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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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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초기에 은대지를 받았을 무렵에는 원래의 땅 주인인 상급 영주에게 세금(일종의 토지 이용료)을 내야 했으나 은대지가 봉토의 개념으로 바뀌면서 영주들은 불입권(immunity)을 가지게 되었다. 불입권이란 원래 로마 시대에 황제가 설정한 면세지에서 비롯된 제도지만, 영주들이 은대지가 아니라 봉토를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는 면세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자치권을 뜻하는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상급 영주라 해도 하급 영주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봉건 영주들이 이렇게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경제적인 원인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영지 내의 농민(농노)들을 사실상 소유하면서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꾸렸던 것이다. 이것을 장원(manor) 경제라고 부른다이렇게 장원 경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게르만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로마 시대에 반농반목 생활을 하던 게르만 민족들은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정착 농경 생활을 하게 된다. 유목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민족이 새로운 정복지를 얻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성을 쌓아 그 안에서 살면서 피정복지의 농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서 세금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로마 제국 시대에도 그 북쪽의 게르만 민족들은 모두 사실상 장원 경제나 다름없는 정치ㆍ경제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영주는 성 안에 살면서 바깥의 농민들에게서 각종 세금을 받았다. 장원 내에는 농노와 농토를 비롯해 방앗간, 대장간, 양조장 등의 공동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물론 교회도 있었다. 자신의 장원에서 식량과 무기 등 온갖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수 있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이런 경제적 자립이 대외적으로 정치적 자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장원들 간에 교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이 원칙이었다. 중세 경제의 오랜 침체는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기사 서임 에스파냐의 카스티야에서 제작된 이 14세기 채식 필사본의 삽화에는 두 명의 중세 기사가 서임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국의 법학자 헨리 드 브랙턴은 영국의 법률과 관습법론에서 기사들이 서임식 때 어떠한 맹세를 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군주여, 들으소서. 하느님과 이 신성한 유물이 도움을 주신다면 당신의 삶과 당신의 손발, 당신의 몸, 당신의 재산과 당신의 세속적인 영광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불입권으로 정치적 안정을, 자급자족으로 경제적 안정을 확보한 영주에게 가장 큰 걱정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물리력이 없으면 대외적으로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장원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영주는 장원 내에 사병(私兵) 조직을 거느렸는데, 그 군대에서 장교의 역할을 담당한 게 기사였다. 기사는 신분상으로 귀족 바로 아래에 속했지만, 신분적인 개념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귀족이 아닌 평기사 이외에도 봉건 영주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상급 영주에게로 가서(인질의 의미도 있었다) 각종 교육과 기사 훈련을 받고, 스무 살이 되면 기사 서임을 받았다(상급 영주의 부인은 기사가 섬기는 레이디가 된다), 이 과정에서 훗날 기사도라고 불리는 예절과 덕목이 생겨났다.

 

대영주일수록 당연히 많은 기사를 거느렸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급 영주의 아들이라도 맏아들일 경우에는 상급 영주의 성에 갔다가도 나중에 아버지의 토지를 물려받으러 자기 영지로 돌아갔으나 차남 이하들은 그대로 눌러앉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자 점차 기사들을 거느리는 데도 문제가 생겨났다. 하나는 충성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무를 할당하는 것이다. 봉급과 업무가 없는데 누가 기사 직위를 맡으려 할까? 그나마 할 일이 없는 것은 그런대로 군사훈련으로라도 때울 수 있으나(이 때문에 토너먼트라고 불리는 마상 시합이 성행했다) 봉급이 없는 것은 좀 더 큰 문제였다. 봉건제가 안정되면서 영토의 분봉이 일단락된 다음에는 기사들에게 충성의 대가로 나누어줄 게 없었다. 아무리 영지가 넓고 재산이 많은 대영주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영주들은 하급 영주들이 반발의 기색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빌미로 삼아 전쟁을 벌였다. 기사들로서는 임무도 생기고 전리품도 챙기는 기회였고, 영주로서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물론 소규모 전쟁이 계속 이어지려면 운도 따라야 했다(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나중에 십자군이 기획된다)중세 서양의 기사들과 중세 일본의 무사들은 닮은 데가 많다. 일본의 무사들은 흔히 사무라이라고 불리는데, 한자로 , 옆에서 받드는 자라는 뜻이다. 다이묘(大名)라고 불리는 중세 일본의 영주들은 무사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서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일본에서도 역시 맏아들에게 재산과 토지를 물려주었으므로 차남 이하는 가진 것도, 딱히 할 일도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이루어 약탈을 일삼았는데, 당시 다이묘들은 이들을 아쿠토(惡黨)라고 불렀다. 또한 일본의 무사들에게도 서양의 기사도와 비슷한 무사도가 있었다(물론 무사도에는 레이디가 없었다). 기사들의 불만을 처리하기 위한 통로로 십자군 전쟁이 기획되듯이,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의 바쿠후(幕府) 정권은 대외 전쟁을 기획하는데,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토너먼트의 기원 전쟁이 없으면 기사가 할 일이 없다. 그래서 평상시에 기사들은 무예를 닦는 훈련을 겸해 마상시합을 자주 벌였다. 처음에는 훈련이었으나 점차 이것은 관중을 불러 모으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로마 시대 검투사의 역할을 중세에는 기사가 했다고 할까? 이것을 토너먼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오늘날 운동경기의 대회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십자군 시대가 열리면서 기사들에게는 토너먼트 대신 본격적인 업무가 주어진다.

 

 

영주와 기사 들은 자급에 자족했겠지만 농노들은 그렇지 못했다. 장원이 자급자족 경제라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영주가 독점한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농노들은 방앗간을 한 번 이용하려 해도 높은 이용료를 내야 했으며, 도로나 부두 시설 등도 마찬가지였다. 상속세, 주민세는 물론이고 결혼할 때는 영주에게 혼인세까지 내야 했다. 게다가 농노는 정기적으로 영주를 위한 부역도 해야 했다. 고향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 농민들이 치러야 하는 고통은 몹시 심했다. 당시 농노들은 뿔 없는 소라고 불리기도 했으니, 로마 시대에 말하는 짐승으로 불린 노예보다 전혀 나을 게 없는 처지였다.

 

11세기 프랑스의 주교 아달베롱은 이렇게 말했다. “신의 집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이 셋은 결코 헤어져서는 안 된다. 한 부분이 바치는 봉사가 다른 두 부분의 일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장원 내의 세 가지 신분 중에서 농노의 역할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농노는 장원 경제만이 아니라 봉건 질서 전체를 떠받치는 축이었던 것이다.

 

 

노예 아닌 노예 중세의 지배 신분인 기도하는 사람(성직자), 지배하는 사람(영주), 싸우는 사람(기사)이 각자 제 할 일을 할 수 있으려면 농민들이 필요했다.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농민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농민은 노예가 아닌 엄연한 소작인이었으나 농노라고 불릴 만큼 사실상 로마 시대의 노예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림은 중세 농민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데, 소가 아니라 말로 쟁기를 끄는 모습이 우리에게 낯설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그르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분권적 질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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