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ㆍ누가가 마가보다 더 인기
마태나 누가가 마가보다 인기가 더 많은 것은 매우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마태ㆍ누가가 마가보다 더 자상하고 더 뿌듯하고 더 섬세하고 더 완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체를 보더라도 훨씬 더 세련되어 있다. 희랍어의 문체로 말한다면 누가의 문장이 가장 세련되었고 유려하다. 역시 개정판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판ㆍ원판의 묘미는 개정판이 따라갈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숭고한 가치가 있다.
마가는 복음서를 곧바로 복음의 선포로써 시작한다. 기쁜 소식의 선포는 곧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의 공생애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이야말로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마가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마가의 일차적 관심은 예수의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지 40년이나 지난 후 마가에게 예수의 출생이나 가문에 관한 정보는 수집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가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정직한 정보의 울타리 안에 머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단 복음서라는 문학적 장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느끼게 되고 한두 마디 훈수 두는 이야기를 첨가하게 마련이다. “예수는 아무개 아들이었어. 거 있잖아. 거 목수집…”
“그 집 애들이 7남매가 있었는데 예수가 맏이었대나 봐.”
“아니야! 5형제 중 야곱이 만이었어!”
“그 집안 족보는 내가 잘 아는데… 우리 집안하고는 할아버지 때 갈라졌어.”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예수 어릴 때 예루살렘의 어느 회당에서 봤다나 봐……… 아주 영악했다지.”
불과 40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면 아직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살아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그러한 항간의 사실에 관한 보도가 아니었다. 이왕 복음서라는 것이 한 인간의 바이오그라피적인 일대기형식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출생으로부터 출발해야 제대로 갖추어진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출생이나 유년기에 관한 이야기가 수집되거나 만들어지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세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마가복음서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의 바울의 비젼으로부터 이미 수난과 부활의 신적인 권세를 과시했던 사람으로서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출생부터 범용한 인간과 똑같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출생부터 범용한 인간과는 달라야했다. 뭔가 그의 신적인 계보를 과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항간의 객관적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예수는 나사렛이라는 갈릴리 시골마을에서 성장한 목수였거나(막 6:3) 목수의 아들(마 13:55)이었거나이다.’
인용
'고전 >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와 그릇된 인용 (0) | 2022.03.02 |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 공적인 사실과 전승담론의 조화 (0) | 2022.03.02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 공관복음서 (0) | 2022.03.02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 (0) | 2022.03.02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 산조의 전승양식과 복음의 전승양식 (0) | 202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