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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서유럽 왕가의 기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서유럽 왕가의 기원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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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럽 왕가의 기원

 

 

1

프랑스, 독일, 영국의 교과서에는 마르텔의 이름을 샤를, 카를, 찰스로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말이므로 우리로서는 아무렇게나 써도 좋다. 마르텔은 쇠망치라는 뜻인데, 이름에 걸맞게 그는 메로빙거 왕조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동부, 독일 서부 등 서유럽의 요지를 통일했으며, 더 중요한 성과로 732년 프랑스 중서부 투르, 푸아티에까지 진출한 이슬람군을 막아내 유럽 문명을 수호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궁재(재상)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의 음덕으로 정식 왕조를 열게 된다.

 

 

2

아버지처럼 그도 처음에는 궁재로 출발했으나 곧 자신이 옹립한 허수아비 메로빙거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신성의 권력이외에 실세가 필요했던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는 피핀의 왕위 찬탈을 승인했는데, 로마 가톨릭을 위해 탁월한 선택이었다. 피핀은 정복지에 로마 가톨릭을 포교했고, 후임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 롬바르디아를 정복해 기증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교황령을 이룬다.

 

 

3

800년 로마의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석한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에게서 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이로써 서로마의 멸망 이후 350년간 단절되었던 로마 황제가 프랑크족의 혈통으로 부활했다. 이는 곧 로마-게르만 문명, 중세의 시작을 알린다. 내친 김에 샤를마뉴는 당시 비잔티움의 여제인 이레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이 성사되었더라면 실제로 옛 로마 제국이 부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혼 계획은 보수적인 비잔티움 관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서양의 중세는 두 개의 제국과 두 명의 황제로 출발했다. 오늘날 서유럽과 동유럽의 문명적 차이를 낳은 기원이기도 하다.

 

 

4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 루이는 아버지의 종교를 더 발전시켰으나 아버지의 제국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세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 상속한 것이다. 여기에 재혼으로 얻은 넷째 아들마저 후계 다툼에 뛰어들면서 상속은 더 복잡해졌다. 결국 루이가 죽고 얼마 뒤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제국이 최종 분할되면서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기원이 싹텄다.

 

 

5

그는 불운한 맏이였다. 영토 분할을 주도해 아버지에게는 이겼으나 동생들에게는 지고 말았다. 그는 살아생전에 두 동생에게 알짜배기 영토를 빼앗기고 보잘것없는 영토와 이름뿐인 제위만 겨우 상속했으며, 그의 아들 로테르 2세는 그 제위마저 삼촌(루이)에게 빼앗겼다.

 

 

6

피핀은 형보다 더 불운했다. 영토 분할이 완료되기 몇 년 전에 죽었다. 결국 동생들에게, 특히 막내인 샤를에게 좋은 일만 한 셈이다.

 

 

7

큰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작은형은 죽었으니 이제 셋째 루이가 이다. 그러나 형들 때문에 동프랑크의 오지를 상속받은 그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막내와 힘을 합쳐 얼마 되지도 않는 큰형의 영토까지 분할하고 조카의 제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그의 혈통은 오래 계승되지 못했고 그의 영토에는 작센 왕조가 들어섰다. 이 점은 후대에 중세 독일에 기나긴 질곡으로 작용한다. 그가 물려받은 제위 때문에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고, 그의 적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독일에는 여러 공국이 분할 지배하는 분권의 전통이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8

형제 중 막내인 데다 어머니도 달랐던 샤를은 젊어서부터 머리가 벗겨진 듯하다. 스무 살에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할 때부터 대머리라는 별명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머리털에 힘이 실린 삼손보다 운이 좋았다. 둘째 형 피핀이 죽는 바람에 서프랑크를 차지했고, 셋째 형 루이의 제안에 따라 큰형의 영토까지 분할받은 것이다. 게다가 루이가 죽은 뒤부터는 잠시나마 제위까지 차지했다(서로마 황제의 제위는 이후 내내 서프랑크에 있다가 962년 오토 1세가 독일로 가져가게 된다). 더구나 그는 자손 복도 많았다. 형들의 자손은 모두 얼마 못 가 끊겼으나 그의 왕위는 10세기 후반 카페 왕조가 홍기할 때까지 100년 이상 세습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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