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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분권적 질서의 시작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분권적 질서의 시작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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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권적 질서의 시작

 

 

봉건제의 두 가지 뿌리가 종사와 은대지의 관습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봉건제는 동양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중국의 봉건제도 충성의 대가로 군주가 가신들에게 토지를 하사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실제로는 서양의 경우보다 훨씬 수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흔히 중국은 주나라 시대에만 봉건제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의 군현제, 그 뒤를 이은 한의 군국제(郡國制), 당의 번진 등은 모두 봉건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배하려면 중앙 권력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방의 수비를 위해서는 그 지역의 영토와 자치권을 제후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 황제는 변방을 국() 또는 군()이라 부르고 그 지역의 제후들에게 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그에 따라 역대 한반도의 왕조들도 중국 황제로부터 백제군왕, 대방군왕[고구려 왕], 고려국왕, 조선국왕 등의 책봉을 받았다). 잠시 존속했던 군현제를 제외하면 주의 봉건제, 한의 군국제, 당의 번진은 점차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추세를 따랐지만, 봉건제적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지역들이 나뉘어 있다고 해도 중국은 통합된 제국의 체제를 취했고 그만큼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변방의 왕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면 그것은 곧 반란으로 규정되었고, 진압 대상이 되었다. 중앙정부가 그것을 진압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새 제국으로 바뀌는 식이었다.

 

그에 비해 서양의 봉건제는 훨씬 수평적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황제가 지역을 지배하고 지역의 우두머리가 주민을 지배하는 방식이었으나 서양의 경우에는 상급 영주가 하급 영주를 지배하지 못할뿐더러 영주라 해도 중국의 지주가 하인을 소유하는 것처럼 농노를 소유하지는 못했다그래서 같은 착취라 해도 유럽과 중국은 착취의 형식이 달랐다. 중국의 지주는 명령과 권위에 의해 휘하 농민이나 하인을 착취했지만, 유럽 중세의 영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방식은 방앗간, 양조장, 도로 등의 이용료라는 형식을 취했다(물론 착취의 정도는 지주나 영주의 인성이 크게 작용했으므로 어느 편이 더 심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서양에는 동양에 없는 rent의 개념이 있었다. 이 말을 흔히 지대(地代)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한 토지세라기보다는 영주가 소유한 시설의 이용료라는 의미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식 제국에 비해서는 미약하지만 그나마 제국의 체제를 어느 정도 갖추었던 프랑크가 무너지면서 서유럽에는 두 번 다시 제국이라는 정치적 중심이 생겨나지 못했던 것이다(비잔티움 황제의 권력은 중국 황제에 못지않았으나 권력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신하들의 절대적 충성을 확보한 중국 황제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서유럽의 군주들은 일종의 계약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봉건제다.

 

따라서 봉건제가 빚어낸 국제 질서는 분권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의 중세 국가들이, 위상은 중국이나 일본의 제후국에 해당하면서도(일본에서도 영주들이 다스리는 영지를 이라고 불렀다)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국의 중앙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봉건 국가들의 수평적 구조는 중세가 끝날 무렵에 이르면 서유럽 세계에 다양한 국제 질서를 생성시키게 된다.

 

 

물론 상급 영주와 하급 영주가 존재했듯이, 모든 영주가 평등한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주에게서 넓은 봉토를 받은 가신들은 또다시 자신의 가신들에게 봉토를 할당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위에 대한 충성과 아래에 대한 봉토로 짜인 방대한 권력의 그물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봉건적 국제 질서였다. 그러나 그 경사도는 중국의 제국 체제에 비해 워낙 완만했으므로 수평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누가 군주고 누가 가신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상위 군주에 대해서는 가신이고, 휘하 가신들에 대해서는 군주였으니까. 그래서 서양의 봉건 군주들은 영주라는 독립적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가끔 제후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이 용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건적 서열에만 적용될 뿐이다)이 영주들의 서열이 바로 작위 제도다. 영주들의 작위는 보통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순서를 따르는데, 관할 영지가 곧 권력의 크기나 다름없었으므로 그 서열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자기 영지의 위치가 넓거나 경제적ㆍ군사적 요충지라면 남작이라 해도 실제의 권력은 공작을 능가할 수 있었다.

 

앞에서 프랑스·독일·영국 등의 원형이 생겨났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서유럽의 중세 국가들은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과 달랐다(오늘날의 국가들은 17세기부터 시작된 국민국가를 직계 조상으로 한다). 중세의 프랑스ㆍ독일 영국은 오늘날처럼 명확한 국경과 국민을 포함하는 영토 국가가 아니었고, 영주들 간의 완만한 서열구조로 존재하는 느슨한 국가였다. 물론 왕은 있었지만 대영주의 의미에 그칠 뿐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지위는 아니었다. 영주는 자기 영지에서 누구나 왕이었다(서양의 중세 동화에서 왕자와 공주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넓은 지역이 단일한 왕조로 묶인 동양과 달리 분권화된 서양 중세에는 왕자와 공주가 동양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왕이라 해도 프랑스 전역의 봉건 영주들을 중앙집권 체제 아래 강력히 관할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그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영주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휘하 영주들도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 강한 소속감은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분권적이었어도 종교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이었다. 다시 말해 땅의 중앙정부는 없었지만 하늘의 중앙정부는 있었던 것이다. 바로 로마 교황과 그가 거느린 각 지역의 교회들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교황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세속의 권력마저 중앙집권식으로 편제할 자신은 없었고 능력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종교적 지배자가 정치적 지배자를 겸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황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게 앞서 말한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차차 보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의 뜻대로 서유럽의 정치적 중심이 되기는커녕 독일 지역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지 못했다(오히려 중세 후기에 프랑스와 영국이 민족의식을 키우고 근대국가의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할 무렵에 이르면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은 다른 지역보다 교황권이 더 잘 먹히는 곳이었으므로 교황권의 성장에는 큰 역할을 했다. 좋은 경험을 쌓은 로마 교황은 이제 본격적으로 서유럽의 세속적 질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최대의 성과가 바로 십자군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그르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분권적 질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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