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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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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중세를 형성한 것은 로마-게르만 문명이었다. 로마가 중세에 남긴 유산이 그리스도교라면 게르만 전통은 중세에 무엇을 물려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봉건제다. 물론 봉건제가 성립한 데는 로마의 전통도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지만,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에 따른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제는 정치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사회경제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을 특히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들은 중세 후기,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맹아가 숙성할 무렵의 봉건제를 중시한 탓에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지만, 중세 초기에 봉건제를 낳은 동인은 주로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중세 내내 봉건제의 이런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정치와 경제가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될 수는 없다. 그러나 봉건제의 경제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봉건제를 단순히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 따르는 하나의 과정으로만 해석하기 쉽다. 역사에서는 모든 것을 시간순으로 설명해야 하며, 실제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정한 사건이나 제도를 그 이후의 전개 과정과 억지로 결부시키려 하면 목적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후자의 요소들은 이미 로마 시대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로마의 콜로나투스(소작제)가 그 원형이다(262쪽 참조). 지중해를 정복한 뒤 노예 공급이 끊기자 로마에는 콜로누스라는 소작농이 출현해 라티푼디움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중세 농노(serif)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봉건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경제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이다. 봉건제(feudalism)라는 말 자체가 봉토를 뜻하는 라틴어 ‘feodum’에서 나왔듯이, 봉건제는 군주가 가신들에게 봉토를 주고 충성을 약속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봉건제의 직접적인 기원은 종사제(從士制, comnitatus)와 은대지제(恩貸地制, beneficium). 종사제란 군주와 가신 간에 일종의 주종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동양식 군주-신하 관계와는 달리 쌍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즉 가신은 당연히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를 가지지만, 군주 역시 가신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 이것은 로마적 전통의 피호 관계(181쪽 참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갈리아와 게르만 사회에서도 예로부터 존재하던 관습이었다.

 

피호 관계가 성립하던 시기, 그러니까 공화정 시대 초기의 로마는 아직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때였으므로 갈리아나 게르만 사회와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딱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종사의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정이 성립하고 평민층의 일부(에퀴테스)가 점차 지배 세력으로 편입된 로마에 비해 게르만 사회에서는 종사의 관습이 훨씬 더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종사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이라고 봐야 한다(더욱이 로마의 북방 정복이 있을 때마다 게르만 종사제는 막강한 로마 군단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원동력이 되었다).

 

 

중세의 기사 기사의 근원은 로마의 에퀴테스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게르만의 종사적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위의 그림은 중세 기사의 전형적인 무장을 보여준다. 그림은 십자군 시대의 기사인데, 이런 기사의 모습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생존이 힘들었던 고대에는 단순히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물론 그 보호에는 생계를 해결해주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가 어느 정도 발달하자, 그 정도의 대가로만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가신은 없었다. 따라서 종사제가 유지되려면 뭔가 오가는 게 있어야 했는데, 그것을 설명해주는 개념이 바로 은대지제다. 은대지제란 군주가 자기 가신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토지를 대여해주는 것을 말한다(그래서 용어에 은혜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이것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시대의 프레카리유(precarium)이라는 토지 대여 관습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은 8세기 무렵 프랑크 왕국에서 종사제와 결합되면서부터다특히 샤를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물리칠 때는 이 은대지제가 톡톡히 한몫을 했다. 그는 이슬람군을 상대하기 위해 기존의 보병 대신 기병들을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병은 돈이 많이 들었다. 우선 말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르는 각종 마구와 무기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텔은 돈이 있는 자들에게 자비로 말과 무장을 갖추도록 권했다. 그 대가로 그는 기병들에게 은대지를 주었다. 로마 제국이 전 유럽을 석권하는 것을 종사제가 막았다면, 은대지제는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막았다. 결국 봉건제는 게르만의, 게르만에 의한, 게르만을 위한 훌륭한 제도였다.

 

9세기에 이르러 은대지라는 말이 봉토라는 말로 바뀌면서(남부 프랑스가 먼저였다) 본격적인 봉건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이름만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체제가 바뀔 수는 없었다. 은대지와 봉토의 차이는 토지 소유 관계에 있다. 은대지는 군주가 충성의 대가로 가신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므로 일회적인 성격이 강했고, 토지를 아예 준다기보다는 빌려주는 의미가 컸다. 따라서 전쟁을 앞두고 단기적으로 직접적인 충성이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제도였다. 자동차는 전기 배터리의 힘으로 시동을 걸지만, 주행할 때는 가솔린의 힘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세울 때와 유지할 때의 운영 원칙은 달라지는 법이다. 정복 전쟁이 끝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은대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충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군주는 토지를 가신들에게 사실상 영구히 팔아넘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봉토다.

 

이때부터 봉토는 가신들의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되기 시작한다. 특히 게르만 전통에 따라 맏아들에게 토지가 세습되었는데, 이 점은 나중에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앞서 샤를마뉴와 이레네의 결혼 계획에서 보았듯이,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가부장제와 장자상속제를 취하고 있었다).

 

 

중세의 성 기사와 더불어 가장 중세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이다. 사진은 영국 웨일스의 캐필리 성인데, 전형적인 중세의 성을 보여준다(영국은 비교적 전란이 적었으므로 중세의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을 뜻하는 게르만어인 부르크(burg)’에서 나중에 중세 해체기에 부르주아(boargeois)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그르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분권적 질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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