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③강: 학교 평가가 교육의 질을 더 떨어뜨린다
시스템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면 학교 평가시스템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된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다는 기사는 매일 쏟아져 나오고, 그로인해 많고 많은 대학을 정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학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학교의 질을 평가하여 하위 등급을 받은 학교부터 점차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학령인구 감소는 대학에 먼저 직격탄이 되었다. 그 해결책으론 대학교를 정리하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학교 평가의 역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맞는 말이며, 더 이상 이의제기가 불가능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학교를 어떤 기준에 의해 골라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걸 일본에선 ‘질 보증’이란 말로 표현한다고 한다.
학교의 질을 보증하는 방법에 대해 우치다쌤은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다. 우치다쌤은 요로 타케시養老 孟司의 ‘츠쿠바 산에 호랑나비는 없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장면을 빌려 설명한다. 그 이야기는 긴 얘기이니 여기선 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만 생각해보자. ‘~가 있다’와 ‘~가 없다’를 증명한다고 할 때, 어떤 주장을 증명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얘기를 듣기 전엔, 두 가지 모두 증명하는 게 어려운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치다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둘을 증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 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만 밝혀내면 증명된다. ‘지리산에 반달곰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고 해보자.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산에서 한 마리의 곰만 발견해도, 곰을 봤다는 사람을 찾아도, 곰의 흔적(똥, 발자국, 동면을 했던 장소)만 찾아내도 증명이 된다. 직접적인 증거를 찾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관련된 증거를 여러 개 수집해도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가 없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샅샅이 지리산 전역을 조사해야 하고, 곰의 흔적마저도 완벽하게 없다는 것을 밝혀야만 한다. 그 뿐인가, 만약 인접한 야산에서 반달곰이 발견됐을 때에도 그 곰이 지리산에서 온 곰이 아니라는 것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가 없다’를 증명하는 것은 ‘~가 있다’를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품과 시간이 든다.
그런데 대학평가 이야기를 꺼내다가 갑자기 웬 과학적 증명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논지를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학교 질을 보증하는 방법이 꼭 ‘~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학교는 질이 보장된 학교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정적인 지표들을 철저히 부정해야만 한다. 그러니 우치다쌤은 “질 보증은 논리적으로는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모든 지표를 부정한다고 하는 절대로 끝을 볼 수 없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증명하기가 훨씬 힘들고, 그에 따라 많은 에너지도 필요하다.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만큼 교육의 질은 떨어진다
그런데 누군가는 ‘평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걸러내자는 것이 왜 문제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절대 끝이 없는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국립대학 교수 중에는 대학 설치 기준의 완화, 교양 과정의 개편, 학부 재편, 법인화와 관련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부성에 제출할 보고서만 계속 써왔기 때문에 그동안 거의 전공연구를 할 수 없었다는 몇 천, 몇 만 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에 동원되는 사람은 어느 대학이든 젊고 일처리가 빠르며 요령이 좋은 사람입니다. 귀찮은 일은 결국 그런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그들이 그런 보고서를 쓰지 않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을 때 얼마만큼의 업적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를 상상하면, 저는 그 헛된 노력에 깊은 허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가활동으로 일본의 고등교육이 잃어버린-그리고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 지적 자산이 얼마 만큼인지 문부성은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요?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저, 박동섭 역, 민들레 출판사, 78쪽
학교는 어찌 보면 연구를 해야 하는 곳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말해줄 수 있는 곳이며, 지적 자산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곳이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학교는 질적으로 좋은 학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퍼부어, 그에 반비례하여 교육의 질은, 학문에 확장은, 사회에 대해 조감할 수 있는 시각은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 이건 애초에 ‘평가를 통해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에도 위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야기가 진행되며 영화로 이어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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