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③강: 섬세의 정신으로 의식의 센서를 켜둬라
어쩌면 우린 너무도 당연하여, 더 이상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을 문제로 부각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면 ‘세상이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그걸 문제 삼아서 뭐하게?’라는 볼멘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보통 ‘문제를 문제 삼는 그 사람이 문제다(내부자를 부적응자로 보는 시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명장면을 [백만 달러의 사랑]에선 볼 수 없다. 절대로.
부조리에 적응하면 일상이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동섭쌤은 『백만 달러의 사랑』(이하 백만)이란 영화를 인용하며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영화는 본 적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순 없으나, 남자와 여자가 박물관에 조각상을 훔치러 갔을 때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박물관엔 흔히 적외선 센서 같은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장치 때문에 『엔트랩먼트』(이하 엔트)의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아마도 ‘백만’의 남자 주인공은 ‘엔트’의 여자 주인공의 적외선 센서를 피하기 위한 피나는 몸부림이 웃겼을 것이다. ‘백만’의 주인공은 그보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한 단계 높은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거 이거 ‘백만’이 훨씬 오래된 작품인데, 사람의 지성은 진보하는 것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백만’의 남자 주인공은 ‘캡틴 부메랑’이 울고 갈 정도의 부메랑 명수였다. 그는 박물관에 침입하여 적외선 센서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부메랑을 힘껏 던진다. 그 부메랑은 적외선 센서를 건들고 돌아온다. 그러면 경비원들이 그 소리에 놀라 부랴부랴 출동하여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주변엔 아무도 없으며, 사람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처음이야 ‘센서가 너무 민감하여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연거푸 계속 되면 경비원들은 ‘센서가 고장 났나 보다’라고 생각하여 아예 센서를 꺼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상황이 처음에 일어나면, 우린 부당한 상황을 감지하고 그것에 항의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수차례 반복되고 일상적인 상황처럼 되어버리면 우린 그걸 ‘그게 왜 문제야?’라고 의식의 센서를 꺼버리게 마련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처럼 의식의 센서를 끄고, 그저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무비판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 의식의 센서를 끌 때, 우린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섬세의 정신으로 기술하고, 또 기술하라
그렇게 무비판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선, 있는 현실을 그대로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고, 그런 문제들에 우리가 스스로 의식의 센서를 끄며 살아왔는지 여실히 알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를 기술만 하다보면, 누군가는 “그래 그런 문제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대안은 뭔가?”라고 묻게 마련이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이 ‘대안 없는 비판은 오히려 아니하는 것만도 못하다’는 비판이고, ‘꼭 성공하지 못한 것들이 사회에 대해 불만만 많더라’는 비난이다.
▲ 대안 무섭다고 기술 말고, 해법 모른다고 스위치를 끄진 말자.
하지만 이에 동섭쌤은 그렇게 답을 요구하며 기술도 못하게 만드는 현실을 비판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런 불편함을 감당하지 못해 얼버무리려 하거나, 자신의 어휘꾸러미로 손쉽게 해결책을 마련하려 하지 말고 ‘지적폐활량’을 키워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그 말과 함께 ‘기술description이 곧 처방prescription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기술 속에 이미 처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동섭쌤이 인용한 김영민쌤의 글은 너무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건 기술이야말로 어찌 보면 엄청난 일임을 알려주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후기는 기술을 통해 현실을 인식했다면, 과연 우린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이 얘기엔 ‘브리콜라’에 대한 이야기, 전국시대의 거부인 맹상군에 대한 이야기, 아이폰4이란 유작을 남긴 잡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를 통해 ‘사후적 지성’이란 생소하고도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5월의 연휴가 코앞에 다가온 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간절히 바라며, 이번 후기는 이만!
모든 정답이 단순하고 명쾌하게 주어진 표피, 즉 이념의 옷Iddenkleid이 주는 편익에 마취된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처방적prescriptive이다.
그러나 절절하고 형용할 수 없는 삶의 층층면면과 복잡성을 깊이 살아내는 글쓰기는 종종 기술적(descriptive)인 고백에서 멈출 도리밖에 없다.
파스칼의 변별처럼 <기하학적 정신>을 넘어서서 <섬세의 정신>을 익힌 글쓰기는 주변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펜 끝으로 어루 만져준다.
-김영민,『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김영민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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