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학파의 사상
견유학파(Cynicism)의 사상은 스토아학파(Stoicism)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스토익들(Stoics)은 견유학파의 자기절제와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을 계승하였지만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최소한의 즐거움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다운 인간의 행복이란 어떠한 외재적인 것에 의하여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 아파테이아(apatheia)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로고스(Logos)이며 이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덕(Virtue)이란 바로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욕정(passions)은 영혼의 질병이다. 자연에 따르는 생활이란 이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이성의 힘에 의하여 욕정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성으로써 욕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유덕한 사람이며, 이들이야말로 자율적 이성에 의한 자족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이성은 후대 자연법사상(Natural Law)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바울의 율법관도 이러한 스토아철학의 자연법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4】. 우주를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로 보고, 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하나의 로고스라고 보는 이러한 스토아철학의 어휘는 요한복음의 로고스사상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련을 운운한다면, 다시 말해서 예수를 말씀(로고스)과 일치시키는 사유체계를 운운한다면, 일찍이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에게까지 소급되어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감각(sensation)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유(intellect)에 나타나는 영원한 세계에 관한 모든 관념은 피타고라스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종교, 피타고라스의 수리적 신비주의, 견유학파(Cynicism), 스토아학파(Stoicism), 그리고 영지주의,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논리로써 꿸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모두 관련되어 헬레니즘문명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관계 속에서 기독교의 다양한 제문제들이 파생하였던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계항으로써 기독교를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독교를 이해하는 우리의 틀은 이러한 모든 함수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을 대변하는 로마시대의 사상가로서 우리는 세네카(Seneca, BC 3~AD 65)를 들 수 있지만 그는 불행한 제자를 두었다. 기독교도들을 별 이유없이 박해한 네로 황제가 바로 세네카의 제자였다. 사실 네로 황제야말로 초기 기독교 교회를 결속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도 네로가 죽였다. 네로가 사도 바울을 죽였을 그 즈음, 자기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할 수 있는 자비를 베풀었다(AD 65), 혈관을 끊은 후 비서가 받아쓰는 가운데 최후의 순간까지 장엄한 웅변을 쏟아내면서 침착하게 저승으로 사라졌다. 『명상록 (Meditations)』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21~180) 황제가 후기 스토아학파(Stoicism)의 대가라는 사실은 조선의 독자들에게도 너무 잘 알려져있다. 스토아철학은 황제로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로마사회의 가장 보편적 교양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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