 그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이루지 못한 천하 통일의 꿈을 실현했으니 남은 정복 과제는 그것뿐이었다).

 

숙원이었던 페르시아 정복을 이루자 알렉산드로스는 목표를 더욱 넓혔다. 동쪽으로 계속 가면 무엇이 있을까? 원정을 출발할 때의 목표를 이룬 뒤에도 그의 군대는 행군과 전투를 계속해 힌두쿠시를 넘고, 기원전 327년에는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마케도니아는 현지의 소국들인 탁실라와 제름을 간단히 제압했고, 라비 강변에서는 10만 명에 이르는 인도 연합군마저 격파했다. 그러나 남쪽의 인도 내부를 향해 진군을 계속하려던 차에 문제가 터졌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7, 알렉산드로스의 용감한 병사들도 지쳤다. 더구나 이제부터는 인도 소국들과의 전쟁만이 아니라 무더위, 정글과도 싸워야 했다. 병사들의 거듭된 탄원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철군을 결정하고 기원전 324년에 페르시아의 수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는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본 세상의 동쪽 끝은 인도였다. 그런 그의 세계관은 훗날 유럽이 중국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때까지 내내 유럽인들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인류의 고대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이 남긴 영향력은 엄청났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이 완전히 사라졌고, 페르시아의 넓은 강역은 세 개로 분할되어 알렉산드로스의 부관들이 하나씩 꿰찼다. 또 인도에는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물러간 힘의 공백에 힘입어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제국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명의 고향에 해당하는 오리엔트가 그리스와 더불어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바로 헬레니즘 문화다.

 

 

전쟁 혹은 살육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전투 장면을 담은 조각으로, 시돈(지금의 시리아)에서 출토되었다. 투구와 무장을 갖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비무장 상태인 페르시아인들을 살육하고 있으니, 전투 장면이라기보다는 살육 장면에 더 가깝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폴리스 체제의 종말

왕국에 접수된 폴리스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간 알렉산드로스

그리스+오리엔트=헬레니즘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