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③강: 메르스보다 무서운 메르스 관련 공문
남은 그렇지 않지만 자신만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공명정대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번 후기에서 살펴봤듯이, 사람은 태생적으로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 밖에 비는 오지만, 그래도 강의실은 맑음.
관점을 지우는 게 아닌, 일그러진 상을 조금이라도 펴나가는 것
그래서 동섭쌤은 “세상에 흔히 유포되는 말 중에 ‘비워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근심과 걱정을 비우라는 말임과 동시에,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관점을 지우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관점이 있어야 상이 맺힌다’는 말처럼 완벽하게 비우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설령 비우는 게 가능하다 해도 관점이 없으면 상조차 맺히지 않아 세상을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일그러져 왜곡된 상을 펴나가는 일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왜곡된 상을 펴나가는 일’이란 말이 매우 심쿵한 말이었다. 그건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이면서도, 그 한계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결단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섭쌤은 ‘시지프스의 바위’를 예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돌에 깔아뭉개지지 않기 위해선 돌을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우리도 왜곡된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걸 조금씩 펴나가는 일을 해야 하니 말이다.
▲ 우리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위 사진처럼 왜곡된 상으로 보고 있다.
시스템의 장단점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가치 기준에 따라 일을 진행하면 되지만,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라면 다른 성향과 다른 관점을 아우르며 시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야 일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시간의 낭비를 막고, 지속성을 갖게 되어 원대한 계획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우린 엄청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사람이 달나라까지 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방대한 기록 문화도 간직하게 되었다.
▲ 실록청을 두어 왕의 행적을 기록하게 하고 왕은 살펴볼 수 없게 한 시스템은 이런 방대한 기록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때론 시스템이 사람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을 억압하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으레 진행되는 행사들이 있다. 그 행사에 대해 누구도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도 필요한 행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 했기 때문에 당연히 하고, 하라고 하니깐 한다.
이뿐 아니라 새로운 일이 발생했을 때도 시스템은 작동한다. 작년엔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학교는 당연히 취약지대로 분류되어 엄청난 제재를 받게 됐다. 수도 없이 많은 공문이 교육청을 통해 단위학교로 내려왔다. 학생들이 등교할 때마다 체온을 체크하라, 마스크를 착용하라,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의 외부활동을 금하라 등등의 공문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공문이란 단순히 ‘이런 걸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이 아니라, ‘이래야만 한다’는 강요이고, ‘그걸 위반하여 문제가 발생할 시엔 책임져야 한다’는 준협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선 교사들이 하나하나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메르스에 감염되지 않고 어떻게 활기차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상부기관에 ‘우리 학교는 메르스를 철저히 대비하는 학교’라는 이미지를 심어줄까만을 고심하여 보고서만 열나게 작성하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메르스보다 무서운 건 메르스 관련 공문’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다.
▲ 메르스는 한국을 마비시켰고, 메르스 공문은 학교를 마비시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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