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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추락하는 프랑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추락하는 프랑스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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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락하는 프랑스

 

 

최대의 번영 속에서 최악의 실정을 거듭한 펠리페 2세 이후 17세기의 100년 동안 에스파냐는 계속 몰락했다. 펠리페 3세 때는 네덜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펠리페 4세 때는 포르투갈이 독립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도 확정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업적이라면 오로지 대를 이어왔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펠리페 4세의 아들 카를로스 2(Carlos , 1661~1700, 재위 1665~1700) 때는 그 유일한 업적마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결혼에 재혼까지 했는데도 후사가 없었다. 재산도 잃은 판에 혈통도 끊어질 처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망해도 3년은 가는 게 부자라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망해도 300년은 갈 터였다. 비록 보헤미아와 헝가리, 네덜란드를 잃었고, 세습령인 오스트리아도 사실상 독립했지만(카를 5세 때 본가가 에스파냐로 오면서 오스트리아와 멀어졌다), 아직도 합스부르크는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를 지배했고, 무엇보다 광대한 신대륙을 곁들인 에스파냐를 소유했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의 후계 문제는 여전히 유럽 각국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1700년에 카를로스는 예상대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으로 수백 년간 유럽 최대의 왕가로 명성을 날렸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대가 끊겼다(물론 오스트리아의 분가는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후사 대신 남긴 유언은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에게 에스파냐의 왕위와 합스부르크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던 것이다(루이 14세는 외가가 합스부르크였으므로 그의 손자라면 카를로스에게도 먼 친척이 된다).

 

카를로스는 원래 루이 14세의 팽창정책에 반대했으나 궁정 대신들이 프랑스파와 오스트리아파로 나뉘어 권력다툼을 벌인 끝에 프랑스파가 승리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렇잖아도 호전적인 루이 14세가 절대군주로 버티고 있는 프랑스에 그 유산이 넘어간다면, 합스부르크 대신 부르봉 왕가가 유럽 최대의 가문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머잖아 유럽 전체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게 뻔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즉각 반발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이해관계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나라는 오스트리아(신성 로마 제국)였다.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끝났으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끝나지 않았다(비록 황가보다 왕가가 더 적통이었고 가세도 컸지만), 합스부르크의 오랜 세습령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트 1(Leopold I, 1640~1705, 재위 1658~1705)는 바로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직계 후손이었으니(106쪽 참조) 당당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이다. 유산 상속 문제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꼬여드는 판에 상속권의 일부를 틀어쥐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가로서는 당연히 프랑스에 나라를 넘기라는 카를로스의 유언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1701년 영국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의 세 나라가 주축이 되어 다시 한 번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에스파냐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다. 전쟁의 양상은 얼마 전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과 대동소이했다. 개전 초기 프랑스는 우세를 보였으나 1704년 포르투갈 근해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함대가 영국과 네덜란드 함대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이번에도 해군이 아킬레스건이었다). 계속해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영국이 네덜란드 방면에서 프랑스를 압박해 들어가면서 육전에서도 프랑스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양측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오스트리아는 그 뒤에도 1년간 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실제로 종전된 것은 1714년이다)유럽의 전쟁과는 달리 동양의 전쟁은 대개 끝장을 본다. 중국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 주변 세력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고 대치하는 게 아니라 주변국들을 아예 말살해 버린다. 7세기에 당 제국이 고구려와 백제 같은 한반도 왕조들을 멸망시킨 게 그런 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전쟁은 치열하게 싸우다가도 서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국제전이 벌어졌어도 유럽 나라들의 수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는 경우는 없었다(심지어 폴란드 같은 나라는 몇 차례나 없어졌다가도 다시 생겨났다). 이런 차이는 민족이나 문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지리에 원인이 있다. 유럽에는 중국과 같은 지리적 중심이 없기 때문에, 로마 시대 이후 주변을 압도할 만한 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제전이 끝난 뒤에는 강대국들 간의 완충지대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세력 균형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가 가장 강한 나라였기 때문에 때로 유럽 대륙을 제패하려 시도한 적이 있지만(17세기의 루이 14세와 19세기의 나폴레옹), 유럽의 지리와 역사를 볼 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었다.

 

 

몰락하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이 에스파냐를 지배하게 된 것은 에스파냐에 큰 불운이었다. 신대륙의 금과 은이 대거 유입되었는데도 에스파냐는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전략적 판단 실수로 얼마 안 가 다 날리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불운의 절정이었다. 그림은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함대에 의해 초토화되는 에스파냐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약의 결과 프랑스는 명예를 얻었고 동맹국 측은 실익을 얻었다. 그럼 무승부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물론 프랑스의 영토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카를로스의 유언대로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는 그대로 왕위가 인정되어, 펠리페 5(1683~1746, 재위 1700~1746)로 에스파냐에 처음으로 부르봉 왕조를 열었다.(이후 그는 에스파냐에 프랑스식 법제를 도입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어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성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 평가를 해보면 프랑스는 막심한 손해를 보았다. 오스트리아는 아직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아 있던 네덜란드의 일부 (16세기 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 참여를 거부한 남부의 가톨릭 주들이 바로 그 지역인데,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한다. 110~111쪽 참조)를 손에 넣었고, 애초부터 바라던 북이탈리아와 나폴리, 사르데냐를 얻었다. 또한 프랑스의 위성국이었다가 전쟁에서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붙은 사부아 공국은 줄을 잘 선 덕분에 시칠리아를 얻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를 내주고 사르데나를 받아 사르데냐 왕국을 이루었다(사부아 왕가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대의 성적을 올린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지중해의 관문인 지브롤터와 지중해 무역의 요지인 메노르카 섬을 얻었다. 한물간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한 것을 최대의 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부록일 뿐이고 진짜는 따로 있다. 영국은 또 에스파냐에게서 신대륙에 노예를 공급하는 권리를 비롯해 신대륙에 관한 에스파냐의 여러 특권을 빼앗았는데, 여기서 영국의 장기적인 복안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유럽 대륙보다 바다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입은 가장 큰 손실도 바로 그 점이었다.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아메리카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맞섰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때도 양국은 여기서 접전을 벌인 바 있었다. 미국 동해안에서 서진하려는 영국과 캐나다에서 남진하려는 프랑스가 충돌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무승부로 끝났으나 그보다 승패가 더욱 뚜렷한 이번 전쟁에서는 승부가 가려졌다.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영국은 뉴펀들랜드를 차지하고 허드슨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여러 차례 대결을 벌이게 되지만17~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와 같은 기간에 아메리카에서도 맞붙었는데, 그래서 전쟁의 명칭도 쌍둥이처럼 각각 두 가지다. 즉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 윌리엄 왕 전쟁,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 앤 여왕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조지 왕 전쟁, 7년 전쟁 = 프렌치 - 인디언 전쟁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영국이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앞서나 가는 계기가 되었다.

 

 

세력 재편 전쟁이 끝나면 논공행상이 있다. 지난 세기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처음으로 각국의 분명한 경계를 설정한 유럽 세계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자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 모여 다시금 영토 협상에 들어갔다. 그림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의 장면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제국의 꿈

추락하는 프랑스

떠오르는 프로이센

3세계의 변화

집안의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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