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집안의 호랑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집안의 호랑이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4:03
728x90
반응형

 집안의 호랑이

 

 

7유럽의 지배자들만 영토 국가의 개념을 굳게 다진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폴란드가 사라질 즈음,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한 나라가 생겨났다. 바로 미국이었다.

 

7년 전쟁에서 영국이 프로이센의 편을 든 이유는 오로지 프랑스가 개입했기 때문이고, 프랑스의 개입을 저지한 이유는 오로지 아메리카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누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전쟁 기간 중 유럽에서는 체면치레만 하고 유럽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와 적극적으로 싸웠다. 그 성과가 바로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누르고 동양 최대의 식민지인 인도를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었고, 신대륙에서 프랑스를 확실히 따돌리고 패권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는 100점짜리였으나 아메리카의 경우는 0점짜리였다. 일인자가 되면 부패하는 것은 한 나라의 독재자만이 아니었다. 드넓은 신대륙을 호령하게 된 영국은 아직까지 자기 집안에 호랑이를 키우는 줄 모르고 있었다. 영국은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는 것으로 아무 문제도 없을 줄 알았으나 실상 총독은 식민지의 정치와 행정에 그다지 참여하지 못했다. 식민지인들은 북아메리카 북동 해안 지대에 13개 주를 건설하고 자치를 시작했다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를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로 부르며 직계 조상으로 받드는 식민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국 본국과 원래부터 거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처지였기에 그들은 신분상 평등했고(지체 높은 귀족 집안이 멀리 오지에까지 올 이유는 없으므로), 또한 그랬기에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도입할 수 있었다. 영국이 중세까지 서유럽 세계에서 변방이었기에 일찍부터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듯이, 신대륙은 영국의 변방이었기에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셈이다.

 

7년 전쟁이 벌어지던 무렵까지는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그런 대로 좋았다. 영국은 아직 프랑스와 식민지를 놓고 다투는 중이었으므로 식민지의 내부 사정에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또 식민지인들은 적당한 세금만 내면 정치와 종교에서 모두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므로 본국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아메리카를 독차지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유럽과 전 세계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획득한 영국은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영국 왕 조지 3(George III, 1738~1820, 재위 1760~1820)는 유럽 각국의 영토 분쟁을 목도하면서 자극을 받아 한 세기 전에 확립된 입헌군주제의 전통을 잊고 전제정치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래저래 돈 쓸 곳이 많아지자 조지는 자연히 식민지를 떠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많이 거두려면 세액을 올리기보다 과세 항목을 많이 신설하는 편이 훨씬 좋다. 1765년 그는 인지세법을 제정해 식민지 착취의 기치를 올렸다.

 

 

식민지인들에게 인지세법은 아주 황당한 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인쇄물에 인지를 첨부하는 것이었는데, 그 인지는 물론 돈을 주고 사야 했다. 이에 따라 신문과 책자는 물론 공문서, 증서, 심지어 오락용품인 카드와 학위 증서에까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세금이 덕지덕지 붙었다. 관세까지는 본국의 권한으로 식민지인들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관세를 올리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직접 과세, 그것도 터무니없는 과세 항목을 설정한 것은 만행이었다. 더구나 본국에서 세법을 마음대로 개정해도 식민지인들은 법적인 발언권이 없었다. 본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가 참여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즉각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거세게 항의했다.

 

예상치 못한 기세에 놀란 영국 의회는 1년 만에 인지세법을 폐지했는데, 속셈은 따로 있었다. 식민지의 항의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의회는 우선 법리상의 모순을 제거하고 새로운 법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새로운 법안은 그전보다 더 악법인 선언법이었다. 이것은 식민지에 관한 법을 제정하는 권리를 본국이 보유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식민지인들의 정치 참여를 애초부터 근절하려는 교활한 의도였다.

 

이렇게 법적 방비 장치를 해놓은 뒤 의회는 후속 법안을 제정했다. 그것이 1767년 타운센드 법으로, 내용은 식민지 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유리와 납, 페인트, 종이, 차에 대해 과세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식민지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자 1770년부터는 차에 대한 세금만 남기고 나머지를 없앴다. 그런데 1773년 영국 수상 F. 노스는 미국 식민지의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1773년 식민지인들은 식민지 자치에 대한 지나친 간섭에 격분하여 보스턴 항구에서 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습격해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후대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명백한 반란 행위에 영국은 즉각 응징에 나섰다. 위기감을 느낀 식민지는 1774년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대표들이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열어 강경책을 선택했다. 이제 무력 충돌은 시간문제다.

 

1775년 드디어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처음으로 충돌했다. 사실상 식민지 정부가 된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식민지 민병대는 그대로 정규군이 되었다. 선전포고는 멋들어지게 177674일 독립선언으로 대신했으니 여러모로 식민지답지 않은 식민지였다(실제로 식민지 시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식민지로 여기지 않고 뉴잉글랜드라고 불렀다. 당연히 영국은 올드 잉글랜드였다). 이제 영국으로서는 더 이상의 적수가 없어 자국민끼리 전쟁을 벌이는 셈이 되었다.

 

 

독립의 신호탄 17731216일 한밤중에 342상자의 차가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변장한 자유의 아들이라는 급진 세력이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습격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차 세계 역사를 좌지우지할 미국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일종의 변형된 내전같은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만에 프랑스를 필두로 에스파냐, 네덜란드가 속속 식민지 편으로 참전했다공교롭게도 식민지의 편을 든 나라들은 모두 프랑스가 일인자였을 때는 영국 측에 붙은 나라들이었다. 이는 각국이 서로 견제하는 유럽의 분권적 전통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근대국가 체제에 들어선 이후 유럽 각국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영국과 식민지의 갈등에 개입하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던 터였다. 그 명분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식민지의 독립선언이었다. 독립을 선언했으니, 이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이 된다. 대륙회의가 독립선언부터 서두른 이유는 바로 외부 원조를 끌어들이려는 데 있었으니 서로 손발이 잘 들어맞은 결과였다.

 

특히 프랑스는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개전 초기부터 대륙회의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애국파와 본국을 지지하는 충성파로 갈렸는데, 수로 보면 애국파가 다수였지만 재력가들은 전부 충성파였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륙회의는 일종의 국채라고 할 종이돈(paper dollar)을 발행했으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게 프랑스였다. 사실 프랑스는 참전을 선언하기 전부터 비밀리에 식민지군에 의복과 장비 등 군수품과 아울러 막대한 양의 화약을 공급해주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식민지군은 1777년 사라토가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식민지 측의 또 다른 문제는 해군이었다. 식민지군은 육지에서는 그런대로 대등하게 버틸 수 있었으나 해군력에서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에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해결해주었다. 참전을 선언하지 않은 유럽의 국가들도 대부분 식민지를 지원하고 나섰다.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등은 1780년 무장 중립을 선언하고, 중립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기들의 선박으로 식민지군에 군수물자를 실어다 주었다.

 

십시일반의 국제적 지원에 힘입어 식민지군은 전황을 역전시켰으며, 1781년 요크타운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할 수 없이 영국은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미국은 식민지의 딱지를 떼어버리고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독립 당시 미국은 5대호에서 미시시피에 이르는 북미 대륙 동쪽 해안 지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였다. 당시만 해도 땅은 넓었지만, 장차 이 나라가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해서 더욱 영토를 넓히게 될 뿐 아니라 불과 한 세기 만에 당당한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영국으로서는 당연히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겠지만, 미국이 탄생함으로써 서양 문명은 처음으로 다른 대륙에 자신의 적자(嫡子)를 만든 셈이 되었다. 이미 중남미 대륙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오래전에 뿌린 서양 문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지만, 그것은 서양 문명의 적자라고 보기 어려웠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서양 문명의 줄기에 해당하는 중세의 적통을 이어받은 게 아니었을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 문명을 이식했다기보다는 그곳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삼았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의 효과 대륙회의 의장인 존 핸콕에게 선언 작성자들이 선언문을 제출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섯 명의 작성자들 중에는 프랭클린, 제퍼슨, 애덤스 등 미국 초기의 주요 정치인과 장차 대통령이 될 사람들이 끼어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은 전쟁이 개시된 이후에 발표됨으로써 영국에 반대하는 유럽 나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제국의 꿈

추락하는 프랑스

떠오르는 프로이센

3세계의 변화

집안의 호랑이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