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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2. 1. 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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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팍스 로마나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감각과 리더십이 뛰어났고, 45년이나 재위할 만큼 건강도 좋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자질보다도 더욱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제정을 이루면서 로마 제국도 평화를 되찾고 번영을 구가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재산이 불어나는 속도는 제국이 성장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특히 이집트의 정복으로, 그렇잖아도 로마 최대의 부자인 그는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이렇게 황제를 최대의 부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로마 황제와 비슷한 시기 중국 황제의 차이를 말해준다. 중국 황제는 제국 전체의 주인이었고, 천자라는 칭호처럼 하늘의 아들이었으므로, 부자라는 용어 자체를 쓸 수 없다. 그에 비해 로마 황제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서열 1위 시민이라는 신분이었고, 중국 황제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중국 황제는 정치적 권위와 권력만으로도 제국을 지배할 수 있었으나 로마의 황제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권력을 지니기 위해 늘 개인 재산을 소유해야했다. 오늘날의 용어로 비유하면, 중국 황제는 제국의 주인이었고, 로마 황제는 제국의 최고 경영자였다.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정복한 지역이므로 황제의 개인 재산이 된 것이다(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계승자라는 신분으로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 밖에 로마 속주들 가운데서도 황제 직속 관할로 편입된 곳에서는 모든 세금이 황제의 몫이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는 신분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이 점을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원로원이었다제정하에서도 로마 원로원은 사라지지 않고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재했다. 집정관, 법무관, 정무관, 호민관 등 공화정 시대의 주요 관직들도 마찬가지로 제정시대에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시대에 정치의 주체였던 원로원은 제정 시대에 들어 황제의 통치 도구로 위상이 하락했다.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직도 거의 세습되면서 로마 제국의 고위직 관료를 충원하는 주요 기관이 되었다. 그를 황제로 만들어준 대가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여러 차례 부탁해 국가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얻어내곤 했던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기꺼이 사재를 출연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시절의 상당 기간을 속주들의 순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수많은 로마 병사가 뼈를 묻은 파르티아부터 쳤을 것이다. 시리아까지 간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파르티아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모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판단한 그는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국경을 다지는 데 만족했다.

 

 

그런 아우구스투스가 유일하게 욕심을 낸 지역은 북쪽이었다. 갈리아까지는 이미 로마의 속주였으나 그는 거기서 조금 더 동쪽, 라인 강 너머 게르마니아를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만들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라인 강이 아닌 엘베 강을 경계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기원전 13년 그는 제위에 오른 뒤 처음으로 원정군을 북쪽으로 보냈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저항은 완강했다. 개전 초기 연승을 거두면서 게르마니아의 삼림지대를 거쳐 엘베 강까지 진군한 로마군은 대장인 드루수스가 말에서 떨어져 죽으면서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

 

그 뒤부터 로마는 계속 북벌을 준비했으나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와 일리리쿰에서의 반란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 9년에는 오히려 라인 강 주둔군이 게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3개 군단이 전멸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그제야 비로소 제국은 북벌을 포기했다.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는 지금의 독일에 해당하므로, 만약 당시 로마가 엘베 강 유역까지 손에 넣었다면 프랑스만이 아니라 독일도 라틴 문화권에 속했을지도 모른다(언어적으로도 프랑스어는 라틴어족이지만 독일어는 게르만어족으로 분류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군이 갈리아를 정복하던 카이사르 시대의 로마군보다 약했던 탓일까, 아니면 게르만족의 저항이 갈리아인보다 강했던 탓일까? 그보다는 황제의 정복 의지가 카이사르보다 약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로마의 영토는 확정되었다. 로마 제국이 최대 영토에 이르는 시기는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이미 로마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쳐(아울러 브리타니아 섬의 절반까지) 지중해를 완전히 한 바퀴 도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다로마 영토가 지중해를 한 바퀴 돌게 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주요한 정복들을 정리해보자. 기원전 272년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룬 로마는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정복하면서 서부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에스파냐는 자연히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카르타고 서쪽의 북아프리카도 로마의 영향권에 들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미트리다테스를 정벌하고 시리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소아시아에서 이집트 동부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했다. 마지막 남은 지중해 세계의 한 곳인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기원전 52년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해 영토 팽창에 한몫 거들었다). 이제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더 이상 정복은 없다

내실 다지기

초기 황제들

평화와 번영의 준비

로마의 평화

서양 문명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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