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평화
네르바의 치세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을 흔히 ‘5현제(五賢帝) 시대’라고 부른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이어 다스렸다는 데서 나온 말인데,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유명한 말을 낳은 시대이기도 하다. 그 한복판에 트라야누스가 있다.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출신인데, 속주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는 속주의 운영과 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다. 그의 치하에 속주들은 로마 본토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속주가 발달해야 제국의 면모가 제대로 선다는 점에서 트라야누스는 진정한 로마 제국을 성립시킨 황제였다.
물론 트라야누스가 속주 경영에만 힘썼다면 로마 시민들은 섭섭했을 것이다. 그는 시민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겼다. 그것은 알리멘타(alimenta)라고 불린 사회복지 프로그램이었다. 이 계획으로 로마의 빈민들과 소년·소녀 가장들은 오늘날 복지국가의 수준에 뒤지지 않는 혜택을 누렸다. 더구나 과도한 사회복지 정책으로 국가 재정이 취약해지는 오늘날 복지국가들의 골치 아픈 문제도 없었다. 국가가 농민들에게 빌려준 토지에 대해 농민들이 내는 이자를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답지 않게 트라야누스는 제국 전체의 경제와 속주들의 재정을 꼼꼼하게 감독하고 통제했다. 속주에는 정기적으로 황제 직속 감사관을 보내 철저한 회계 감사를 실시했다.
이렇게 대내적으로 뛰어난 행정관의 면모를 보였는가 하면, 대외적으로는 군인다운 풍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로마 제국은 한동안 끊겼던 정복의 고삐를 다시금 거머쥐었다. 도미티아누스 때부터 로마에 저항한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를 정복한 사실은 유명한 트라야누스의 기둥에 조각으로 상세히 전해진다. 더 큰 군사적 업적은 파르티아 정벌이었다.
파르티아라면 일찍이 150년 전 크라수스가 군기를 빼앗기고 전사한 뒤부터 로마가 복수의 칼을 갈던 곳이다. 트라야누스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 페르시아 만까지 적을 밀어냈다(그래도 파르티아는 멸망하지 않았고 3세기 초반에 유럽의 로마가 아니라 아시아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다. 당대 세계 최강 로마를 끊임없이 괴롭힌 로마의 숙적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동방 진출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잠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꿈을 꾼 것까지는 좋았으나 트라야누스는 개인의 운명조차 대왕을 따르고 말았다.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 소아시아에서 죽은 것이다.
황제가 급사했어도 제위 계승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 이유는 양자 상속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황제의 혈통이 자주 끊어지는 것을 보았고, 혈통을 따른다고 해서 늘 현명한 군주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양자 상속제 덕분이 컸다(같은 시기 중국인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로마의 황제들은 아들이 없어 제위 계승에 애를 먹었지만, 중국의 황제들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많아 제위 계승이 혼란스러웠다. 맏아들이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평상시에는 순탄했으나 언제든지 제위를 놓고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런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6세기 말 당 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이나, 15세기 초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즉위한 게 그런 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도 로마의 양자 상속제에 못지 않게 현명한 제위 계승 제도가 출현한 적이 있다. 18세기 초 청의 옹정제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는 제도를 만든다. 미리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고 평소에 점찍어두었던 아들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밀봉해두고 황제가 죽은 뒤 개봉하는 방식이다. 양자 상속제보다는 제한적이지만 혈통과 장자 상속을 크게 중시한 중국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한족 왕조가 아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 최대의 영토 트라야누스는 중앙 권력을 안정시킨 뒤 북부의 정복에 나섰다. 이 정복의 과정은 현재 로마에 높이 40미터, 지름 4미터의 거대한 트라야누스 기둥의 벽면에 조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진은 그 일부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자랑한다.
트라야누스의 제위는 그와 동향 사람인 하드리아누스(Pablius Aelius Hadrianus, 76~138)가 이었다. 트라야누스가 행정관의 풍모를 지녔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서민적 풍모에 가까웠다. 그는 군대와 함께할 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이 먹고 잤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대내 정책은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대외적 정책은 정반대로 바꾸었다. 즉 속주의 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더 이상의 정복 활동은 하지 않았다(그는 역대 황제들 중 가장 많이 속주를 순방한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였다. 삼킬 수 없는 것은 모조리 버린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파르티아 정벌은 완전히 포기했다. 또한 브리타니아 섬을 전부 손에 넣겠다는 해묵은 꿈도 버렸다. 그는 기존의 브리타니아 속주(지금의 잉글랜드)만을 온전히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와의 경계선에 길이 120킬로미터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당시 브리타니아 남부에서 쫓겨난 켈트족은 북부 칼레도니아와 아일랜드로 이주해 있었다). 이것을 하드리아누스 장성이라 부르는데, 오랜 기간 동안 석재가 다른 건축물에 이용되어 지금은 높이가 1미터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장성이 아니었다면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은 없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는 온화한 성품에다 대부호이면서도 근검절약에 힘쓴 황제였으나 다른 4현제‘에 비해 업적은 다소 처진다. 그러나 23년의 치세 동안 덩치 큰 제국을 무사히 이끌었다는 것은 그만큼 선정을 펼쳤다는 이야기다. 전임 황제처럼 안토니누스도 브리타니아에 장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70킬로미터로 더 짧았지만 위치는 10킬로미터나 더 북쪽이었다. 이 안토니누스 장성 덕분에 브리타니아 속주의 영토는 섬의 8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로마는 끝내 섬 전체를 식민지화하지는 못했다. 황제가 죽었을 때 원로원은 그의 높은 덕을 기려 ‘경건(Pius)’이라는 수식어를 이름 뒤에 붙여주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칭송하며 기념비와 신전을 건축했다.
▲ 영국의 ‘만리장성’ 트라야누스의 정복 사업은 하드리아누스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브리타니아의 절반을 정복하여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다란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이 아니었다면 이후 영국의 중세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장성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길이도 훨씬 짧고 높이도 4.5미터로 만리장성의 절반 정도다.
결과를 놓고 말한다면 안토니누스의 최대 업적은 후계자 선정일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로마의 모든 황제 중 최고로 꼽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가 바로 그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실은 하드리아누스가 이미 마르쿠스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안토니누스에게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황제로서, 또 『명상록(tôn eis heauton diblia)』의 지은이로서 유명하지만, 마르쿠스는 사실 걸출한 정복 군주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명상록』도 궁전에서 한가로이 명상하면서 쓴 책이 아니라 전쟁터의 막사에서 썼다).
파르티아가 다시 변방을 공략하자 아우렐리우스는 즉각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참에 아예 파르티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로마의 손에 멸망하지 않을 운명이었다. 뜻하지 않은 파르티아의 구원군이 온 것이다. 그 구원군은 아주 작았으나 무시무시했다 바로 페스트였다. 앞서 본 페리클레스의 죽음처럼(137쪽 참조) 서양사의 물줄기를 여러 차례 바꾼 페스트는 철군하는 로마군의 몸에 실려 이탈리아까지 퍼졌다(일부 역사가들은 이 페스트가 로마 제국의 쇠퇴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경 북쪽의 중부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이 대거 제국을 침략했다.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였으나 호전적인 아우렐리우스는 오히려 그것을 북벌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로마의 국경을 다시 엘베 강까지로 넓힐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언제나처럼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전장에서 병사했다. 당시 그의 북벌이 성공했더라면, 로마는 5세기 말에 적어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로마 세계 팍스 로마나 시대 지중해를 한 바퀴 두른 로마 제국의 영토다. 오늘날 유럽 세계의 원시적 형태를 보는 듯하다. 오늘날의 지명과 같은 곳도 있고 다른 곳도 있는데, 한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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