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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내실 다지기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4장 팍스 로마나, 내실 다지기

건방진방랑자 2022. 1. 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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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실 다지기

 

 

약관의 나이에 로마 정계의 거물이 되었고 서른이 채 못 되어 제위에 오른 뒤 45년을 최고 권력자이자 재산가로 살았던 복 많은 사나이 아우구스투스는 14,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꿈인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라는 내용을 유서로 남기고 죽었다.

 

정복이 끝났으니 이제 로마는 어떻게 될까? 원래 로마는 정복이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로마가 유년기일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의 로마는 힘도 약했고, 곳곳에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장성했고, 주변의 적들을 모조리 물리쳐 이제부터는 정복이 없어도 제국을 유지할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다.

 

덩치만 크다고 어른이 아니듯이 영토만 넓다고 제국인 것은 아니다. 무늬만 제국이 아니려면 제국 내의 모든 영토에 단일한 행정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은 아우구스투스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로서의 로마는 청년기였어도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유년기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영토가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인구, 특히 로마 본토의 인구는 적다는 점이었다. 우선 사람이 있어야 행정을 하는 무엇을 하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적극적인 인구 증가 정책을 실시했다. 결혼을 장려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것을 아예 법으로 정했다. 독신자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조치였고, 결혼을 해도 자식이 없으면 큰 불이익을 받았다. 반면 자식의 수가 많은 부모에게는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심지어 오늘날 대다수 서구 국가들에서는 폐지된 간통 금지법이 제정된 것도 그 무렵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역점을 둔 또 하나의 개혁은 군대였다. 사실 공화정 시대에 군대는 상비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술라나 폼페이우스 등 군사령관들이 권력에 다가설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로마의 군대가 국민군이라기보다는 사병(私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위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황제도 사병이 필요했다. 하지만 황제의 사병은 근위대나 친위대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다.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1000명씩의 병력으로 9개 부대의 친위대를 구성한 다음, 본격적인 군대 개혁에 나섰다.

 

 

또 한 명의 황제 신생 제국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신생 황제가 차츰 권력을 안정시켜갈 즈음인 기원전 4년 무렵, 제국의 동쪽 끝에서 또 한 명의 황제가 태어났다. 그는 황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더러운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세속의 황제가 아니라 신성의 황제이니 당연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리스도교의 황제, 이 두 황제는 이후 서양의 중세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된다.

 

 

정복 전쟁이 끝난 이상 군대의 임무도 달라져야 했다. 이제부터 군대는 속주의 치안을 유지하고 국경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이때부터 로마 시에는 군대의 주둔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각 속주에는 속주민들로 충원한 별도의 군대가 창설되었다. 게르마니아 정복에 나섰던 갈리아 군단이 대표적인 예다. 로마 병사들은 봉급도 대폭 인상되었다. 하지만 복무 기간이 무려 16년이었고, 나중에는 20년으로 더 늘어났다.

 

이제 제국으로서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중요한 과제로는 하나가 남았다. 바로 제위의 승계 문제다.

 

가족법을 제정해 인구 증가를 꾀한 아우구스투스는 일흔여섯 살까지 살면서도 자기 자식은 남기지 못했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쉰 살이 넘으면서 후계 문제에 부심한 그는 점찍어 놓은 후보들이 하나같이 일찍 죽는 바람에 후계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조카 마르켈루스,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전 남편의 아들 드루수스, 친구인 아그리파와 딸인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두 외손자가 모두 창창한 젊은 나이에 죽었다.

 

갓 태어난 로마 제국을 온전히 유지하려면 제위의 첫 번째 승계가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후계자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자신도 영 마뜩잖게 여기던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 Augustus, 기원전 42~기원후 37)가 후계자가 된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마흔다섯 살이나 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선포했다(자신과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은 사람을 후계자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로마 황제는 중국 황제만큼 혈연적인 세습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번영의 준비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모한 것은 로마에 정치적 안정만이 아니라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평화도 가져왔다. 그림은 초기 제국 시대 폼페이 부근의 평화스런 농촌 생활을 그린 벽화다. 염소와 사람 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은 장차 다가올 로마의 평화를 예고하고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더 이상 정복은 없다

내실 다지기

초기 황제들

평화와 번영의 준비

로마의 평화

서양 문명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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