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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휩쓴 공간을 찾아 - 6. 닫는 글: 자본이 쳐둔 그물망을 전태일 정신으로 넘기 본문

연재/배움과 삶

자본이 휩쓴 공간을 찾아 - 6. 닫는 글: 자본이 쳐둔 그물망을 전태일 정신으로 넘기

건방진방랑자 2019. 4. 2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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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닫는 글: 자본이 쳐둔 그물망을 전태일 정신으로 넘기

 

 

용산참사에선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쌍용차 사태22명의 희생자가 났다. 도합 28명의 목숨이 자본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 사라지고 만 것이다.

 

 

두 사태에 대해서는 오히려 여론이 모든 것을 덮어씌웠다.

 

 

 

박근혜의 목숨28명의 목숨

 

2006년에 박근혜 대표가 ‘5세훈이의 유세를 위해 단상에 오를 때, 칼날테러를 당했다. 상처가 깊지도 않았는데, 테러범(?)은 연일 언론에 신상을 털렸고 징역 10년형을 구형 받았다.

 

 

'살인적 테러리즘이 발붙지 못하도록 엄정수사하라'며 여론이 들끓었다.

 

 

한 사람이 단지 살짝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이와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면, 28명이 목숨을 잃은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됐어야 맞다. 하지만 실상 현실은 달랐다. 언론은 초기에 관심을 보이다가 순식간에 누그러졌고 법원은 오히려 불법행위를 했다며 피해자에게 법의 칼날을 대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사람 목숨이 지위나 영향력,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혈기가 있는 것은 백성으로부터 소ㆍ말ㆍ돼지ㆍ양ㆍ곤충ㆍ땅강아지ㆍ개미에 이르기까지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같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큰 생물만이 유독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생물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개와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기에 거론하여 대구를 삼은 것이지 어찌 일부러 서로 놀린 것이겠습니까.

予曰: “凡有血氣者, 自黔首至于牛馬猪羊昆蟲螻蟻, 其貪生惡死之心, 未始不同, 豈大者獨惡死, 而小則不爾耶? 然則犬與蝨之死一也. 故擧以爲的對, 豈故相欺耶.

 

당신이 믿지 못하겠거든 어찌 당신의 열 개 손가락을 깨물어보지 않습니까? 유독 엄지만이 아프고 나머지는 안 아픕니까? 하나의 몸에 있는 것 중에 크냐 작냐 지엽적이냐 중요하냐가 없이 고르게 피가 흐르고 살이 있기 때문에 아프다는 건 동일한 것입니다. 하물며 각각 기와 숨을 받은 것이라면 어찌 저것은 죽기를 싫어하는데 이것은 즐기겠습니까.

子不信之, 盍齕爾之十指乎? 獨拇指痛, 而餘則否乎? 在一體之中, 無大小支節, 均有血肉. 故其痛則同. 況各受氣息者, 安有彼之惡死而此之樂乎? -李奎報, 虱犬說

 

 

위의 글에서처럼 28명의 목숨은 이()와 같은 거였고, 1명의 목숨은 개()와 같은 거였다. 한줌 재로 돌아가면 똑같은데도, 사람이 지닌 어떤 것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게 씁쓸하기까지 하다. 이러니 누구나 메추라기가 되기보다 붕새가 되려 아등바등 하는 걸 테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말하는 걸 거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결코 옳은 게 아니다. 사람의 목숨은 지위나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규보도 존재의 가치를 다르게 판단하는 사람에게 당부하고 있다. 존재가 지닌 외적 가치에 상관없이 뭇 생명체는 모두 귀하다고 말이다. 그런 걸 모르겠으면, 고요한 가운데 명상하며 생명체의 본질을 깨달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우리도 자본이란 논리로 사람을 분류하는 습성에 찌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 바로 그와 같은 습성을 벗어 생명의 본질을 볼 수 있을 때, 두 사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무용총에 그려진 벽화에도 계급에 따라 사람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다.  그 시대엔 계급이, 이 시대엔 돈이 사람을 나눈다.

 

 

 

 

 

전태일 정신으로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넘어서기

 

공장이 노동자를 왕따시키고 건물이 세입자를 왕따시키는 상황을 보았다면, 자본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쯤에서 우린 전태일 열사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배우지 못한 노동자 출신임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이유가 있다. 그건 자신을 되돌아 볼 줄 아는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냈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이야. -1967. 2. 14 전태일 일기에서

 

 

이 글을 읽고 찔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보람 없이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들은 아쉬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란 그저 그런 거라며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그런 현실이니 윗글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는 보람 없이 보낸 하루를 아쉬워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단지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타락했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난하게 보낸 하루, 아무 생각 없이 보낸 하루에 대해 타락했다고 비판할 수 있는 경지는 어떤 경지란 말인가?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생각하는 삶의 단계를 넘어 안주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는 치열함의 단계까지 나가는 것이다. 그런 치열함으로 살 때, ‘자본이 촘촘히 쳐놓은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사람 향기 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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