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와 그릇된 인용
재미난 것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에 관하여 사도 바울의 서한문에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그리고 복음서 안에 있는 최고층대의 자료인 Q자료 속에도 일체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서 AD 60년대까지만 해도 예수가 순결한 동정녀로부터 잉태되었다는 담론은 전혀 초대교회 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조설화들을 보면 대부분 알에서 태어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도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 큰 알에서 깨어 나왔다. 박이란 박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석탈해(昔脫解)도 큰 알에서 나왔고, 김씨시조 김알지(金閼智)는 계림 금궤짝[金櫃]에서 나왔다. 고구려시조 주몽(朱蒙)도 하나님[天帝]의 아들[子]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지만 닷되들이 만한 큰 알 속에서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는 주몽의 셋째 아들로 입적되어 졸본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난생설화가 없다.
유대사회나 한민족사회나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권력구조사회(patriarchal society)에서 누구를 시조로 만든다는 것은 반드시 부계를 단절시킬 필요가 있다. 난생도 한 방법일 것이고 처녀임신도 한 방법일 것이다. 주(周)나라의 시조 후직(后稷) 기(棄)도 그 어미 강원(姜嫄)이 하나님[上帝]의 엄지발가락 자국을 밟고서 잉태한 아이다. 동정녀탄생의 한 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生民)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 동정녀마리아의 잉태를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 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고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그런데 이것은 완벽하게 단장취의(斷章取義)의 그릇된 인용이다. 우선 이것은 예수의 동정녀탄생설화와는 일말의 관련도 짓기 어려운, 남북왕조의 곤궁한 역사적 정황에서 태어난 예언이다. 아하즈(Ahaz, BC 736~716 재위)는 유다왕국의 12대 왕인데 북조인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앗수르)에게 정복당하자 매우 비굴하게 앗시리아와 타협하면서 생존을 모색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방인컬트에 탐닉하여 자기 아들을 태워 죽이는 끔찍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온 마을 곳곳의 이교도적 서낭당에 분향을 하기도 했고 앗시리아의 상왕에게 참배하러 다메섹에 가있는 동안 자기가 본 앗시리아의 이교 제단에 너무 반해서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청동 제단을 그것의 복제품으로 대치시킨 그런 비굴한 인물이었다. 아하즈는 이렇게 제단까지 앗시리아식으로 바꾸어 과잉충성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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