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프로이센
위트레흐트 조약에는 워낙 큰 규모의 영토 분할이 많았던 탓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사항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승인된 것이다. 1701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1657~1713, 재위 1701~1713)는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강적 프랑스를 맞이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절실한 연합국 측은 당시 프로이센 ‘선제후’를 프로이센 ‘왕’으로 격상시켜주었다(사실 그전부터 제후국이라기보다는 독립국이었으므로 내용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얼마 뒤에 벌어질 사태를 미리 알았더라면 제후의 독립을 승인한 오스트리아 황제는 무덤 속에서도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새 나라의 기틀을 놓은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lelin Ⅰ, 1688~1740, 재위 1714~1740)였다. 그는 후발 주자로서 단기간에 선두 주자를 따라잡으려면 하루속히 군사 강국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믿었다(지금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비군을 늘리고 군사훈련에 만전을 기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 재위 1740~1786)는 프로이센을 일약 군사대국으로 발전시켜 후대에 독일 국민들에게서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존칭을 얻게 된다【프리드리히 2세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군대식 가정교육을 싫어하고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 계몽주의 철학에 심취해 볼테르(Voltaire, 1694~1778)와 서신까지 교환하 는 등 인문적 소양을 쌓았다. 군주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웠고 더욱이 프로이센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나라의 군주로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 뜻을 받들 것을 다짐한 뒤에도 「반마키아벨리론」이라는 책을 펴냈다(이 책에서 그는 군주란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공복(公僕]일 뿐이라고 썼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왕이 된 뒤 그는 일세의 효웅이자 음모가로 변신한다. 어느 것이 그의 진면목이었을까?】.
전통의 강대국들은 활발한 해외 식민지 개척 경쟁에 나섰지만 아직 공국에서 벗어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약소국 프로이센으로서는 무엇보다 영토 확장이 급선무였다. 영토를 확장하면 자원과 인구도 늘어 국부가 커지며, 이 국부를 바탕으로 전쟁을 치르면 더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가 노린 1차 목표물은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는 남쪽의 슐레지엔이었다. ‘슐레지엔의 풍부한 석탄과 철을 얻는다면 유럽 최강의 군대를 조직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프리드리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상대하기 벅찬 강국이었으므로 프리드리히로서는 마음속으로만 슐레지엔의 문을 열심히 두드려댈 수밖에 없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윽고 프리드리히의 눈에 슐레지엔의 문이 살짝 열리는 게 보였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에스파냐 왕위를 꿈꾸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레오폴트 1세의 아들)는 남의 후계 문제에 간섭하기에 앞서 자신의 후계부터 걱정해야 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도 대가 끊길 운명에 처했으니 이래저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문을 닫을 때가 왔다). 딸은 있었으나 불행히도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인 게르만법에 따라 딸의 왕위 계승이 금지되어 있었다【당시 유럽에서 여왕의 전통은 드물지 않았다. 큰 업적을 남긴 유명한 여왕들만 꼽아보아도 선대에는 15세기 에스파냐의 이사벨,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고, 당대에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있었다. 이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중세 시대부터 로마-게르만 전통에서 벗어나 있던 ‘변방’이라는 점이다. 이는 게르만 전통이 강력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여왕이 없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여왕이 존재한 나라들은 대부분 오늘날에도 군주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유럽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영국ㆍ에스파냐ㆍ덴마크ㆍ네덜란드ㆍ벨기에ㆍ룩셈부르크ㆍ스웨덴ㆍ노르웨이의 여덟 나라인데, 모두 중세에는 ‘변방’이었다. 반면 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동유럽 등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지역들은 하나같이 오늘날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러시아는 20세기의 ‘특수한 사정’으로 군주제가 사라졌지만)】.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의 왕이 된 해(1740)에 카를 6세는 죽으면서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재위 1740~1780)에게 제위를 계승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 비운의 여제 역사 속의 여제로는 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잔티움의 이레네가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처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1000년 전의 여제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까지 동원해 쓰러져가는 합스부르크 황실을 지키려 애썼으나 프랑스, 영국에 이어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에마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간섭할 구실이 생겼는데, 이를 놓칠 프리드리히가 아니다. 그는 대뜸 군대를 출동시켜 슐레지엔을 점령해버렸다. 그러자 해외 경략에 주력하고 있던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아차 싶어 뒤늦게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들도 프로이센과 마찬가지로 침략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특히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좌절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는 더욱 열심이었다. 여기서 그쳤다면 굳이 전쟁이랄 것 없이 오스트리아의 해체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가 개입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반대한다는 것을 정책으로 삼고 있는 영국이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래서 다시금 국제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막상 도화선에 불을 붙인 프로이센은 초반에 슬며시 빠져버렸고, 전쟁 후반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전화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영리하게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승계를 인정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먹고 발을 빼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또다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전쟁은 또다시 무승부로 끝났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양측은 종전을 이루고 협상에 나섰다. 무승부니 자연 논공행상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가여운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위와 영토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잔꾀는 결국 덜미가 잡혔다. 이것이 곧이어 벌어진 7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재주만 부린 곰과 같은 처지가 된 프랑스의 눈에 돈만 먹고 튄 프로이센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가뜩이나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대해 위협을 느끼던 터였다. 그래도 프랑스는 억울함을 느끼는 정도지만 엉겁결에 알짜배기 땅을 빼앗긴 마리아 테레지아는 기가 막혔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부터 프랑스와 원수로 지낸 처지건만 오스트리아는 체면 불구하고 프랑스에 손을 내밀었다. 또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와 스웨덴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졸지에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남쪽의 오스트리아, 북쪽의 스웨덴에 완전 포위된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누군가? 그는 재빨리 영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포연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756년에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1748년부터 7년 전쟁이 시작되는 1756년까지 유럽 각국은 8년간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결국 다시 전쟁을 부르는 결과를 초래하기는 했지만, 각국이 복잡한 막후 협상과 음모를 전개한 그 기간은 당시 유럽의 국제 질서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근대국가적 질서로 편제되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번에는 프로이센이 주적(主敵)으로 몰렸으니 프리드리히로서도 전처럼 손을 뺄 수 없는 처지였다.
프리드리히는 직접 프로이센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프로이센의 인구는 유럽에서도 스무 번째였다. 병력 수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만큼 기동력과 공격적인 전술이 절실히 필요했다. 개전 초기 프리드리히는 기동력과 공격 전술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군과 한 차례씩 맞붙은 대회전에서 모두 승리하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로이텐 전투는 프리드리히를 존경한 후대의 전쟁 영웅 나폴레옹에게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단기전에서는 전술이 중요할지 몰라도 장기전이라면 국력이 좌우한다. 뒷심이 약한 프로이센은 개전 3년째가 되면서 차츰 패배가 많아졌고, 급기야는 수도 베를린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동맹국인 영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처럼 해외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맞서 싸웠을 뿐 육군에서는 프로이센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영국은 1757년 인도에서 벌어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하면서 인도를 단독 지배하게 되었다. 하기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프로이센이지 영국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을 살린 것은 러시아였다.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불과 6개월 동안 재위한 그의 유일한 업적은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고 군대를 철수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동맹 관계가 와해되자 다른 동맹국들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을 잃게 되었다. 마침내 그 이듬해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7년 전쟁은 끝났다.
또 무승부였을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더욱 확고하게 영토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원의 보고 슐레지엔을 확보한 것은 엄청난 잠재력을 비축한 셈이었다. 프로이센은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오히려 유럽의 강국으로 확고한 인정을 받았으니 하나도 손해 본 게 없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단기간에 전후 복구에 성공하고, 1772년에는 폴란드 분할에 적극 개입해 영토와 인구를 더욱 늘림으로써 프로이센을 최단기간에 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끌어올렸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집안의 호랑이 (0) | 2022.01.10 |
---|---|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제3세계’의 변화 (0) | 2022.01.10 |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추락하는 프랑스 (0) | 2022.01.09 |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제국의 꿈 (0) | 2022.01.09 |
서양사, 6부 열매① - 3장 자본주의의 출범, 세계 정복을 향해 (0) | 2022.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