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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서양 문명의 뿌리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서양 문명의 뿌리

건방진방랑자 2022. 1. 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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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문명의 뿌리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세계의 패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로마는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정복의 중단을 유언으로 남겼을 무렵, 이미 로마는 더 이상의 정복이 필요 없는 제국이 되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정복은 밀린 숙제를 해결한 것일 뿐 예전처럼 정복의 절실한 필요성에서 강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로마는 정복하지 않아도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 하나의 예가 라티푼디움이다. 노예 노동으로 경작하던 라티푼디움은 처음 생겨날 때만 해도 정복이 계속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노예는 주로 정복에서 획득한 전쟁 포로들로 충원했기 때문이다. 정복이 줄어듦에 따라 노예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수시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그럼 라티푼디움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일했어도, 제국을 이루었어도 여전히 농업 국가였으며(이 점이 그리스와 큰 차이다), 농업의 중심은 여전히 라티푼디움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 라티푼디움을 존속하게 해준 잇몸은 콜로나투스(colonatus, 소작제)였다. 노예가 줄어들면서 지주들은 콜로누스(colonus,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급하고 소작료를 받아먹는 것으로 경영 방식을 전환했다. 이것이 나중에 중세 장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한 가지, 로마 제국에서 중세를 예감하게 해주는 것은 에퀴테스다. 정복을 끝내고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에 가장 필요한 인력은 군대보다 행정 관리였다. 소수의 원로원 귀족들이나 라티푼디움을 경영하는 지주들이 담당할 수는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에퀴테스 계층이 관리 인력으로 충원되었다. 제정이 성립하면서 에퀴테스는 공식적으로 제2의 계층임을 인정받았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개인 소유인 이집트 속주의 총독으로 에퀴테스를 임명했을 만큼 에퀴테스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황제인 그로서는 정치가 보다는 행정가가 더 필요했을 터이므로 귀족보다 에퀴테스를 더 신임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이 나중에 중세의 주요 신분 가운데 하나인 기사 신분을 이루게 된다.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로마 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라틴 문화권을 형성했다. 지중해는 로마의 앞바다가 되었고(로마인들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와 속주들, 그리고 속주와 속주를 잇는 방대한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교통망의 발달은 무역의 증대를 가져왔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였지만 속주들은 다양했다. 특히 그리스와 아시아 속주들의 전통적인 무역 활동은 로마 제국이 단일한 문화권을 이룬 덕분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아라비아 대상(隊商) 무역이 생겨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낙타를 이용해 동방의 물품들을 부지런히 지중해 세계로 실어 날랐다. 특히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향료는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신비한 동양의 이미지를 심었다. 이때 향료를 처음 맛본 유럽인들은 1000여 년 뒤에 향료를 찾아 동양으로 활발히 진출하게 된다.

 

로마 세계에는 약 7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수백 개의 민족들을 이루어 살고 있었지만, 그 다양성의 근저에는 제국의 통합성이 흐르고 있었다. 우선 로마어(라틴어)만 알면 로마 세계 어느 곳이든 다닐 수 있었다(문명의 전통이 오랜 동부 지중해 세계에서는 라틴어보다 그리스어가 많이 쓰였지만 그래도 라틴어면 다 통했다). 또한 통화 체계나 법률, 무역 관습도 어디서나 동일했다.

 

단 한 가지, 종교만은 예외였다. 로마의 전통 종교는 어느 속주에도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 종교의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제국의 중앙정부 역시 로마의 종교를 굳이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고 대체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다. 탄압을 받은 종교는 드루이드교, 유대교, 그리스도교뿐이었다. 드루이드는 켈트족의 사제를 말하는데, 자연신을 믿는 그들은 사람의 머리를 신에게 바쳤으므로 문명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특유의 배타성 때문에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장차 제국의 말기에 그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명맥을 쥐고 흔들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라틴 문화권의 통일성은 특히 도시의 발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유럽과 아시아 속주의 도시들은 대부분 로마 이전 시대부터 있었지만, 서유럽의 도시들은 대부분 로마 시대에 창건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일찍부터 로마의 식민시로 출발한 독일의 쾰른을 비롯해 프랑스의 파리 랭스 아비뇽 보르도 스트라스부르, 스위스의 제네바, 오스트리아의 빈, 영국의 런던 콜체스터, 링컨, 요크, 세인트올번스, 에스파냐의 사라고사, 톨레도 코르도바 등 현대 유럽의 많은 주요 도시가 모두 로마 속주의 도시로 출발했다(독일의 도시들이 적은 이유는 게르만족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혀 로마 국경이 엘베 강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 사회 체계, 산업, 관습, 문화, 도시 등 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에서 로마는 그리스에 이어 서양 문명의 두 번째 뿌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로 대변되는 뿌리의 성숙기를 지나자마자 로마 제국은 기초공사가 부실한 건물처럼 일거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더 이상 정복은 없다

내실 다지기

초기 황제들

평화와 번영의 준비

로마의 평화

서양 문명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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