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황제들
쉰다섯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는 애초부터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카리스마를 이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가 친위대장인 세야누스에게 정치를 맡긴 채 나폴리 앞바다의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생선을 잘 관리할 리는 만무하다. 세야누스의 전횡으로 로마 정치는 엉망이 되었으며, 그 욕은 티베리우스가 고스란히 얻어먹었다. 덕분에 황제가 죽자 로마 시민들은 환호를 올렸고, 타키투스(Cornelius Tatitus, 56년경~120년경)를 비롯해 후대의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에 대한 혹평에 열을 올렸다.
티베리우스에 뒤이어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Gaius, 12~41)가 잠시 제위를 계승했지만 그는 정신 질환에 걸려 잔혹한 짓을 일삼다가 암살당함으로써 황제가 암살되는 전통의 첫 희생자로 기록되었다(그는 칼리굴라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숙부로서 제위를 이은 클라우디우스(Claudius, 기원전 10~기원후 54) 때에 이르러 비로소 아우구스투스의 전통이 다시 회복된다.
다리를 절고 말을 더듬는 장애를 가진 데다 작고 깡마르고 볼품 없는 노인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재를 펼쳤으나 대외적으로는 사뭇 진취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도 포기했던 영토 확장 정책을 재개한 그런 예다. 그는 동쪽으로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흑해 연안까지 영토화했으며,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지금의 모로코 북부와 알제리 중서부에 해당함)를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업적은 브리타니아 정복이다. 카이사르가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브리타니아에 발을 디딘 이후 100년이 넘도록 로마는 브리타니아를 방치해두고 있었다 (40년에 가이우스가 갈리아로 가서 브리타니아 공격을 준비하다가 중단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43년에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을 받은 플라우티우스가 이끄는 4만 명의 로마군은 브리타니아의 여러 부족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면서 템스 강에 이르렀다. 클라우디우스는 직접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독전했다. 황제의 왕림에 사기를 얻은 로마군은 콜체스터까지 밀고 올라가 100년 전처럼 다시 브리타니아 남부를 장악하고 속주를 설치했다. 브리타니아가 로마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다(아울러 영국의 ‘알려진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도 이때부터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였으나 내치에서 황제의 업적은 눈부셨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많은 도로와 수도, 항만 시설 등을 건설했을 뿐 아니라 행정에 에퀴테스 층을 적극 참여시켜 행정력을 강화했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갈리아, 그리스, 에스파냐 등지로 대폭 확대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갈리아와 에스파냐의 로마화는 훨씬 지연되었을 테고, 이후 이 지역이 라틴 문화권으로 통합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보다 어려운 게 제가(齊家)일까? 10여 년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제국화를 공고히 다졌던 클라우디우스도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가정 문제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슬하에 아들도 없었지만 더 큰 문제는 아내들이었다.
그의 아내 메살리나는 야심이 크고 방탕한 여자였다. 야심과 방탕이 합쳐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녀는 자신의 정부와 손잡고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결국 음모가 탄로나 처형되고 말았으나 클라우디우스의 처복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다음 아내인 아그리피나는 자기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제위에 앉히기 위해 황제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사필귀정일까?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 섭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려던 아그리피나는 결국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 아들이 바로 악명 높은 네로(Nero, 37~68)다. 아들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던 아그리피나는 네로에게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기원후 65)【세네카는 부자(父子)가 모두 철학자이름을 날렸는데, 네로의 스승이 된 세네카는 아들, 즉 소(小)세네카다. 그는 인생론과 도덕론에 관한 책을 후대에 남겼지만 황제-제자인 네로에게만은 인생과 도덕을 가르칠 수 없었다. 어린 네로에게는 잠시 그의 가르침이 먹혔으나 이내 네로는 스승을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세네카는 반역을 꾀했다가 탄로가 나 자살하고 말았다】를 스승으로 붙였다. 그러나 열여섯 살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역대 최연소 황제 네로는 누구의 간섭도 귀찮을 따름이었다. 어머니에 이어 아내까지 살해한 그는 64년 또 하나의 중범죄를 저질렀다.
로마 시에 큰 화재가 났을 때 그리스도교도들을 방화범으로 꾸며 탄압한 것이다(당시 그리스도교는 불법이었다). 수백 년 뒤 그리스도교가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그가 알 수 있었을까? 그 때문에 가뜩이나 평판이 좋지 않았던 네로는 이후 수천 년 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에게서 폭군의 대명사로 불렸다. 반면 그가 예술적 재능과 감각이 뛰어났으며, 노래와 하프 연주 솜씨가 탁월한 예술가 황제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 폭군 네로 네로 황제는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었으나 특히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것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더욱 나쁜 평점을 받았다. 그림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있는 모자이크화인데,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와 바울을 네로에게 고발하는 장면이다. 시몬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이단으로 불리는 그노시스파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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