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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그리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그리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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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그리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의 민족이동과 노르만의 민족이동은 여러 가지로 닮은꼴이다. 둘 다 북쪽에서 남하해 기존의 유럽 세계를 재편성했다. 게르만족은 로마 말기에 이동을 시작해 지중해 세계 중심의 로마 문명을 더 북쪽, 유럽의 심장부로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의 원시적 형태를 형성했고, 문명적으로는 로마 문명을 이어받아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 문명(서양 문명)으로 키워냈다. 또 노르만족은 게르만족이 시작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를 완성했고, 문명적으로는 서양 문명의 폭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 두 가지 변화가 종합적으로 작용해 서양 문명의 뿌리(로마 문명)는 줄기(중세 문명)로 자라날 수 있었다.

 

중세 문명의 성격은 크게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로 압축된다. 두 가지 가운데 역사적으로 더 중시되는 것은 봉건제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그리스도교다. 또한 로마 문명이 중세 문명의 뿌리로 자라날 수 있었던 이유도 두 문명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유했기 때문이며,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민족이동이 서양 중세를 형성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클로비스, 샤를마뉴, 오토로 이어지는 서유럽의 정복 군주들은 하나같이 정복 활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전파에도 열심이었다. 심지어 그들보다 이름값이 떨어지는 영국의 앨프레드까지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게 그들에게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모두 손에 쥔 비잔티움 황제와는 달리 서유럽에서는 신성의 황제(교황)와 세속의 군주들이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을 이루었다. 하늘은 교황의 것이지만 땅은 군주들의 것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의 군주들은 피정복지를 그리스도교로 개종| 시키는 작업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으니까.

 

 

고딕 성당 11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서방교회의 힘이 서서히 동방교회를 앞서기 시작한다. 그 점은 복잡하고 화려한 궁륭과 뾰족한 첨탑으로 유명한 고딕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다(고딕이라는 말 자체가 고트족에서 나온 게르만 계통의 이름이므로 동방교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사진은 대표적인 고딕 성당인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이다.

 

 

하늘 측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리스도교 교회가 동과 서로 나뉘었다지만, 아직도 로마 가톨릭은 비잔티움 정교에 비해 힘이 약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독립 선언을 하고 스스로 분리되어 나온 격이니 교리상으로도 정통성이 뒤떨어질뿐더러 현실 정치적으로도 더욱 정교회에 미치지 못했다(비잔티움 제국은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티움 정교회의 서방 분점정도에 불과했다. 비잔티움 황제가 로마 가톨릭의 교세 확장에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노르만의 민족이동으로 로마 가톨릭이라는 하늘 아래 모인 땅들이 크게 늘어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점은 그 땅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하나인데 땅은 여러 개인 상황이다. 당연히 로마 교황의 힘과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커졌다. 그가 직접 관할하는 영토는 교황령뿐이었으나 그의 하늘 아래에는 중소 지주들이 많았다. ‘대지주였던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세속 군주의 힘이 교황을 훨씬 능가했으므로 교황은 그의 그늘 아래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제의 시대가 가고 고만고만한 군주들이 판치는 시대가 오자, 교황령은 늘어나지 않았어도 교황의 세속적 권력은 눈에 띄게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가톨릭은 말 그대로 보편 종교가 된 것이다가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의 힘이 비약적으로 커지자 비잔티움 교회도 생각이 달라졌다. 어차피 서유럽은 로마 교회의 몫이니까 욕심을 낼 수 없으므로 대신 경쟁적으로 동유럽의 포교에 힘쓴 것이다(비잔티움 측에서는 아직도 서유럽을 변방으로 여겼다). 때마침 노르만족의 남하로 비잔티움 북방에는 슬라브족의 인구밀도가 높아져 있었다. 863년 비잔티움 황제 미카일 3세는 모라비아(지금의 체코 동부 슬로바키아)에 전도사를 파견해 대성공을 거두었다당시 모라비아에 파견된 전도사들은 키릴루스(Cyrilus)와 메토디우스(Methodius)라는 형제였다. 그들은 현지 언어로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 문자를 본떠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이것은 형의 이름을 따서 키릴 문자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슬라브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또한 동생의 이름은 18세기 영국의 전도사인 존 웨슬리가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교도를 선교하면서 종교사에 남게 되었다. 영국교회의 한 교파로 출발한 감리교의 영어명은 바로 Methodism이다.

 

모라비아라면 서유럽의 관문, 따라서 이번에는 로마 가톨릭이 긴장할 차례였다. 교세 확장 경쟁에 나선 로마 가톨릭은 재빨리 폴란드의 슬라브인들을 개종시켰고, 달마치야의 크로아티아인들까지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집안 단속에 나선 비잔티움 교회는 서둘러 세르비아인을 끌어들였다서로 접경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다른 종교권에 속하게 되었다는 문제는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킨다. 결국 이 문제는 20세기까지 이어져 발칸 반도를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만들었고, 20세기 말에는 동유럽권이 와해되면서 민족 문제까지 겹쳐 다시 이 지역을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아일랜드 문제와 더불어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노력 끝에 10세기 후반 비잔티움 정교는 마침내 대어를 낚게 된다. 988년 러시아가 정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권력이 불안정했던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필요한 물리력을 바깥에서 확보할 마음을 먹었다. 키예프의 왕 블라디미르 1(viadimir , 956년경~1015)는 바실리우스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여 황제에게 군사 원조를 해주는 대가로 황제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비잔티움 정교를 받았다. 그는 비잔티움 황실과 혈연을 만드는 게 자신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리하여 러시아 정교회가 탄생했는데, 이후 15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는 러시아가 동방정교회의 수장이 된다(나중에 보겠지만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3의 로마라고 부르게 된다. 물론 2의 로마란 콘스탄티노플을 가리킨다).

 

 

교회 분열 동방교회(동방정교)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 교회)가 분립하자 유럽 세계는 그리스도교적 동질성을 점차 잃어갔다. 두 교회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초점으로 떠오른 지역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위치한 중부 유럽이었다. 지도는 두 교회가 이 지역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형세를 보여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그르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분권적 질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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